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글을 한 편 완성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뿌듯함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또 다시 새로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합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새하얀 화면’을 마주할 때입니다. 일명 백지 공포증. 글감이 많을 땐 몰라도, 그렇지 않을 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게 백지에서 다시 시작할 때면, 태어나 글을 처음 쓰는 사람처럼 손이 갈팡질팡합니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수시로 메모합니다. 이는 백지 공포증을 현저히 줄여줍니다. 적어도 '쓸거리'가 메모장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죠. 글감에는 특이한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글을 쓰고자 작정하고 노트북 앞에 앉으면 쓸거리가 도무지 생각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샤워를 하거나 운동을 할 때 퍼뜩 떠오르곤 합니다. 그럴 때, '좋은 생각이군! 나중에 글로 써야지.'하고 넘어간다면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아마 기억이 얼마나 빨리 휘발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99% 확률로 5분 안에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지금은 글감이 머릿속을 스치면, 즉시 메모장 앱에 기록합니다.
최근엔 머리 감는 중에 좋은 글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눈도 잘 뜨지 못한 상태로, 재빨리 손에 묻은 샴푸만 헹궈내고 휴대폰을 집어 메모했습니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 중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유레카를 외친 것처럼 말이죠. 유난스러워 보일지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갈 땐 분명 잊을 게 뻔하거든요.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평소처럼 스킨로션이나 바를 것이 분명합니다. 대여섯 번의 비슷한 경험을 통해, 제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의 여신 뮤즈가 영감을 주었다면, 그 영감을 글로 풀어내는 것은 순전히 쓰는 사람의 몫입니다. 메모장에 저장된 글감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빠르게 기록한 거라 두서도 없고 맞춤법도 엉망입니다. 한마디로 벌거숭이 상태라 그대로는 쓸 수는 없습니다. 옷을 잘 입혀 무대에 올리는 것이 바로 쓰는 이의 역할입니다. 다행인 점은 글감만 있다면 쓰는 건 오히려 쉽습니다.
지금 쓰는 이 글이 바로 머리를 감다 떠오른 생각입니다. 비록 처음 생각했던 내용과 달라지기는 했으나, 그 또한 글쓰기의 묘미겠지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글이 아니라면, 항상 결론을 정해놓고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글을 쓰면서도 그 글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할 때, 나는 작가이자 첫 번째 독자가 되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