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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23. 2017

스마트폰과 택배

카톡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평범한 여름날 아침이었다, 종일 집에서 혼자 있을 테니 서둘러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느긋했다. 여름 오전의 햇살이 내려앉기 시작한 마당은 눈이 부셨다. 모자를 쓰고 핸드폰을 바구니에 담아 마당으로 나갔다. 어슬렁거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잔디 사이로 삐죽 올라온 잡초들을 뽑았다. 맑은 날, 여름 마당은 불이 붙은 화살처럼 뜨겁고 날카로운 햇살에 순식간에 달구어진다. 하늘거리는 개양귀비와 수레국화의 꽃잎들을 희롱하다가 그늘에서 땀을 식혔다. 토마토와 가지 사이로 느리게 지나가는 바람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뭉텅 잘라먹었다,



  저녁 찬거리로 상추와 깻잎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내친김에 고추도 몇 개 따고 가지와 허리가 굽은 오이, 붉게 물든 토마토를 몇 개 땄더니 바구니가 묵직하다. 수돗가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양철통에 물을 받았다. 수량이 많은 지하수는 여름에 더 시원하다. 물장난 겸 마당에서  거둔 야채를 씻어서 들어가기로 했다. 바구니를 들어 양철통 위에서 뒤집었다. 차가운 물속으로 이파리와 열매들이 풍덩 빠지는 순간 이물감이 느껴졌다. 바구니 맨 밑바닥에 놓여있던 핸드폰도 차가운 물속으로 함께 빠져버렸다.



  조용하고 나른했던 고요가 갑자기 출렁거렸다. 허겁지겁 물에 빠진 핸드폰을 건져 앞치마로 물기를 닦았다. 핸드폰이 물에 잠겨있던 시간은 비록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버튼을 눌러도 화면이 밝아지지 않았다. 바싹 마르면 괜찮을까 싶어서 땡볕이 내리쬐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대로 핸드폰이 멈춰버린다면? 핸드폰 없이 살았던 시간들을 간혹 그리워했으니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이 없는 생활을 상상했다.



 

  핸드폰은 건강검진을 하라고, 날이 덥다고, 태풍이 온다고, 미세먼지와 황사를 주의하라고 알려준다. 자동차 정기점검 날짜, 전기세는 물론 이번 달 신용카드 결제금액까지 알려준다. 핸드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월초가 되면 각종 보험회사에서 새로운 한 달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자가 다투어서 도착한다. 생일이면 지인이나 가족들보다 카드회사나 단골 미용실, 백화점 등지에서 축하 인사가 더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오는 세상이다. 손 안의 작은 기계로부터 전해지는 세상의 부산함과 소란스러움에 지쳐갈 즈음이었다. 말과 글이 너무 많고 너무 날카로워서 자칫 허공에 떠다니는 글자들에 마음을 베일 것 같았다. 때가 되면 절로 알아서 챙길 것들을 여기저기서 미리 알려주고 거듭 일깨워주니 나처럼 신경이 무딘 사람까지 마음이 팔랑팔랑 부대껴서 이러다가 바스락하고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침대 옆에 알람 시계를 두고 메모는 종이에 직접 쓴다. 연락할 일이 생긴 지인들은 대답 없는 핸드폰을 포기하고 오래된 수첩을 뒤져 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내 이름을 찾을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대충 정하고 도착하는 대로 연락하던 만남의 방식은 보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로 약속의 무게를 되찾을 수도 있겠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온갖 알람들과 광고메일, 표정이 느껴지지 않는 단어와 문장과 진부한 이모티콘이 사라진 자리에 손편지와 오래된 전화기에서 울리는 따르릉 소리가 들어설지도 몰랐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고 마주한 모니터에서 메일을 확인하고 이웃들의 하루를 훔쳐보며 댓글을 읽고 짧은 일기와 답글을 쓰는 생활을 꿈꾸다가 퇴근길의 남편이 보내는 카톡,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이가 도착 십여 분전에 보내곤 하던 카톡을 떠올렸다(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십여분 정도 걸리지만 거의 오르막길인 데다가 가파른 언덕이 두 곳이나 있어서 무더운 여름이나 비나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운 날은 걸어서 오기에 무리라 마중 나가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었다). 불편한 얼굴로 집을 나선 이들이 하루의 중간쯤에 화해나 용서의 메시지를 보내는 날도 있고, 기숙사에서 지내는 아이가 난처함을 호소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 올 수도 있었다. 내 명의의 체크카드를 사용하는 아이가 집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체크카드 결제 문자가 날아오면 아! 이 녀석이 또 무얼 샀구나, 뭘 먹었네, 커피 좀 작작 마시지, 하곤 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나서부터는 체크카드 문자가 제일 반갑다. 아! 이 녀석이 살아있다, 점심도 먹었구나, 커피 마실 여유도 있나 보네. 그걸 놓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침묵에 빠진 핸드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여름 한낮은 조용하고 무심하기만 했다. 서비스센터의 수리기사에게 물에 빠진 핸드폰을 내밀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연락처를 묻는다. 집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넸다. 기사는 핸드폰 번호를 요구했다. 내게 연락이 가능한 이의 번호면 된단다. 아니 집 전화번호가 있는데 왜 남의 번호를 적느냐고 물었더니 집전화는 거의 받지 않기 때문이란다. 간단하게 수리가 되면 바로 찾을 수 있지만 문제가 심각해서 며칠 맡겨두는 경우를 예상해서 그런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수리기사의 그 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수긍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번호를 적어주었더니 한두 시간 후에 와보라고 했다.


