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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Nov 15. 2023

내가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다

고맙습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다."



티브이를 보는데 어떤 집 95세 할머니가 며느리를 보고 말했다. 그 말들 듣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슴속 깊이 감춰둔 말. 꼭꼭 감춰둬 잊어버린 말. 언제고 해야지 했던 말. 당신을 볼 때 가끔 가슴이 답답한데 무얼 말해야 할지 그저 미루고만 있던 말. 나중에 해야지. 나중에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나중에... 



중년의 내가 아내와 딸에게 말한다.


"내가 너무 무능해서 미안하다."


여기서 미안하다는 말은 지극히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지만 쉽사리 내뱉지 못하는 말이다. 내뱉지 못하고 입에서 웅얼거리는 말이다. 웅얼거리며 언제라도 하고 싶은 말이다. 그러나 끝내 말하지 못하는 말이다. 말하지 못하고 외려 화만 낸다. 화내면서 후회한다. 결국 미안해서 화낸다. 화내고 난 뒤 더더욱 미안해한다. 무능한 데다 성질까지 부렸구나. 성질부리며 아내와 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중에는 쌓이고 쌓여 멍자국에 피멍이 겹치고 겹쳐 맨살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곱으로 미안하여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는다. 이상한 현실이다. 멍자국을 볼수록 화낸다. 아프면 아플수록 화내고 그러고는 또 미룬다. 외면해 버린다. 고개 돌린다. 모른척한다. 이게 살아가는 거니까. 삶이라는 말에서 그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바라면서 이해해 주리라 짐작한다. 그러고는 안심한다. 정말이지 내가 너무 무능해서 미안하다. 



"너무 못나서 미안합니다."


중년의 내가 부모님께 고한다. 


다른 집 자식들처럼 기쁘게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따뜻하게 감싸드리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자주 살갑게 대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편안하게 곁을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당신이 홀로 늙어가게 하여 죄송합니다. 늙어가는 것도 감당키 어려울진대 아직도 불안하게 하여 미안합니다. 여태까지 자식들 건사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한 점 죄송합니다. 당신을 아프게 하여 미안합니다. 좋은 자식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껴주지 못해 미안하다."


중년의 내가 거울 앞 나에게 속삭인다. 


이게 나? 내 얼굴이구나? 네가 이토록 이렇게까지 버티며 살아가는데 좀 더 보듬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몇 번이고 좌절하며 살던 너를 좀 더 따뜻이 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 한 몸 지탱하느라 힘들겠구나. 잡티가 번지고 나잇살이 차오른다. 눈밑이 처지고 온몸이 차갑게 경직된다. 그러한데 아직도 젊은 줄 알고 외면하며 앞만 보고 있었구나. 돌아보지 않았구나. 돌봐주지 않았구나. 내 욕심만 채우며 당장 달콤한 것들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살면서 내 주위 소중한 이들에게 미안해진다. 문득 깨닫는다. 잘 돌봐주지도 못하는데 잘도 버티며 나를 따라온다. 바보 같은... 차라리 목청껏 소리라도 쳐다오. 나 좀 돌보라고. 나 너무 아프다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힘들어 죽겠다고. 언제까지 따라가야 하느냐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어이~ 착각하지 마. 네가 당장에 힘들어 보여서 기다려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당장만 모면하면 되는 줄 알았다. 당장이 연속되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삼십 년이다. 사람 건사하게 만들어준지 언젠데 아직 그 모양이야.



미안합니다. 미안한 걸 알면서 지금껏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 틈틈이 틈을 보아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지만 그러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까 봐 차마 말하지 못하고 미루기만 한 세월입니다. 어쩌면 먼 훗날 그날이 와도 크게 바뀌는 건 없겠지요. 그래도 그렇지만 지금 당장 이 말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저를 만들어주시고 저를 이끌어주시고 저를 만나주시고 저의 가족이 되어주시고 언제나 저와 같이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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