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계획형 J는, 꼼꼼하게 계획해 두었던 것을 실행하는 것이 삶인 듯하다. 내일, 일주일 후, 한 달 후, 일 년 후 일을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느라 오늘을 소비하며 보낼 때가 적지 않다. 아무래도 나는 심한 J인듯하다. 왜냐하면 닥쳐서 하면 될 것도 미리 준비하느라 시간을 많이 보내기 때문이다.
스포츠데이 때, 교사 릴레이 선수도 했고, 사제동행 축구 멤버로 활약했다. 축구장에서 홍일점 선수였다. 내 조끼 등판에는 백넘버 1번이 선명했다. 주로 백넘버 1번은 팀의 에이스나 골키퍼에게 주는 번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따라다니느라 바쁜 내게 부여된 1번은 부동의 백넘버였다.
스포츠데이가 다가오면 거의 한 달 정도 준비하는 운동을 하곤 했다. 그렇게 단련하고 나면 릴레이에서 앞서가는 선수를 따라잡기가 어렵지 않았고 축구도 풀타임으로 뛸 수 있었다. 운동할 시간이 없으면 야밤에라도 나가 뜀박질했다. 사제동행 축구대회를 위해 밤마다 뜀박질했던 에피소드를 적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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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스포츠데이 준비하듯 해야 한다고 여긴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여행 중에 아플 수도 있다. 또한 피곤으로 지치면 새로운 것을 보더라도 심드렁해진다.
제일 먼저, 오키나와행 항공권을 티켓팅한 후에 산책을 시작했다. 산책으로 여행을 위한 준비 운동, 워밍업을 했다. 일본을 다녀왔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엄청 많이 걸었다는 것이었다. 여행 기간 동안 잘 버티려면 관절도 챙기고 근력도 키워야 한다. 그래서 홈트도 하고 실내자전거도 타면서 체력을 다졌다.
또한 틈나는 대로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하나씩 챙겼다. 요즘은 트리플닷컴이라는 앱에서 준비물을 체크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내게 쓰기 메일>에 국내여행, 해외여행을 분류하여 준비물을 깨알 같이 적은 후에 보내 둔다. 그러면 어디서나 꺼내 볼 수 있다. 그 방법으로 하니 짐 챙기는 데 시간도 절약되고 빠뜨린 물건이 거의 없게 된다. 어떤 여행에서 미처 챙겨가지 않아서 아쉬웠던 것이 있었다면 추가로 기록한 후에 다시 메일링 해둔다. 이 방법이 메모 노트를 활용하는 것보다 내겐 더 나았다.
부랴부랴 가게 된 여행일지라도 준비는 꼼꼼하게 잘해야 한다. 있을 건 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는 있는데...'라는 말을 여행지에서 하게 될 때는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필요할 때 쓸 수 없다면 여행 중에 불편을 겪게 된다.
여행 준비 운동으로 시작한 산책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어졌다. 해가 길어진 탓에 산책길은 훤했고 하늘도 푸르렀다. 일상을 내려놓고 집을 나서기만 했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거리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비로소 초록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신록이 싱싱한 생명력을 머금어 아름답게 보였다.
나비, 비둘기, 고양이도 보였다. 요즘 나비들은 사람이 곁에 가도 꿈쩍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가까이 갖다 대도 꿀만 빨고 있었다. 나비가 겁이 없었다. 비둘기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친해진 것인지 자연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 곁에서 시위를 하는 것인지? 인간의 위상이 떨어진 것인지?
"돼냥이다~"
라고 딸내미가 말했다.
"뚱뚱하다고? 돼지 같은 고양이란 뜻이구나? 그러면 뚱냥이가 더 낫겠다." 내가 우스개로 화답했다. 그런데 산책길을 가로막고 있는 고양이들도 겁 없이 우릴 쳐다봤다. 사람을 보면 도망가는 법인데... 돼냥이는 뚱뚱한 고양이를 일컫는 말이다. 사람이든 고양이든 통통하면 인물이 나기 마련이다. 돼냥이들이 오동통하여 탐지게 보였다. 난 고양이를 싫어하는데 우리가 가는 산책 길 한가운데 눌러앉은 고양이는 꽤 귀여워 보였다.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자태다. 이러다가 돼냥이들과 정들 것 같다.
여행이란, 준비할 때부터 이미 여행이다. 어떤 이들은 그 셀렘 때문에 여행을 간다고 했다. 여행 준비 운동으로 산책길에 나서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상대방의 맘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집안에서는 그냥 할 말만 하고 지냈다면, 산책 길에서는 경청하며 들어주는 대화가 이어졌다. 한 주제를 가지고 한참 얘기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집에서는 하고 싶은 말만 했다면 산책길에서는 듣고, 말하는 대화를 했다.
아무튼 매일 저녁, 식사를 일찌감치 끝내고 집을 나섰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 이모한테 부탁했다. 철철철 물 흐르듯 짙푸른 산*이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은 산책길 옆 좁은 도로로 퇴근 중이었다. 삶은 아침에만 치열한 것이 아니었다. 저녁에도 아침만큼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느라 바빠 보였다.
내가 찍은 고양이 사진을 딸내미가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고양이만 달랑 떨어져 나오고 배경은 사라졌다. 스티커처럼 보였다. 그걸 '누끼 따기'라고 한단다. 개발자 딸내미 덕택에 매일매일 신기한 걸 배우기도 했다.
여행에 앞서 애피타이저로 맞이한 가족 산책길은 포근했다. 나는 꽃과 나무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댔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산책길을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 후회됐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계속 저녁 산책을 할 작정이다.
눈앞에 놓인 일만 하느라
삶에 퍼프가 필요하다는 걸 몰랐다.
잠깐씩 일상을 내려놓는
삶의 환기를
하지 못한 채로 살았다.
5/19 ~ 5/22(3박 4일)에 다녀온 '오키나와' 가족 여행기입니다.
* 철철철 물 흐르듯 짙푸른 산: 박두진의 '청산도'에서 빌려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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