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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Jan 15. 2023

낭인으로 고향에 서다

- 금의환향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인생의 짐을 몽땅 지워 주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봄에 꽃은 여느 해처럼 만발했다. 온천지에 꽃대궐을 이루는 자연이 내 삶에 무심해 보였다.

세 명의 동생은 여전히 학생이었다. 그들의 학업을 끝마치고 5남매를 출가시킬 일 고스란히 어머니 혼자의 몫이었다. 엮은 굴비 같은 일상이 마흔아홉에 과부가 된 어머니를 짓눌렀다.


아버지의 장례를 끝마친 후에, 나는 그대로 고향에 머물렀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신문 보급소 일과 신발 가게의 외상 장부 정리하는 것을 아버지가 주로 하셨다. 시골 사람들은 대부분 외상으로 물건을 사고 돈이 생기면 외상 빚을 갚곤 했기 때문에 장부 정리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상업고등학교 출신인 아버지는 금전 출납부에 일목요연하게 외상거래를 잘 정리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일을 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나는 연탄 대리점 운영하는 일도 맡았다. 하루에 대형 트럭 세 대 정도씩 연탄을 싣고 오곤 했었다. 고향에 있는 돈을 우리가 다 끌어 모으는 했다. 게다가 농사도 여전히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주도하면서 일주일에 몇 번씩은 읍내의 신발 도매상에 가서 물건을 떼오셨다. 어머니는 아름드리 큰  물건 박스를 서너 개씩 챙겨 완행버스로 환승을 했다. 버스들은 길 모퉁이에 있는 어머니의 큰 박스를 보고는 숫제 정차하지 않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멀미도 심해서 도매상을 다녀온 날이면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바라기'였던 비렁뱅이 '우상사'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먹지도 않고 울기만 했다. 내내 막걸리만 들이켰다. 그 이후 우상사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알고 보면 내가 사랑을 배반했다.

고향에 와서 지내게 되면서 그동안 지냈던 남친과의 관계도 정리하고 싶었다.


어느 날, 장터에서 윗집으로 올라오는 중에 느닷없이 비가 내렸다. 나는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다.


"어이, 같이 쓰고 가자." 아랫담에 사는 하 교장댁 막내아들이었다. 나보다 두어 살 위였다.

"어? 대구에 사시잖아요? 오셨네요?"

"집에 일이 있어서."

"아하"

그 이상은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고 우리는 윗마을까지 우산을 함께 쓰고 올라왔다. 그날 하 교장댁 막내아들과 우산을 쓰고 갔던 순간이 싫지 않았다. 하 교장댁 막내아들과 엄청나게 좋은 시간을 가지기라도 한 듯이 과장하고 부풀려 남친에게 전했다. 그는 내 속내를 전혀 모를 것 같았다. 내가 낭인으로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이 속이 상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 분풀이를 그에게 했다. 왜 그런 결단을 했는지는 나도 나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와의 사랑을 정리한 후에 고향에서 무한정으로 지낼 심산이었다. 내가 먼저 사랑을 배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친구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배신한 것 같지만 나는 안다. 내가 그를 먼저 배신했다는 것을...


논을  팔았다.

묵촌 앞 '열 마지기'는 우리 집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논을 정리해야겠다는 맘을 먹었다. 없이 살다가 겨우 땅떼기를 가지게 되어 깃발같이 여겼던 열 마지기였다.


"점점 농사짓는 사람은 없어질겨. 이거 곧 헐값이 된다고."

김주사가 열 마지기를 사겠다고 중간에 사람을 넣었다.

"미친놈, 남정네 없다고 벌써부터 우리 집을 무시하네. 그렇게는 못 팔지."

김주사는 거의 반 값으로 하자고 흥정을 보내왔었다.

"김주사의 말대로 해요. 빚 이자 주느니 논을 처분하는 게 나아요."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내고 몇 년간 아버지 병원치례를 하고 나니 큰 빚이 생겼다. 논을 팔아서 이자를 줄여야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게다가 모녀간에 장터에 벌려놓은 여러 가지 일을 다 해내면서 농사일까지 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양아치 같은 김주사의 계락을 당해내지 못했다. 열 마지기를 시세의 60퍼센트 정도에 팔았다. 대서소에 가서 계약서를 쓰고 그 열 마지기를 김주사 손에 넘겼다.

"차 양, 고마워!"

대서소 앞에서 김주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모습에서 늑대가 보이는 듯했다.


점포를 얻었다.

때마침 '교복 자율화' 바람이 불었다. 초, 중, 고에 다니던 학생들이 까발로, 스펙스, 월드컵이라는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한 집에 5~7남매가 있는 집안에서는 신발을 사서 대기가 바빴다. 고무신이나 검정 운동화만 신던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멋진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신발 가게의 매출액은 몇 배나 올랐고 장사도 무척 잘 됐다. 시장 안에 까대기를 대어 만든 가게는 장날이 아니어도 매일 문을 열어야 했다. 손님이 시도 때도 없이 왔다. 장날이 아닌 무신날에도 장사를 해야만 했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 그 시장을 지나가곤 한다. 다른 가게들은 문이 잠겨있는데 우리 가게만 불이 켜져 있었다. 판자 문짝은 지렛대로 받쳐서 열었다. 그곳에서 옹색하게 냄비에 밥을 짓거나 장부를 정리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일렁이곤 하던 꿈을 종종 꾼다.


