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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an 30. 2023

도착하고 싶지 않은 아이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명절 때 시골 할머니 댁을 가거나, 부산 이모 댁을 방문할 때도 그랬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서 진행한 그림 그리기 행사나 어린이날 행사, 공장 견학, 수학여행, 소풍, 수련회, MT. 달리는 버스는 언제나 즐거웠다.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도착하면 그 장소에서 나는 고통을 맛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랬으니까.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 쓰고 싶지 않은 글쓰기, 견학, 놀이, 그리고 단합(단체기합) 따위의 행동들.


부모님과 함께 논산 훈련소를 향했다. 그날 라디오에서는 김광석의 10주기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들을 흥얼거렸다. 차는 충청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불안이 밀려왔다.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듣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차는 도착을 앞두고 있는 듯했다. 도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도착할 수 없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지도 모른다. 훈련소 인근 한 숙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묵었다. 다음날 일어나면 나는 훈련소에 들어가 부모님을 보지 못할 터였다. 훈련소 입구 근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1만 원짜리 시계 하나를 사서 훈련소에 들어갔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머리를 자르러 갈 때는 버스를 이용한다. 뒷바퀴가 있어 솟아오른 자리를 가장 좋아한다. 웅크리듯 앉아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웅크리듯 앉는 게 좋은 이유는 아마도 손톱을 물어뜯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불안을 달래기 위한 습관.

옆에서 달리는 자동차의 바큇살을 응시하는 일도 즐겁다. 그리고 도착하고 싶지 않다. 영원히 달리는 버스 안에 머물고 싶다. 어딘가에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싫다.


며칠 전 문득, 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공포가 엄습했다. 어릴 때처럼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나. 나는 멈추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할 순간이 다가온다는 게 무척 슬프고 두려웠다. 아니 두렵다.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도착할 부모님이 떠오르고, 그 역시 나를 두렵게 만든다.


어른스럽다는 건, 철이 든다는 건, 의연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는 나이로 마흔이고, 만 나이로 38세인 나는, 올해 6월에 다시 세는 나이는 사라지고 만 나이 39세가 된다. 조금 더 달릴 수 있게 되었다고 반가워해야 할까? 그럴 리가. 나는 누가 뭐래도 40년을 살았는데. 종점이 없는 버스 노선이 없듯이, 내 삶도 종점을 향해 달려간다. 어떤 불의의 사고로 중간에 멈출 수도 있다. 그런 순간이 '기우'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쉽게 떨치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불혹'이 아니다.


도착하고 싶지 않다. 영원히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앉아있고 싶다. 멈추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어쩌면 영원히 이 순간에 멈춰 있고 싶다는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끝내고 싶지 않은 욕망. 이 집착. 생을 향한 집착. 그렇게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나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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