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의 치료에는 환자 본인이 병식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병식이란 병에 대한 인식. 즉 내가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주치의와의 면담을 통해서 처방이 내려지기 때문에 스스로가 생각하는 현재 자신의 증상이 정신병 진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조울증의 경우 병식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정신질환에 대한 거부감과 조울증이라는 병명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 것 같다. 조울증 초기 환자는 그저 컨디션이 안 좋거나 일시적으로 예민해져서 기분의 업다운이 심해졌을 뿐 심각한 병이 아니라고 넘겨짚기 쉽다. 그래서 입원을 할 만큼 증상이 심각해졌을 때에야 겨우 병식을 갖고 치료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에도 두 번째 입원을 하고 나서야 완전한 병식이 생겼다. 처음 조울증임을 듣고 나서는 ‘나에게 왜?’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조울증 발병률은 2~3%고, 그중에서도 1형은 1% 내외라는데, (정확한 수치는 아닐 수 있다.) 100명 중에 1명 꼴로 걸리는 불운에 내가 당첨되었다니. 억울하고 원통했다.
아니 그전에 믿을 수가 없었다. ‘의사가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내 몸은 내가 아니까. 지금 내가 괜찮으면 괜찮은 거니까.’라고 생각했다. 자가진단을 통해 ‘나는 조울증이 아니다. 나는 정상이다.’라고 결론짓고 일상의 평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1년 만에 조울증이 재발하고 난 뒤에서야 내가 조울증임을 인정하고 내 병을 똑바로 마주 보게 되었다.
내가 힘들 때마다 읽는 시가 있는데, 바로 시인 류시화 씨가 번역한 샤를르 드 푸코의 ‘나는 배웠다’라는 시이다. 아래에 적은 것은 그중 한 구절이다.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삶은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내가 조울증에 걸릴 것이라는 것도 나를 포함해 우리 가족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매일매일 닥치는 새로운 어려움에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처하며 살아간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가 아닌,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