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계절과 음식이 길어 올린 기억과 마음
어느 계절을 좋아하냐는 질문이 어려웠다. 여러 가지 중 하나를 택하는 식의 질문 앞에서는 머뭇거리기 일쑤인 데다, 자신도 만족할 수 없는 흐리멍덩한 답을 상대에게 내어주고는 했다. 계절에 관해서는 아마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글쎄요. 사계절이 다 좋은데요.’, ‘음…. 굳이 따지자면 여름?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가?’, ‘(대~충 지금이 겨울이고, 마침 기분도 좋으니) 저 겨울 좋아하나 봐요!’ 참 뿌옇고 미적지근하다.
계절이 부리는 마법과 특혜를 누리며 크게 감동하는 나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이었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했지만, 정말이지 모든 계절이 좋고 그래서 모든 계절을 타는 편이다. 찝찝한 답안지와 함께 서너 해를 보내고서야 근사한 답을 찾았다. 진심으로 그러하면서 유연하기까지 한 답, 스스로 납득이 되면서 만족감을 주는 답이다.
“간절기를 가장 좋아해요. 계절의 흐름이 느껴지는 그 사이가 좋아요.”
계절 앞에서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게슴츠레 눈을 뜨며 ‘아, 정말 좋다.’라고 말하던 때는 모두 계절과 계절 사이였다. 계절이 변화하는 낌새를 느낄 때면 어김없이 계절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권태로 가득한 일상 속 간절기는 오감으로 변화를 맛보게 한다. 반대로 변화무쌍하여 위태로운 삶에서도 찰나의 아름다운 풍경에 머물 여유를 주는 간절기, 이 시기를 나는 사랑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밭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굵은 마음을 캐내었다. 좋아하는 영역은 넓지만, 그중에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이해했다. 이제는 누군가 어느 계절이 좋냐고 물어봐 주면 좋겠다.
‘어느 계절?’ 급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 있다. “무슨 반찬을 가장 좋아해?” ‘어…?’ 말문이 막히면서 무수한 반찬의 형상과 맛이 둥둥 떠다닌다. 그러나 이제는 버퍼링 앞에서 침착하다.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뿐이고, 이제 생각해 보면 된다. ‘진짜 뭘 좋아하지?’, ‘반찬? 딱 하나의 반찬이 아니어도 된다면…?’ 약간의 청개구리 성격과 창의성을 보태 맛의 기억 속으로 뛰어든다.
역시 하나를 고르는 건 곤란하다. 조화로운 반찬 군집*이 좋다. 우리네 밥상을 떠올리면 몇 첩 반상이라고 하여, 기본이 되는 밥과 국 외에 김치, 생채, 구이, 조림, 젓갈, 쌈 등의 반찬으로 한 상을 구성한다.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12첩까지 있고, 반찬의 종류는 식재료를 바꿔가며 다양하게 배합할 수 있다. 이 많은 반찬 중 무엇을 좋아하냐는 질문은 계절의 사지선다 문제와는 비할 게 아니지만, 관점을 바꾸면 오히려 쉽다. 한 상에 차려지기 때문에 조화가 중요하다. 한 상에 올라온 반찬의 조화가 아름답게 어우러질 때, ‘와, 진~짜 맛있다.’라는 음식으로서 받는 최고의 찬사와 함께, 초벌 설거지한 듯한 말끔한 접시만 남게 되는 것이다.
