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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Mar 15. 2023

사고를 만났습니다

- 자전거에서 넘어졌을 뿐인데...

아들이 한동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제 밥그릇을 자기가 챙겨서 먹은 격'이었다. 가만히 누워서 홍시가 입에 떨어지도록 기다리듯 했더라면 아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한동대학교에 합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학교 생활을 신나게 잘했다. 다양한 공동체 활동은 물론 SFC(Student for Christ) 위원장이 되어 유명무실하던 그 신앙운동 단체를 활성화시켰다. 특히 개.독.모.(개혁주의 독서모임)에서 독서와 토론으로 영성을 키웠다. 목사인 아버지가 읽다가 포기한 어려운 신학 서적을 모조리 챙겨가서 단숨에 읽어 재꼈다.


"저는 아무래도 머리에 특수 칩이 내장된 것 같아요. 이런 책이 제게는 어렵지 않아요. 그런 쪽으로 특화된 뇌를 가졌나 봐요." 


아들은, '계시 의존 사색'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남편과 잘 지내는 한 목사님은 아들의 카톡 프로필에 적힌 그 말을 보고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고 아들에게 설명을 해달라고 하셨단다.  그러자 아들은 마치 '위키백과'처럼 술술 막힘없이 그 사상을 설명하더란다.


아들은 공군 학사 장교(합격하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16주 동안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소위로 임관하는 제도)에 최종 선발되었다. 미래에 대하여 엄청 꼼꼼하게 준비한 그는 ENTJ(지도자형:비전을 가지고 사람들을 활력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들) 유형이었다.


아들은 네덜란드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그다음 학기에 네덜란드에 갈 계획도 되어있었다. 아들은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를 만났다. 자전거 사고였다. 수술을 했다는 전화를 받고 포항에 도착했을 때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엄마다.'


마음을 다 잡았다. 그러나 남편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남편은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자가 호흡이라도 돌아오면 좋겠어요.'


아들이 인공호흡기로 연명하고 있던 그때 가장 다급한 기도였다. 그대로 아들을 보낼 수 없었다. 제발 살아 있기만 해 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아들의 사고로 하루아침에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우리의 모든 일상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오직 아들이 살아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아들의 사고 일지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 10학번 경영 경제, 영어 통번역 전공인 아들은,  2012년 11월 7일 저녁, 교내 '학문과 신앙 연구소'에서 한 학우에게 1시간 정도 복음을 전하고 그다음 날 새벽 기도회의 특송을 준비하러 밤 10시경 셔틀버스 타려고 자전거로 이동하던 중 넘어져서(차량과 부딪힌 것은 아님)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사고 직후에, 본인이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에 도착한 후에 검사를 받으며 친구들을 불러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던 도중에 동공이 풀어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자전거에서 넘어질 때 두개골이 깨져 그것이 뇌동맥을 파열시켜 그 혈종에 의하여 뇌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고 수술을 했으나 지금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지 백체가 마비 상태입니다.

수술 후에 합병증 기미가 보여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이송하여 2개월 치료를 받은 후 다시 포항으로 되돌아가서 두개골 봉합수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콧줄을 통하여, 2년 정도 후에는 위루줄 삽입 시술을 하여 유동식 영양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또한 기관지를 절개한 목관 시술도 한 상태입니다.

재활, 요양병원 등을 수없이 전원 했습니다. 발병 7년이 지난 환자의 재활치료는 의료보험 급여처리가 중단되기 때문에 병원비, 간병비만 지출하고 그냥 병원에서 세월만 보내야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2018년 11월에 집으로 퇴원했습니다. 집으로 옮겨오니 국가에서 활동보조사를 지원해 주어 큰 힘이 됩니다. 집에 재활 시 필요한 운동기구를 비치하고 매일 2시간가량씩 재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응급상황이 발생할 것이 염려되지만 병원과 연계되어 있어 정기적으로 약처방을 받고 목관 교체 서비스도 받습니다. 홈케어 하는 동안 좋은 컨디션으로 잘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위루줄 교체를 위해 병원에 갑니다.

모든 행정적인 것과 간병을 우리 부부가 주관하기에 아들 간병으로 벅찬 나날이지만 감사한 일이 많았고 아들이 요양병원에 있을 때보다 좋은 쪽으로 나아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간병한 지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저체온증이 사라지고 신체 반쪽에서만 범벅이던 식은땀이 없어졌습니다. 침을 흘리지 않고 가래가 확연히 줄었고 바이탈은 언제나 양호합니다.

코로나19 시대에 살얼음판을 걷듯이 방역과 위생에 신경을 써서 잘 견뎌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에 코로나를 비켜가지 못했습니다. 부모인 저희 부부를 포함하여 모든 활동보조사들이 다 코로나에 걸려서 단체로 코호트 격리를 하여 코로나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코로나 백신 사각지대에 있었던 아들은 코로나가 심하여 가래가 천정에 까지 튈 정도였습니다. 기침의 뿌리가 다 뽑힐 때까지는 5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남편은 약국에서 식염수(인터넷 쇼핑으로 구입 불가)를 사다 나르느라 허리가 휠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주택법이 완화되어 저희 부부가 쉴 수 있는 세컨 하우스도 마련되었습니다. 24시간 활동보조 대상자가 되어 6명의 활동보조사들이 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듯이' 저희에게는 아들의 병상에서 보낸 11년 차의 세월이 그냥 긴 하루 같습니다. 그동안도 저희와 동행해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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