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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Nov 29. 2023

무 맛

내일부터 날씨가 영하로 떨어진다고 한다. 무를 캐서 밭에 묻어놓았으니 와서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남편의 친구 내외는(지금은 남편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친구지만) 초겨울  이맘때면  자신들이  직접 심어서 기른 무를 보내곤 한다.


최근에 허리가 아픈 나는  함께 가지 못하고 남편 혼자 친구의 무밭에 다녀왔다. 무밭이 있는 곳은 우리 집에서 40킬로쯤 떨어져 있고 왕복 80킬로면  이백리 길,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올해는 무 농사가 풍년이 들어 김장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무를 파서 엎어버린다고 했으나 소비자들은 여전히 비싼 값을 주고 무를 사 먹는다. 친구가 유기농으로 정성껏 키운 무는 우리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다.


농사를 지어 본 적도 없는 친구네에게 아는 이가 자신의 밭 한 고랑을 빌려 줄 테니 채소를 심어보지 않겠느냐고  했단다. 무심결에 허락을 하고  그 해부터 밭주인이 심는 대로 눈치껏 씨앗을 뿌리고 풀을 뽑고 물을 주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도 제법 먼 곳에 있는 밭에 물을  주기 위해 자동차로 물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언젠가 본 후로는 친구가 가져다주는 야채가 더욱 귀하게 여겨졌다.


이렇게나 귀한 무를 하나 둘... 스무 개나 가져왔다. 아마 밭두렁에 심은 무를 반절 뚝 떼어 보낸 듯하다.


무가 싱싱할 때 뭐든 만들어야 할 텐데 갑자기 허리 아픈 환자가 되었으니 혼자서 할 수가 없다. 여보 찬스를 쓸 수밖에...


"여보 아래 슈퍼에서 쪽파하고 생강 좀 사 오세요  오는 길에 채칼도 사다 주요"


"여보  옥상에서 소금 좀 가져다줘요  "

 

"여보 김치통 좀 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주세요"


내가 건강할 때는 나 혼자 쓱쓱 잘 해냈던 일들이 이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군말 없이 도와주는 남편이 고맙다. 오히려 무를 가지러 혼자서 운전하고 가면서 심심하더라고 했다. 비록 몸은 아프지만 서로 귀함의 존재를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다.


남편이 채칼로 썰어주는 무로 생채를 만들었다. 무가 달고 단단해서인지 기본양념만으로도 시원한 생채가 만들어졌다.


동치미도 담갔다. 그동안 나만 알고 있던 레시피가 남편과 함께 동치미를 담그며 자연스럽게 비밀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기야 동치미의 톡 쏘는 맛의 비결은 싱싱한 무가 좌우한다.


남은 무는 김장 때 쓰려고 다. 혼자서 하던 일을 둘이서 하면서 시간도 절약되고 처음과 달리 손 발이 척척 잘 맞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은 무를 번쩍 들어 뒷베란로 가져간다. 아마 편도 이제 살림의 맛을 알아가는 것 같다.


요즘에는 사철 과일이 풍부해서 무를 날 것으로 먹을 일이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겨울에 깎아먹는 무 맛이 참 좋았다.  겨울의  냉기를  시원한 맛으로 품고 있는 무는 은은한 단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저녁 간식거리로 깎아 놓은 무는 금세 동이 난다. 그때 먹어 본 맛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다.


삶아놓은 무청을  빨랫줄에 무심하게 턱턱 걸어놓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겨울밤에 먹었던 시원한  무맛이 떠오른다


잘 익어라 주문을 걸고 있는  동치미와 생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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