반찬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군침이 싹 돈다. 기억된 미각과 후각, 약간의 허기는 느티나무 식당을 떠올리게 한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두부찌개 등 찌개를 메인으로 하는 한식당인데, 주요리뿐 아니라 반찬을 기가 막히게 잘하며 7첩 반상이 기본이다. 홍천 북방면에 위치한 이층집으로 위층은 사장님 집이고 아래층이 식당이다. 근방에 새로운 보금자리로 집을 짓는 중에 오가다 발견한 귀한 로컬 맛집인데, 이름에 걸맞게 앞마당에는 옥상을 훤히 내려다볼 만큼 키가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집보다 큰 나무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나는 집보다 작고, 나무보다는 더 작다. 원근감을 느끼며 나, 집, 나무, 나무를 넘어선 하늘을 보게 되는 구도가 평화롭다. 그래서인지 큰 나무에 감싸 안긴 집을 보면 첫인상이 좋다. 게다가 사장님이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며 몇 년이고 한결같이 요리를 해왔을 터인데, 그래서 느티나무 식당은 음식을 먹기도 전에 맛있었고, 실제로 맛보았을 때는 열광하며 단골이 되었다.
아기자기한 야생화가 심어진 3평 남짓의 작은 정원을 지나 미닫이문을 열면 모기장을 뚫고 찌갯집 특유의 진한 양념 냄새가 코에 스민다. 찌갯집에서 밥 먹고 나오면 옷에 배는 그 향, 맡기만 할 때는 쿰쿰하지만 먹을 때는 얼마나 깊고 풍부한 맛을 느끼게 할지 짧은 경험 덕에 미리 안다. 또 군침이 돈다.
느티나무 식당은 여느 식당처럼 물과 찬을 먼저 준비해 주는데, 모양새가 무척 정갈하고 싱그러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7~8개의 반찬이 다 놓일 때까지 가만히 바라본다. 실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반찬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와!’, ‘헐!’, ‘대박', ‘어떡해~’를 돌려가며 외치고는 했다. 귀한 음식 앞에서 방정맞다는 자각과 마주 앉은 상대의 음미를 위한 배려를 배운 이후로는 속으로 감탄한다.
반찬이 다 차려진 다음에는 반찬 군집의 울타리, 즉 접시들의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가지런한 반찬을 더 가지런히 정돈한다. 촉새같이 젓가락이 뛰놀까 염려하여 스스로를 다독이는 의식이다. 이런 나를 가장 가까이서 살펴온 짝은 인간의 삼대 욕구인 식욕, 성욕, 수면욕 중에 단연 식욕이 으뜸인 사람이라고 놀린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이성의 자리를 본능이 꿰차지만, 반찬을 집어 먹는 순서는 꽤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하다.
그러나 계획은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다. 시작만 하면 그다음은 반찬 군집의 팀워크가 유기적으로 연결에 연결을 거듭하며 젓가락질을 이어가도록 이끈다. 파릇파릇 고소한 시금치, 매콤 짭짤 청양고추 장아찌, 부드럽고 담백한 계란말이, 거기에 산뜻한 매운맛을 곁들여줄 겉절이, 다시 담백하고 고소한 생선구이, 달콤 매콤 식감까지 재밌는 무말랭이, 미끈하고 고소한 미역 줄기, 오독오독 오이지~ 계주하듯 배턴을 정확하게 다음 주자에게 전달한다. 물론 밥과 함께. 리듬이 끊기지 않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이란! 이들의 리듬에는 계획이 필요 없다. 지금을 맛본 뒤에야 다음 어디로 갈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큰 그림은 있지만, 세세한 순서는 끌림과 조화를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흐른다.
내가 내린 선택과 선택 이후 다가올 의지와는 상관없는 끌림, 그 연결이 기대된다. 삶 속에 우연의 틈을 비워두자는 건 짝의 말이었는데, 사는 만큼 닮아가는지 그 여유가 좋다. 계절의 사이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려나. 그나저나, 찌개는 아직 안 나왔다. 주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반찬만으로 밥 반 공기를 뚝딱하게 되는 곳이 느티나무 식당이다. 또 두 공기인가.
