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유 Jun 08. 2024

한파에 "사장님 온수가 안 나와요"

시골민박 초보사장 성장기 5. 어메이징 고성사계


  밤 10시가 조금 넘은 늦은 시간 전화벨이 울렸다. 손님이다. 싸한 느낌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네. 고유의 뜰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덜덜 떠는 숨소리가 들린다.

 "사장님, 샤워를 하고 있는데요. 갑자기 온수가 안 나와요. 너무 추워요."


고유의 뜰을 열고나서 처음으로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옷을 두툼하게 껴입었는데도 청소하느라 집과 숙소를 오가는 동안 오들오들 몸이 떨리고 발가락이 땡땡해질 만큼 추웠다. 숙소 처마에는 고드름이 나란히 얼었다.

설마 온수기가 고장 난 건가, 쿵쿵대는 심장과 어지러운 생각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고 오밤중에 난데없는 물벼락에 떨고 있을 손님께 공허한 질문을 던졌다.

"손님,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 샤워를 오래 하시는 중이셨을까요?"

이불킥 예약..


어쨌든 원인은 온수기 용량 + 많은 물 사용량이었다. 8평짜리 작은 숙소다 보니 최대로 들어갈 수 있는 온수기 용량이 50L다. 문제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상수도 온도가 너무 낮다 보니 온수를 한 번에 오랫동안 사용할 경우 온수기에 뜨거운 물이 다시 채워지기까지 다른 날보다 오래 걸린다는 점이었다. 영하의 날씨에는 한 번에 30분 이상 물을 쓰면 찬물이 나오기 시작하고, 다시 데워지기까지 또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 사실을 나와 남편도 그 사달이 나면서 처음 알게 됐다. 왜냐면 우리도 한파가 처음이었으니까.  


  로맨틱한 밤을 보내고 싶었던 젊은 커플의 로망에 말 그대로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일단은 추위에 떨고 있을 저들을 구해야 했다. 집에 있는 큰 수건과 담요들을 총 동원해 다급히 숙소로 갔다. 굳게 닫힌 샤워실 문을 앞에 두고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문 앞에 가져간 것들을 고이 두고 얼른 나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름 아닌 '각오'였다. 손님한테 욕먹을 각오, 전액 환불을 무릅쓸 각오, 악성리뷰를 마주해야 할 각오. 이미 시간은 11시가 훌쩍 넘었지만 노심초사하며 잠 못 이루고 있을 때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손님께 온 메시지. 열기가 두려웠다. 대체 무슨 말이 쓰여 있을까. 느린 어깨를 부여잡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사장님, 저희 잘 씻고 나왔어요. 걱정하실까 봐 늦었지만 메시지 보내드려요. 저희가 온수를 너무 많이 써서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그리고 담요랑 수건 많이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눈을 의심했다. 아니 사과는 도리어 우리가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우리도 몰랐지만 어찌 되었든 주인이 먼저 안내를 해 드리는 게 우선이니까. 너무 죄송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이런 천사 같은 손님들이 계시다니!


그래도 해드릴 건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환불이야기를 꺼냈는데, 전혀 아니라고 펄쩍펄쩍 뛰셔서 반액 환불해 드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미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간식거리도 챙겨서 드렸다. 손님들이 퇴실한 후 남겨주신 방명록을 펼쳐보았는데 고유의 뜰에서 정말 즐거운 추억 많이 쌓고 간다고, 사장님 부부가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칭찬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잔뜩 긴장해서 쪼글아들었던 마음이 서서히 펴지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세상에는 아직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뭉클했다.


  이후에도 날씨 관련 에피소드는 차고 넘친다. 온수기 사용 안내문도 큼지막하게 붙여놓고, 동파방지와 제설장비 준비에 아주 심혈을 기울이느라 긴장감 도는 1월을 보냈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 눈 떠보니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있는 날이 며칠째 이어졌다. 겨울왕국의 낭만은 짧고, 제설은 길다. 삽을 들고 열심히 눈을 퍼 나르고 있는데 큰 길가로는 엄청 큰 제설차가 지나갔다. 제설차자 돌아다니니 안심이 들면서도 우리 집 앞 골목도 들어와 주면 좋겠다는 욕심이 뒤섞였다. 하루는 대폭설로 인해 온 가족이 고립되고, 예약 손님께도 취소 요청을 드렸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입춘에도 춘분에도 눈이 왔다.

새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눈과 씨름하다 보니 어느덧 3월이 되었고 아이들은 학교로 어린이집으로 다시 나갔다. 눈이 끝나니 양간지풍이 시작됐다.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었다. 산불 조심에 또 긴장감 도는 고성이다. 4월 중순에는 갑자기 여름날처럼 더웠다. 분명 전날까지 내복을 껴입었는데 너무 더워서 반소매 티셔츠와 펑퍼짐한 얇은 바지를 꺼내 입고 청소를 했는데도 땀이 뻘뻘 났다. 그러다 5월,  설악산에 눈이 많이 내려 대설주의보 문자가 날아왔다. 정말 어메이징 퐌타스틱 강원도 고성의 사계절 날씨.


  시간도 계절도 정말 빨리 흐른다. 봄은 정말 짧았다. 기후가 심상치 않다. 날이 갈수록 걱정이 는다. 어제는 춥고 오늘은 덥고 내일은 비 오고 모레는 또 춥고. 그러다 보니 두꺼운 이불을 세팅했다가 다시 얇은 이불을 꺼냈다가, 에어컨을 틀었다가 바닥난방을 틀었다가. 숙박업자는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실감하며 매일을 살고 있다.


이러다 진짜 다 망하는 거 아닌가 회의감이 들다가도 가끔씩 만나는 따뜻하고 유쾌하고 근사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러니까 세상이 끝나가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존재들은 떠올리면서 한파와 폭염을 넘나드는 일상을 지탱한다.

이전 11화 어쩌다 독박사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