아무래도 매일 문을 열 수 있는 점포가 필요했다.

"이제 우리도 도로변에 점포를 얻어서 매일 가게 문을 열어야겠어요."

"그렇제? 그래 보자."

어머니와 의논이 잘 맞아서 우리는 도로변 시계방 옆 점포를 얻어서 일부 물건을 옮겼다. 그래도 오일장에는 원래 하던 대로 시장 안에 있는 가게에서 장사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날에는 시장 안으로 왔다.


집을  팔았다.

방이 딸린 도로변 점포를 얻고 보니 윗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어머니, 차라리 윗집도 처분해요. 항상 비워 두느니. 이제 농사 거리도 거의 없는데."

어머니는 한참을 생각하셨다. 집을 없앤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속내를 알기나 한 것처럼 윗집을 사겠다는 자가 있었다. 방앗간을 하던 '꼬마'네가 벌써 우리가 집을 팔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던 모양이다. 꼬마네는 방앗간에 딸린 단칸방에 배다른 남매 일곱 명이 함께 지냈다.


"작자 있을 때 팔아요, 어차피 시골집이란 게... 나중에 그러다가 폐가로 변할 게 뻔해요."라고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며칠 생각하시다가 맘을 다잡으셨다. "그래, 몇 푼 안 되지만 팔자."

그리하여 우리 집이 꼬마네 집이 되었다.


그리고 배신당했다.

도로변 점포에서 신발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어머니가 더 이상 물건을 떼러 도매상에 필요도 없었다. 매일 한 번씩 도매상 차가 우리 점포에 왔고 거기서 필요한 것을 챙겨내렸다. 

"이렇게 장사 잘 되는 집은 첨이네요."

도매상 차를 몰고오던 김 씨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면소재지에 신발 가게는 우리뿐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우리 가게에서 신발을 샀다. 장사는 통발을 쳐놓은 미꾸라지 잡듯이 쉬웠다. 그런데 같은 건물의 옆 점포는 시계방이었다. 시계방은 늘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마을 남정네들이 모여서 커피를 시켜 마시거나 화투를 치는 사랑방 역할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식구처럼 지내던 시계방 여자가 그런 배신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아침에 보니 한 지붕 아래 또 하나의 신발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믿는 도끼에 제대로 발등이 찍혔다. 이 내용은 브런치에 발행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mrschas/37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걸어서 다니면 일을 때맞추어 처리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늘 여성용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나도 어머니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수금을 하고 배달도 했다.


"어라, 이러면 안 되지? 차양, 배운 사람이 펜대 잡고 지내야지. 이렇게 장돌뱅이가 다 되어서야 어디 쓰겠나?"

김주사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내게 말했다.

"...."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자전거 페달만 밟았다.

우리 논을 헐값으로 흥정해서 샀던 김주사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김주사는 동네 '아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볼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 김주사는 한 마디 더했다.

"생물과 노처녀는 때를 놓치면 못 파는 것이여."

'이제 겨우 스물일곱인데요?' 나는 맘 속으로 말했다.

김주사가 무슨 맘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속은 능구렁이 같았다.


조카를 키웠다.

오빠는 발령이 났던 해 겨울에 결혼을 했다. 오빠는 부부 교사가 되었다. 그 이듬해 태어난 조카를 덤터기 쓰듯이 내가 맡게 되었다. 그래도 조카를 보는 일은 행복했다. 핏줄이라 당기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의 별세, 이루지 못한 사랑, 시계방의 배신 등으로 망신창이가 된 우리에게 조카의 웃음은 숨을 쉴 수 있는 창과 같았다. 조카가 웃으면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급한 일이 있으면 조카를 둘러 업고 자전거를 탔다. 그렇게 업무를 보고 다니는 나를 향해 사람들은 말했다.

"차 양은 원더우먼이야. 사업도 하고 조카까지 키우니.."

나는 원더우먼이라는 말을 낭인이 되어 돌아갔던 고향에서 들었다.


결혼을 했다. 그리고 다시 고향을 떠났다. 아주 멀리. 아주 오래. 지금까지.

고향에서 2년간 회오리치듯 일상에 묻혀 지냈다. 미발령교사였던 나의 발령은 요원했다.


"나이 더 들면 흠 잡히니 마땅한 사람 있으면 결혼해라."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결혼은 '마땅한 사람'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나이가 차면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과 소개팅으로 만났다.

"좋다는 느낌이 안 들던데?" 내가 소개팅에 다녀와서 말했더니,

"싫지 않은 사람이면 좋은 기다. 너는 데려갈 사람만 있다면 얼씨구나 하고 가야 한다. 니가 볼 게 뭐 있노? 이쁘기를 하나? 키가 크나? 그냥 결혼해라. 됐다 마."

어머니는 나를 물건 치우듯이 결혼시키려 하셨다.

뭔가에 떠밀리듯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래서 또다시 고향을 떠났다. 그것도 아주 멀리.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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