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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Mar 29. 2023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 중증 환자 아들과 병원 노마드!

동료 교사가 식중독으로 입원한 아들을 간병하기 위해 병원에서 밤을 새웠다는 말을 했다.


"밤새 한 숨도 못 잤어요. 병실 보호자 침대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은 할 짓이 못되네요. 이런 생활은 며칠만 해도 병날 것 같아요."

"그 심정을 제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합니다."


그분이 간밤에 어떻게 보냈을지 나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 6년 동안 중증 환자인 아들과 병원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실 상황을 훤히 알 정도다. 그곳에서 지냈던 모든 일들이 또렷이 생각난다. 우리가 병원에서 보냈던 시간이 하룻밤의 꿈처럼 아련하다.


매주 금요일에 퇴근하면,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병원으로 향했다. 간병인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유급 휴가를 주었다. 그래서 금요일 밤에는 간병인을 대신하여 내가 병실에서 아들을 간병해야만 했다. 아들이 입원한 요양병원 병실은 8인실이었다. 보호자와 함께 기거하게 되니 16명이 한 병실을 쓰는 셈이었다. 밤이 되면 환자들의 기침이 심해졌다. 때로 응급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간호사나 간병인들이 후다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병실을 들락거렸다. 전등을 켰다가 껐다가 할 뿐만 아니라 석션하는 소리에 단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병실을 다급하게 오가던 슬리퍼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렸을까? 지금도 가끔 그 병원의 상황이 꿈에 나타나곤 한다.


아들이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에 우리는 또 다른 세상 속에 사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세상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픈 사람도 많았고 환자들마다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 우리 옆 병상의 환자는 당뇨 쇼크로 쓰러졌단다. 그 청년은 골든 타임을 놓쳐서 뇌손상 후 중증 의식 장애 상태로 투병 중이었다. 그의 부모는 병원에 올 때마다 눈물바람이었다. 외동아들이 그렇게 되었으니 이 세상에 아무런 낙이 없다고 했다.

- 치과 치료를 받다가 의식을 잃고 재활 중인 분도 있었다. 어머니가 그런 생활을 10년 넘게 하니 사춘기 자녀는 방황했고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결국 그분의 남편은 다른 분과 살림을 차렸다. 그분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인지는 있었던 분이었음). 긴 투병 생활의 끝은 그분이 돌아가심으로 끝이 났다.

- 신혼인데 남편이 바람을 피워 혼인신고도 마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분이 목숨만 건진 경우도 있었다.

- 의료 사고로 영원히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분, 산재로 드러누운 분, 교통사고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된 분,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입고 기약 없이 재활 중인 분 등등...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파트에 로열층이 있다면 병실에는 이른바 로열 침상이 있다. 로열 침상을 차지하는 것은 운이 좋아야만 가능했다. 창가 쪽이 바로 그 로열 침상이다. 창가를 맘껏 활용할 수 있고 한쪽만 다른 환자와 인접하니 가운데 있는 침상에 비하면 훨씬 한갓지다. 일반적으로 병실의 침상은 좌우에 환자가 있어서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러나 로열 침상이 우리 차지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아들은 아주 잠깐 동안 로열 침상을 사용해 보았을 뿐이다. 병실이 옹색하고 실내 환경이 좋지 않지만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지냈다.


대학 병원 재활 병동은 최대 4주간만 입원이 가능했다. 늘 다른 병원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마치 늘 떠날 태세로 사는 유목민 같은 삶이었다. 짐을 둘 데가 없으니 침대 밑의 빈 공간에 넣어두곤 했다.


또한 대학병원의 재활 병동은 입원할 자리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 사고 초기에는 아들의 상태가 심해서 리프트 기계가 있는 병원만 가려고 애썼다. 그런 병원에 입원하려면 대기 순번이 어마하게 길었다. 지내던 병원에서는 나가야 하고 입원하라고 연락해 오는 병원은 없었다. 결국 요양재활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런 곳은 대학병원에 비하면 입원 가능기간이 좀 더 길었다.  3-4 개월 정도는 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노마드 같은 병원 이동의 삶으로는 지탱할 수 없겠다고 여겨 요양병원으로 이송했다. 요양 병원에서는 수년간씩 머를 수도 있었다. 만 6년 동안 우리는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다. 중증환자의 이송은 상상 이상으로 번거롭다.


매주 금요일 밤을 병원에서 지새우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몸이 천근 만근이 된다. 피곤에 찌들어서 파김치가 되곤 했다. 비몽사몽 상태로 밤을 지내고 지하철을 타면 졸음이 쏟아졌다. 깜빡 졸다가 내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적이 몇 번 있다.


"여기 앉으세요. 너무 피곤해 보이시네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토요일 오전이었다. 그대로 쓰러질 듯한 몸으로 서 있는 나에게 누군가 자리를 내주었다. 그분이  천사처럼 여겨졌다. 미안한 맘보다 잠시라도 앉아서 쉬고 쉽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날 내게 자리를 내주었던 그분의 배려와 따스함은 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아들은 지금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투병 중이다. 사고 난 지 11년 째다. 우리에게는 아들을 품고 가는 삶이 이제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이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아들은 6년의 병원 생활을 뒤로하고 지금은 자택에서 활동보호사들의 케어를 받으며 투병 중이다.


지금은 그나마 병원 노마드 생활을 하지 않으니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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