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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Mar 03. 2021

어머니의 오칸 두줄 배기

젊음을 다 바친 그 집을 그리며


“내가 왜 이럴꼬 정신이 없어”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렇지”

“빨리 죽어야 자식들이 편할 텐데”

“이렇게 오래 살면 안 돼야”

“개고생 말띠”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어르신은 치매환자다.     

“개고생 말띠”라는 의미는 ‘경오년 말띠’라는 뜻이었다.


그 시대 대부분 어머니들은 까막눈이라 해도 부끄럽지 않을 때였다. 이 어르신은 한글은 물론이고 일본말도 잘하며 집 주소를 확실하게 다 기억한다. 오칸 두줄 배기 기와집이 몇 채며 손님 접대한 내력을 거침없이 읊으시는 걸 보면 부잣집 마나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동생 여섯은 다 잘 생겼는데”

“딸 하나를 목 딱 같이 낳아 놨다.”며 자신의 생김새까지 너무 잘 안다. 때로는 불만스러워 하지만 남성미가 더 잘 어울릴듯한 외모와 큰 체격만큼이나 성격도 화끈하고 시원시원하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는 훌륭하게 임무수행 잘하셨을 듯하다.     


일몰 증후군이 특히 심한 어르신은 저녁때가 다가오면 애들 밥 해줘야 되고 일하고 오는 사람 밥해 줘야 된다고 마음이 바쁘다. 집에 가기 위해 펄렁한 몸빼바지 양 가랑이 끝을 묶어 옷과 모든 생활 용품들을 탱탱하게 넣고 허리춤을 꽁꽁 야무지게도 묶었다. 양갈래로 어깨에 딱 걸치고는 집에 가야 된다고 출입문에서 닫힌 문을 두드리며 안절부절 불안해 못 산다.     


"여기가 어디냐"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묻고 또 묻는다.

"내가 왜 여기 있느냐고 할 일이 많은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집을 못 찾겠다."라고 그러실 때마다 안타깝다. 

젊을 때 열심히 살아온 만큼 노후에는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밤이고 낮이고 화장실만 가면 피부가 온전하지 않을 정도로 씻고 또 씻는 반복행동에 조용한 밤 수압 센 물소리는 여러 사람 수면을 방해한다. 머리를 굴리다 생각해낸 것이 어르신의 한국어 실력을 활용해 보는 것이다. '수도 고장입니다 조심하세요.'를 유성매직으로 A4 용지에 굵게 적었다. 수도꼭지가 보이지 않게 매달았다. 참 신기하게도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했는지 그냥 돌아섰다. 몇 번을 또다시 읽어도 새로운 내용으로 이해했으리라. 하룻밤만이라도 여러 사람이 조용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하루에도  번씩 오칸 두줄 배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보따리를 꽁꽁 묶어 챙겨 들고 나서지만 어르신이 돌아갈 283번지는 이미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고 없다는 소식이다. 어르신 평생의 추억과 손때 묻은  집은 회복이 불가능한 안주인의 치매악화로 이미 정리되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 안타깝.     

어르신의 생각 속에서 떠날 줄 모르는 “오칸 두줄 배기” 대궐 같은 그 집은 마음속의 궁전으로 간직해 주세요. 지금 이 순간 이 현실을 몸과 마음이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로 받아들여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 칸 두 줄 배기 기와집은 이제 그만 잊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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