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약간의 소슬함을 느꼈습니다. 발치에 던져둔 차렵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며 참으로 오랜만에 늦잠을 자도 좋겠다는 느긋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새 켜 둔 선풍기를 끄려면 일어나야 하지만정작 내 잠을 깨운 건 모기장 사이를 헤집고 비추는햇빛이었습니다.
참 지독하게도 더운 날이었다는 걸 창 밖 풍경이 말해 줍니다. 노랗게 말라버린 오이잎이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 같군요 오늘은 저 잎을 따줘야겠습니다.
매일 아침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화단에 물 주기입니다.최근의 무더위에는 하루에 두세 번 물을 준 적도 있습니다.축 늘어진 꽃잎들의 얼굴 위에 샤워를 해 주면서 등줄기가 시원 해짐을 느꼈답니다. 하지만 사랑도 도가 지나치면 안 되나 봅니다. 고온다습에 약한 꽃의 뿌리가 물러지는 모습이 간간이 보입니다. 스스로 견뎌 낼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했다는 걸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언젠가 어떤 농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건 하늘이 반내가 반 가부시키 하는 거야"라고 하더군요. '가부시키'라는 일본어가 우리말로 '각자부담'이란 뜻으로 알고 있는데 투박한 농부의깊이 있는표현이퍽 감동스러웠답니다.
농사뿐 아니라 작은 꽃 한 송이를 키우는데도 각자의 몫이 있다는군요.내가해야 할 몫만 했더라면 이렇게 꽃잎이 짓무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나의 꽃들은 패잔병처럼 쓰러져 버렸습니다. 올봄에 바이올렛 꽃잎을 따서 잎꽂이를 하여 옹기종기 화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요놈들이 잘 자라서 어미처럼 보랏색 꽃을 피우면 지인들에게 하나씩 선물을 할 요량이었답니다. 그런데 햇빛이 내리쬐는 썬룸 안에서 꽃들은 누렇게 잎이 뜨고 말았군요 그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답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곳은 옥상테라스입니다. 차양막하나 없이 직사광선을 오롯이 쬐고 있는 그곳에 꽃들이 있습니다. 여름 한 낮, 옥상 테라스 위에 둔질항아리들은 다시 가마에서 구워지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지만 자신들이 품고 있는 꽃들은 무른 것 하나 없이 건실하였답니다. 나는 질그릇만도 못하였던가 봅니다.
풀 벌레 소리가 제법 소란스러워진 아침입니다.
오이의 마른 잎을 잘라 주려다 보니 줄기 끝에 아기 오이가 한 개매달려 있습니다. 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군요물기라곤 없을 것 같은 마른 줄기 끝에서 노란 꽃을 물고 있는 고추만큼 작은 오이, 새 생명에게 수분을 전해주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지... 이 아침에 나는 자연에서 위대한 모성애를 발견했답니다.
올여름은 무더위에 유난히 투정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세월은 흐르고 계절은 또 이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왠 카톡이 그리 자주 울릴까요?
"기쁜 구월입니다. 즐거운 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구월 맞이하세요"
단체카톡에서 구월의 인사가 오고 가는 중입니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이런 인사는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모두들 지루한 장마와 더위에서 헤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던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