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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y 10. 2023

모르는 전화번호

  라디오 청취율 조사 기간에는 ‘02로 전화가 오면 받으셔서 우리 방송을 듣는다고 응답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자기를 뽑아 달라는 말이야, 선거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02로 걸려오는 전화를 끊지 마시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02 전화가 거부당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내가 자랄 적에 우리 집 전화기로는 어떤 번호로 걸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집안 가득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공포물이나 스릴러물에 활용되기도 했다. 누구인지 알 수 없고, 평소 전화 오는 시간이 아닌데도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물론, 연락처나 간단한 메시지를 표시하던 ‘삐삐’ 액정이 전화기에 도입되면서 가정 내 전화기도 발신 번호를 표시해주기 시작한 듯하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근절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짜증스럽고도 찝찝한 결과를 만든다. 모르는 전화번호, 아무리 따져봐도 전화 올 곳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을 때 그 전화는 성가시기만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찝찝하다. ‘뭐지? 혹시 언젠가 제출했던 이력서에 관한 답인가?’와 같은 식의 의문을 낳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받아보면, “안녕하십니까, 정용호 고객님 맞으십니까?” “네…”      


  몇 주 전에 출근하는 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차량 내비게이션 화면에 표시되는 숫자는 학기 초, 심지어 작년 크리스마스 전후에도 걸려온 적이 있는 번호다. 그때도 받지 않았다. 그러니 세 번이나 거부한 셈이다. 크리스마스 전후 다시 말해, 학기 말에 걸려왔다는 점에서 학생의 성적 문의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전화를 받지 않더라도 급한 상황이라면, 문자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전화번호로 남겨진 문자메시지는 없었다. 그래서 세 번째 걸려왔을 때도 받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어쩐지 찝찝하고, 누구인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조향장치에 있는 수신 버튼을 눌러 보았다. “여보세요, 정용호입니다.” “아이고, 제가 잘못 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응답하는 목소리가 당황스러웠다. 기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듯한 혹은 슬픔이나 절망이 가득한 듯한, 그런 노인의 목소리였다.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에 다급히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아이고, 이렇게 좋은 사람도 있네. 정말 고맙소” 

  “하하!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래 좋은 사람이 다 있네. 복 받으실 겁니다.”

  전화는 끊겼다. 때마침 들어온 좌회전 신호에 맞춰 학교로 향한다.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통화에 성공하기만 해도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보이스피싱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일단 제쳐 두었다. 물론, 범인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10초만 더 끌어달라고 안달하는 영화 속 경찰의 모습이 떠오르기는 했다. 

  아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이야기했다. 아내는 어쩌면 고독한 노인이 그리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그 번호를 잘못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요즘은 잘못된 전화로 전화를 걸었을 때 짜증스럽게 “그런 사람 몰라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도 친절하게 말해준 게 고마웠는지도 모른다고 분석해줬다.     


  포항에 다녀온 저녁, 관절이 쑤시고 피곤했다. 밥 먹고 설거지하고 보니, 부재중 전화가 있다. 당연히 모르는 번호. 어차피 받지 않았겠지만, 방해금지가 적용되는 6시 이후 걸려온 터라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도 7시에 걸려온 전화는 뭔가 있겠다 싶어 찝찝했다. 내가 걸치고 있는 업무 영역을 뒤적이다, 목요일에 강의차 방문할 부대의 장교임을 알았다. 한참 기다려도 그는 문자를 남기지 않았다. 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문자를 남겨 본다.      

  “안녕하세요.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전화기는 잠잠했다. 잠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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