나에겐 맛있고 안 맛있고를 결정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기준은 ‘엄마 밥'이다. 엄마가 차려주신 정성스러운 밥상의 힘으로 지금껏 자라왔고 그 기억으로 자랄 것이기 때문에, 따져보면 느티나무 식당도 ‘엄마가 해준 딱 바로 그 맛이야!’의 논리로 맛집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년 시절 추억을 가득 메운 고향 집은 느티나무 식당처럼 이층집이다. 일 층은 엄마의 요리 냄새로 풍성한 주방이, 집 앞마당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잎사귀와 선명한 주황색 열매를 자랑하는 치자나무가 소담하게 서있다. 마당이 일 층보다 계단 열댓 칸은 낮게 위치한 구조라서, 2m 가까운 키의 치자나무는 엄마보다 작아 보인다. 그래서 집과 엄마가 나무를 품고 있는 모습이 느티나무 식당과는 다른 점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반찬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어느 반찬?’ 질문의 답으로 부동의 1위였던 ‘반찬 군집’을 가뿐히 흔들며 이거 하나면 밥 한 공기 거뜬하다며 느낌표를 던진다. 이걸 반찬이라고 불러도 적절할지 의문이 들지만 엄마가 쪄주신 ‘호박잎쌈’, 그 맛이 단연 최고다. 주로 집된장이라 불리는 재래식 된장을 무, 애호박, 청양고추, 표고버섯 등을 넣어 자작하게 끓인 된장찌개와 먹었을 때 금상첨화다. 된장찌개가 없을 때는 쌈장이라도 괜찮다.
고향에 내려갈 때면 뭐 먹고 싶냐고 묻는 엄마 질문에 “반찬 따로 필요 없고, 호박잎에 된장찌개면 됐어! 엄마~”라고 답하던 나, 배가 불렀다. 엄마의 요리는 이웃들의 요청으로 판매까지 했을 만큼 맛이 좋다. 다른 음식 다 제치고 호박잎쌈이라니, 배가 불러도 많이 불렀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추억과 추억에 담긴 정서는 맛의 격을 비교 불가한 수준으로 높이나 보다. 호박잎쌈은 제 물성처럼 푸근하고 편안하고 평화롭다. 더운 여름날, 호박잎을 쪄먹을 때만큼은 엄마는 덜 바빴고 더 맛있게, 나와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 맛있고 배부르고 속 편했다.
맛을 논하는데, 코끝은 왜 시큰한지 모르겠다. 결혼 이후로 40년 내리 밥 짓는 삶을 택한 엄마의 손은 두툼하고 마디마디가 울퉁불퉁 거칠다. 엄마는 자식들 밥 차려주는 일이 가장 큰 행복이라지만, 손수 지은 밥 한번 대접한 적 없는 딸내미가 가만히 엄마 밥을 얻어먹는 일은 쌓일수록 미안해진다. 밥이 아니어도 엄마랑 하늘의 뭉게구름 보며 웃을 때, 가만가만 각자의 소소한 기쁨을 떠들 때, 강물에 납작 돌로 물수제비 뜰 때 역시 배부르게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자주 그러지 못해 미안한 것이다.
밥 짓는 일이 관성처럼 몸에 들러붙어 언제고 주방 앞에 서있는 엄마. 이제는 엄마가 덜 고생하고 더 여유롭게 나와 시간을 보내기를 소망한다. 그러고 보니 여름은 호박잎의 계절이네. 여름이면 꼭 호박잎쌈이 먹고 싶어 군침이 돌지만, 그런 여름이 좋지만, 우리 사이에도 이쯤 간절기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으면 좋겠다.
아경 "뜨겁던 여름이 때늦게 저무는 지금, 선선한 바람이 어느 때보다도 더 반갑습니다. 그래도 여름 내내 맛있게 쪄먹던 호박잎을 다음 해에 만날 생각을 하니 다소 아쉽기도 하네요. 여름의 맛을 기억하고자 집을 짓느라 오가며 만난 로컬맛집과 호박잎을 쪄주시던 엄마의 이야기를 글에 담아보았습니다. 독자님들은 어떤 계절,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그리고 그 안에 어떤 기억이 깃들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