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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지나 봄은 필경 오느니

by 무량화 Jan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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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동의 한겨울. 적정온도로 난방이 되는 실내이기도 하지만 남향받이 창가의 키 큰 벤저민 아래 괭이밥이 소복하다. 클로버보다도 작은 잎새에 자잘한 노랑꽃이 귀여운 괭이밥. 유년의 여름, 손톱에 고운 물을 들이려면 봉숭아 꽃잎과 함께 필히 마련해 둬야 하는 괭이밥이었다. 신맛이 들어있는 식물임을 용케 들 알아보고 백반 대신 쓴 괭이밥이다.



반가움에 한발 가까이 다가앉으니 그 기척에도 호르르 이파리들이 떨린다. 양지쪽을 향해 얼굴 치켜든 채로 볕바라기를 하는 괭이밥은 줄기마다 하트 형태의 잎이 석 장씩 똑 고르다. 볼그레한 혈색까지 한결같이 닮은 듯 하나 유심히 살펴보면 크기도 모양새도 제각각 약간씩은 다르다.



화분 안에 제법 영역을 넓히고 소담한 무더기를 이루었지만 단 한 포기인 괭이밥이다. 같은 한 뿌리에서 자란 잎 잎임에도 자연물에는 이처럼 똑같은 판박이란 존재치 않는다. 동일 재료로 같은 조형 틀에서 정밀하게 찍어낸 물건이라면 수 만개라도 성분이며 모형이 한 치 오차 없이 정확하게 마련. 그러나 DNA 구조가 같은 일란성쌍둥이마저 어디가 달라도 다른 구석이 있다.



얼마 전 공적인 서류를 작성하며 지문 찍을 일이 있었다. 예전처럼 인주나 잉크 묻히는 방식이 아니라서 채취 과정은 번거롭지 않고 간단했다. 도우미의 지시대로 알코올에 적신 거즈로 손끝을 슬쩍 문지른 다음 기계에 손가락 끝마디를 대고 지그시 누르면서 둥글리니 자동으로 컴퓨터 모니터에 화면이 떴다. 부드러운 곡선의 행진, 밀려오는 파도 같은 물결 형태에 소용돌이 모양이며 얌전한 동그라미에다가 활 모형도 있고 말발굽 모양새도 있다. 평소 드러나지 않던 미세한 손끝 지문이 확대되어 선명하고도 확연하게 도드라지며 또 하나의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펼쳐냈다.



순간 <인간의 대지> 속 사막 풍경이 떠올랐다. 끝 모르게 물결치며 이랑 무늬를 이룬 沙丘를 한사코 기어오르던 주인공. 이어서 겹겹이 누운 산간 다랭이 논의 먼 전경이 스쳐 지나고 등고선 표시 잘 된 지형도가 그려졌다. 그 무엇보다 지문은 고목 그루터기에 남겨진 나이테, 그래서 구례 화엄사 대웅전 문설주에 앙상히 드러나던 木理가 생각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고유의 코드로 갖게 되는 지문. 지문은 어떤 환경에서도 바뀌지 않을뿐더러 지문이 깎이거나 지워진다 해도 다시금 원래 상태대로 재생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지구상에 수십억 인구가 있으나 똑같은 무늬의 지문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신체적 서명이 되기도 하는 지문인지라 개인 식별과 신원 확인을 위한 수단으로 지문은 이용된다. 탐정소설이나 범죄수사에 으레 등장하는 지문 감식.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도 행정사무의 효율화와 치안유지를 위해 상정된 열 손가락 지문 채취법에 반발, 인권침해라고 헌재에 소송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공익이 우선이라며 지문 채취는 합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들었다.



 땀샘의 땀구멍 부분이 주위보다 돋아 올라 서로 연결된 융선이 밭고랑 모양을 이루어 이랑 사이에 뚜렷한 공간을 만들며 생긴 것이 지문. 1823년 체코의 생리학자 푸르기네에 의해 지문의 형태가 아홉 가지로 나뉘어 최초로 연구논문에 발표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지문이다. 이후 1900년 영국에서 지문 분류체계를 세워 구체적으로 활용하기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지문은 ‘나’라는 존재를 대변하고 증거하고 확인시켜 주는 나만의 독자적인 무늬로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고유의 무늬. 그 점에 착안, 근자의 첨단 시스템들은 지문 검색기며 지문 인식기를 개발하여 집 열쇠를 대신하는 보안장치로 삼기도 하고 출퇴근 카드로 대체시켜 생활에 편리를 더하고 있다.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하거나 닮은 꼴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만들지 않은 창조주의 섭리. 그렇게 각각을 분명하게 구별 지어 놓은 데에는 뜻이 있을 터. 태초의 카오스 그 혼돈을 더 이상 바라지 않음이실까. 소명의식을 갖고 몫몫의 삶을 제대로 살라는 의미일까. 얼핏 보면 괭이밥 잎잎이 그게 그거, 다 똑같은 듯싶어도 자세히 살피면 저마다 개성이 다르듯 손끝 지문 또한 이리도 놀라운 소우주를 간직하고 있음이니.



새삼 손가락을 꼼꼼스레 들여다본다. 그동안 내내 딴전 피우며 무심히 다루고 소홀히 보아온 나의 열 손가락이 새삼 귀하고 대단하다 여겨진다. 손의 공로에 대해서는 진작에 감사한 바 있지만 손가락, 그중에도 손끝에 관심 가져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아주 오래전 봉숭아 물로 치장시켜 본 외에는 그 흔한 매니큐어로 호사한 적도 별로 없는 나의 손가락. 어쩌다 생각나면 한 번씩 반지를 끼워보는 정도였는데.



그날의 지문 화상이 다시금 눈앞에 어른거린다. 희미한 알코올 내음에 겹쳐지는 영상, 등고선 완만한 정겨운 한국의 지형도가 바짝 다가선다. 그 땅을 내가 천천히 걷는다. 까치 우짖는 동구 지나니 이윽고 산간 층층논 구부러진 논두렁이 보인다. 그 너머로 수백 세 나이테 두른 화엄사 절간 풍경소리가 솔바람에 실린다. 올려다본 동천은 그지없이 청청하다.



겨울 깊어질수록 봄은 정녕 머잖았다.


2002 미주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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