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 박사 입학을 하고, 2014년 2월에 수료했다. 2016년 여름에 발표를 하고 심사를 하반기에 받았던 것 같다. 2017년 2월에 졸업했다.
오랜만에, 회식 후 잠이 오지 않았다.
낯가림이 심한 것도 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크고 해서 회식 2차는 언제나 부담스럽다.
물론,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게 가장 좋은데, 그 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게 마흔이 된 대한민국 남자의 좋지 않은 특성 가운데 하나일 것만 같다.
모두가 선배여서 그랬을까? 박사논문을 집필하고 있는 분들이 많아서 그랬을까? 우수 학술 논문 상을 받은 분이 내 앞에 계셔서 그랬을까?
박사논문을 받고서도 여전히 고민(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분이 있어서 그랬을까?
지방대학의 박사라는 열등감 때문일까, 한국어 교육 기관이 아니라 종합대학 내 한국어 전공 학과라는 구실로 비전공자(국문학박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격지심 때문일까?
혹은 이제 곧 배출될 수많은 한국어교육학박사들 앞에 있는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시시한 농담과 지나간 추억을 곱씹는 동안에도, '학위'와 '생계'의 문제가 계속해서 끼어들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모두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생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스스로는 아무 생각(욕심)도 없다고 말하지만, 꿈, 취향, 성향, 적성보다 앞서는 것은 결국, '생계'이기 때문일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속물이 된다.
전공 박사라는 막강한 자격을 준비하는 이들 곁에서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다른 자격들에 관해서 생각하면서,
술 한잔 기울이지 않은 채 대화에 끼어들고 있음은 상당한 고통이었던 것도 같다.
오랜만에, 회식 후 잠이 오지 않았다.
술에 취하지 않았음은 불행이자 다행.
술을 끊었노라 말한 건 자충수이자 신의 한 수.
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취하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모두가 광역시민이기에 같은 곳을 향한다.
"어떻게 모두 이쪽으로 오네요."
"아, 저는 이제 가 보겠습니다."
경남도민인 나는 다른 방향으로 빠진다.
그들이 나를 간단히 배웅한다.
"그래, 건강 잘 챙겨래이"
닮고 싶지 않았지만, 닮을 수밖에 없었던 선배가
손 내밀며 인사한다.
키가 크다.
"네, 봄이 오면 한번 봬요."
그는 확답하지 않았다. 봄이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걸까,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걸까.
땀이 난다.
그렇게 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