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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멈가 Aug 20. 2023

영감은 뮤즈가, 쓰는 건 사람이 한다


마음에 드는 글을 한 편 완성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문제는 그 뿌듯함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시 새로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새하얀 화면’을 마주할 때이다. 일명 백지 공포증. 글감이 충만하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백지에서 다시 시작할 때면, 태어나 글을 처음 쓰는 사람처럼 손이 갈팡질팡한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수시로 메모한다. 이는 백지 공포증을 현저히 줄여준다. 적어도 ‘쓸거리’가 메모장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글감에는 특이한 법칙이 하나 있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앞에 앉아 두뇌를 풀가동할 땐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샤워를 하거나 운동을 할 때 퍼뜩 떠오르곤 한다. 그럴 때, ‘좋은 생각이군! 나중에 글로 써야지‘하고 넘어간다면 낭패를 보기 쉽다. 아마 기억이 얼마나 빨리 휘발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99% 확률로 5분 안에 잊어버린다. 그래서 지금은 글감이 머릿속을 스치면, 즉시 메모장 앱에 기록한다.



최근 머리 감는 중에 좋은 글감이 떠올랐다. 나는 눈도 잘 뜨지 못한 상태로, 재빨리 손에 묻은 샴푸만 헹궈내고 휴대폰을 집어 메모했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 중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유레카를 외친 것처럼. 유난스러워 보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샤워를 마치고 나갈 땐 분명 잊을 것이다.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평소처럼 스킨로션이나 바를 것이 분명하다. 대여섯 번의 비슷한 경험을 통해, 내 기억력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예술의 여신 뮤즈가 영감을 주었다면, 그 영감을 글로 풀어내는 것은 순전히 쓰는 사람의 몫이다. 메모장에 저장된 글감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빠르게 기록한 거라 두서도 없고 맞춤법도 엉망이다. 한마디로 벌거숭이 상태라 그대로는 쓸 수는 없다. 옷을 잘 입혀 무대에 올리는 것이 바로 쓰는 이의 역할이다. 다행인 점은 글감만 있다면 이 과정은 오히려 쉽다.



지금 쓰는 이 글이 바로 머리를 감다 떠오른 생각이었다. 비록 처음 생각했던 내용과 달라지기는 했으나, 그 또한 글쓰기의 묘미이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글이 아니라면, 항상 결론을 정해놓고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글을 쓰면서도 그 글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할 때, 나는 작가이자 첫 번째 독자가 되는 셈이다.


아폴로와 아홉 명의 뮤즈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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