   대기용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서 내게로 전달되도록 하는 것과 내 집의 전화로 내게 직접 연락하는 방법 중에 어떤 것이 나은가라는 질문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핸드폰은 말 그대로 손에 항상 들고 다니면서도 정작 집전화는 잘 안 받는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핸드폰을 수리센터에 맡겨놓은 사람이 집전화를 받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따져보다가 그만 피식 웃음이 났다. 핸드폰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핸드폰이 없이 살아보겠다던 좀 전의 내가 우스웠다. 엄연히 집전화가 있으면서도 남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니 영락없는 미아가 아닌가.  


   핸드폰은 살릴 수 있었다. 물기를 닦아내고 드라이어로 말렸다고 했다. 화면이 켜지자 멈춰있던 스마트폰에서 두두두두 몇 개의 카톡과 몇 개의 알람이 한 번에 쏟아진다. 마치 잠들어있던 세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살아있구나 싶은 존재감을 느꼈다. 세상이 조용하고 무심했던 것은 핸드폰의 침묵 때문이었다. 시간은 점심때를 훌쩍 넘어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몇 개의 알림을 받았는데 그중에 아이가 보낸 카톡 메시지도 있었다. 다행이었다. 땀을 식히고 흥분했던 마음도 가라앉히고 저녁 준비를 하려다가 문득 창밖의 수돗가에 눈길이 갔다. 대충 헹구어 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상추며 깻잎이 여름 햇볕에 늘어져 바삭 말라있는 게 보였다. 상추 이파리 아래 놓여있던 토마토가 뜨끈했다. 푸르스름하게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다시 살아난 핸드폰 화면에 메시지 하나가 떴다.


 ‘현관 앞에 택배 놓아두었습니다.’


  책을 제법 산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온라인 서점에서 책 고르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책은 서점에서 사는 걸 좋아한다. 책을 양팔 가득 안고 계산대로 가려는 찰나에 온라인 서점의 '10% 할인'을 기억해 내는 순간을 싫어하는 것 중의 으뜸으로 삼는다. 매일 가계부 숫자를 맞추느라 눈을 가늘게 떠야 하는 주부로서는 ‘10% 할인’의 무게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서 마음껏 책을 고른 다음 당장 읽고 싶은 것,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만 계산하고 나머지는 적어 두었다가(요즘은 그것도 귀찮아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만행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지른다) 집에 돌아와서 온라인 서점에 주문하는 것으로 타협을 한지 오래다. 결제 완료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핸드폰에 주문 알림, 결제 알림이 뜬다. 다음날 아침이면 택배회사에서 보낸 배송 알림을 확인할 수 있다.



   택배 상자에는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하는 책 외에도 강아지 사료, 한 달에 두 번씩 배달되는 계란, 철마다 산지에 주문하는 과일들과 식재료들, 엄마가 보내주는 쌀과 고춧가루, 참기름과 볶은 깨, 말린 누룽지와 김치가 들어있다. 옥수수나 단호박, 책 등을 택배 상자에서 꺼내는 대신 엄마와 마주 앉아 주섬주섬 보자기에 싸고 봉지에 담았으면 어땠을까. 서점에서 눈에 띄는 표지의 책들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겨가며 고른 책들이 담긴 종이가방을 건네받았다면 묵직한 만족감이 한결 더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쌀은 항아리에 붓고 단호박은 바구니에 담는다. 주문했던 책을 꺼내는 손에 외로움이 쓸쓸하게 들러붙는다.



  네모난 상자에 담긴 건 물건인데 마음은 왜 아플까 생각하는 건 엄마에게 받은 택배 상자를 열 때다. 얼마 전에 김장이 왔다. 김장용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담긴 배추김치를 꺼내어 김치통에 옮겨 담는다. 빛깔 고운 고춧가루 양념이 잔뜩 묻은 이파리를 한 장 뜯어내어 씹다가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진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라도 엄마의 김치를 먹을 때마다 엄마를 먹는 것 같은 이 기분을 떨쳐낼 도리는 없을 것이다. 택배 상자와 스마트폰에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나는 전화번호를 누르는 데 인색해지고 싶다. 대신 전철을 집어타고 친정에 가서 엄마가 보고 싶다. 제철인 과일과 야채가 풍성하게 쌓인 장터에서 내손으로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바구니에 담고 싶다. 자식처럼 키운 그것들을 기꺼이 내어주는 촌부와 눈웃음을 나누고 싶다. 카톡으로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안부를 전하는 대신 직접 친구를 만나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다. 나는 이러고 사는데 너는 어떻게 사느냐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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