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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Feb 27. 2024

정월 대보름에~(2)

- 먼산이네 가족을 추억하다

고향 마을은 30~40호 남짓 모여 살았다. 김 씨, 하 씨, 차 씨 문중이 주를 이루었고 이 씨, 문 씨, 정 씨도 몇 집 있었다.


맨 윗집은 먼산이네가 살았다. 먼산이는 눈도 어둡고 가는 귀도 먹었다.

먼산이네 앞집은 문둥이 정 씨가 살았다. 정 씨는 나병 환자였고 그의 노모는 당달봉사였다. 그 노모나 정 씨를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다만 정 씨의 딸 기남이가 새벽 일찍 뒷산 언저리의 샘물을 길으러 나오곤 했다.


그런데 그 정씨네 작은 방에는 저녁마다 마을 남정네들이 모여 키득거리며 놀음판을 벌였다. 때로는 땅문서가 오고 가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건 일도 아니었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어느 날, 중촌 아지매가 곡을 하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문둥이를 마을에 두고 사니 이런 난리가 난 거지."

"새벽부터 재수 없게 윗샘 물을 그 가시나가 먼저 퍼가고.."

"우리는 더러버서 그 샘물 안 먹는다."


기남이가 중촌 아재의 아기를 낳았단다. 중촌 아지매는 실성한 사람처럼 둥천에 나와서 오열했다.


"내가 이 연놈들을 가만 두나 봐라. 당장 동네에서 쫓아내야지."


워낙 어릴 때 봤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이후로 기남이는 아이와 함께 대구로 나갔다는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아는 게 없다.


그때 먼산이는 중촌 아지매 옆에서 싱글거리며 웃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고 싱글거리노? 불난 집에 부채질하나? 시방?"


중촌 아지매는 차오르는 분노를 먼산이에게 다 퍼부으려는 심산 같았다.


"보세요. 중촌댁, 사람이 창피한 줄 아세요? 우리 호야 아배(먼산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요?"

"웃잖아? 불난 집에 부채질도 유분수지..."

"호야 아배야 원래 웃상이라 그렇지요. 그리고 호야 아배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구요."


먼산이 처, 대구댁은 사람들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몹시 교양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구댁은 대머리였다. 밤낮 주야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살았다. 게다가 꼬막손이라 손가락의 길이가 제각각 다르고 짤막했다. 하지만 그 손으로 빨래를 깨끗하게 했다. 집도 깔끔하게 청소하는 다부진 여인네였다.


먼산이네 부엌은 흙바닥이었다. 방도 흙바닥이었다. 토담집이었다. 먼산이네 방은 흙바닥에 가마니 멍석을 깔았다. 먼산이 네는 호야, 기야, 미야 3남매였다.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지만 손 끝 야무진 대구댁이 집안을 잘 챙겼다. 빨랫대에는 언제나 새하얀 빨래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문제는 먼산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먼산이 네는 얻어먹고 살았다. 그런 와중에 먼산이와 대구댁이 부부 싸움을 하면 먼산이는 제일 먼저 대구댁의 머릿수건을 잡아챘다. 그러면 대구댁이 백기를 들곤 했다.


그런 먼산이에게 재주가 하나 있었다. 고장 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잘 고쳤다. 마을 사람들은 라디오가 찌직거리고 주파수가 잘 안 잡히면 먼산이에게 들고 가서 고치곤 했다. 또 먼산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뒷간을 퍼낸 똥장군을 지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일이지만 먼산이는 웃상을 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통시를 퍼냈다.



고향의 봄은 숙이네 샘가에 있는 복숭아꽃이 피기도 전, 앞산, 뒷산에 진달래가 만발하기 전에 이미 당도해 있곤 했다. 겨우내 길이네 골목 양지바른 곳에서 구슬 치기를 했다. 어느 순간에  담벼락 밑에 나시랭이(냉이), 빼뿌쟁이(질경이)가 살포시 연녹색을 띠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럴 때쯤이 바로 정월 대보름 께다. 철 모르는 나물들이 이른 봄을 서둘러 알릴 때쯤, 정월 열나흗날, 길이네 미나리 꽝을 지나 너른 논에서 불놀이가 시작됐다. 금지되었던 불놀이를 그날만큼은 대놓고 해도 되었다. 그 불놀이에 가장 신바람이 나는 녀석은 바로 기야였다. 기야의 불통 돌리는 솜씨를 따를 자는 없었다.


 https://youtu.be/Ogq2Aifs4EY?si=oFsVcYrCYhx5HmZT


"모두들 나를 따르라!"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형편의 기야였지만 불놀이를 할 때면 골목대장이 되곤 했다.  


먼산이 네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며 밥을 얻었다. 하루하루 밥을 얻어서 먹어야 하는 집이었다. 그런 먼산이네가 가장 기다리는 날은 바로 정월 대보름이었다.


"밥 좀 주이소!"

"조리 밥 주이소!"

"소쿠리 밥 주이소!"


먼산이네 호야, 기야,  미야는 바가지나 조리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오곡밥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만큼은 인심 후하게 오곡밥을 먼산이네 자식들에게 퍼담아 줬다.

먼산이네 애들이 하는 모습이 부러웠는지 마을의 꼬맹이들도 복조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밥 좀 주이소!" 라며 오곡밥을 얻었다.


일 년에 한 번 먹는 김은 오곡밥과 찰떡궁합이었다. 호야보다 영리한 기야는 얻어온 김을 오곡밥과 함께 먹지 않고 3등분 한 것을 다시 7 등분하여 21개로 나눠 주머니에 챙겼다. 그리고 호야와 미야가 밥을 다 먹고 나면 그 때야 마치 맛있는 과자인양 김을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그럴 때면 호야와 미야는 김 한 조각이라도 먹어보려고 별의별 협상을 내밀곤 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다. 기야는 호야와 미야가 군침을 흘릴수록 더 맛있게 김을 씹어 먹곤 했다.


아무튼 일 년 내내 정월 대보름이라면 먼산이네 가족은 굶을 일이 없을 듯했다.




호야는 학교 주사로 들어갔고 기야는 기술을 배워 대구로 나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러나 호야는 결혼도 안 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래도 갓난아기 때부터 영양이 골고루 섭취되지 않아 면역력이 바닥이라 건강이 여의치 못했던 것 같다. 내 오빠의 친구였던 호야는 묵을 호인이었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행복한 한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났다. 호야는 그냥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린다.



세월이 물처럼 흘러 버렸다. 먼산이와 대구댁은 벌써 세상을 떠났으려나? 기야와 미야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고향이 그리우면 고향의 까마귀도 반갑다는 말이 있다. 오늘 슬쩍 내 곁을 지나가는 사람 중에 어쩌면 그 기야와 미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 그들을 해후한다면 어릴 적 일을 옛 얘기 하듯 나누고 싶다.

그리고 기야와 미야에게 따뜻한 오곡밥을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 찰진 찰밥을 좋아할까? 고슬고슬한 찰밥을 좋아할까? 아니면 어릴 적 정월 대보름에 밥을 얻으러 다녔던 가슴 아픈 기억 때문에 찰밥을 아예 마다 할까?


#고향  #추억  #정월 대보름 #당달봉사 #나병환자 #오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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