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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원추리야 구상나무야

2009

by 무량화


아, 원추리꽃! 하며 반가움에 탄성을 보냈던 게 수년 전 일이다. 근데 너 왜 여기서 사니? 호랑나비처럼 화려한 나리꽃도 마찬가지다. 오직 한국에서만 자라는 순 토종인 줄 알았는데 지조 없이 미국 땅에서 이리도 무성하게 흐드러지다니. 세계화시대에 살면서도 왠지 변절자 같아 앙큼스럽고 괘씸하고 그랬더랬는데... 어린순 데쳐서 나물로 무쳐먹기도 한 원추리다. 개망초 무리 진 초여름 산비알에 주황빛 조촐하던 그 꽃. 노고단에도 백령도에도 오색폭포 주변에서도, 한국 산야 어디서나 만나던 너 원추리꽃.


데이 릴리
토종 나리꽃


요즘 어딜 가나 흔하게 눈에 띄는 게 원추리꽃을 닮은 데이 릴리다. 한창 제철을 맞아 풍성히도 피어 있다. 뉴저지의 도로변, 공원, 상가 정원 한 모퉁이에도 빠지지 않는다. 팬지, 피튜니아, 데이지처럼 미국가정 꽃밭에 당연히 끼는 꽃이 되어버린 원추리꽃. 생장력과 번식력 좋고 성정이 까탈스럽지 않은 식물이라서인지 원예사들의 괴임 받으며 해마다 방석자리만큼씩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선진 세상에 실려와서 인위적 방법으로 품종 개량된 지금은 이름마저 무슨 릴리가 됐지만, 그렇다고 널 못 알아볼 리 있으랴. 개량종이라 우리의 산야에서 보던 소박한 모습 하고는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원추리다.



실제로 농업 관련 유전자원인 종자의 중요성을 인식한 미국은 일찌감치부터 식물학자들을 동원, 세계 각처에서 다양한 자원을 모아들였다. 몇 년 전엔 미국이 수집해 갔던 우리의 토종 씨앗 일부가 고향 땅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특히 한국 내에서는 멸종돼 찾아볼 수 없는 농작물 씨앗 다수가 그때 반환되었다. 그간 국토개발 과정에서 자생지가 파괴되면서 멸종된 식물도 있고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개량 품종만 골라 재배하다가 사라져 버린 토종 종자들이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걸 남의 나라가 지켜준 이 아이러니는 또 뭔가. 하여간 나라 힘이 약하면 신라 불상, 고려청자도 빼앗기고 토종 씨앗도 빼앗기고 고유문자와 얼마저도 빼앗겨버리고 만다. 종당엔 주권까지도 깡그리 잃을 수 있다.



한국에서 살 때 야생화 모임에 갔다가 어떤 식물학 교수로부터 설마?? 하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그 외 알게 모르게 유럽 등 국외로 유출된 한국 토종식물 종자들이 많다며 그는 열을 냈다. 한국의 수수꽃다리 종자를 미 군정청에 다니던 사람이 미국으로 가져가 미국 땅에 맞게 품종개량을 하여 상품화시킨 것이 미스김 라일락. 한국이 원산지인 나리와 원추리 역시 종자를 가져가 보다 화려하고 강한 품종의 꽃으로 변신시켜 데이 릴리라 부른다. 미국에 온 첫해 봄, 벚꽃이며 목련은 그렇다 쳐도 흐드러진 개나리를 보자 좀 놀라웠다 그보다 더 놀랍던 것은 화원마다 즐비한 매발톱꽃이었다. 우리의 야생초로만 알고 있던 터라 일말의 배신감마저 들었는데 미국 이름은 야사시한 섹시걸이었다. 허나 어쩌랴. 정신대 여인처럼 꽃의 절개조차 지켜줄 수 없는 못난 나라 영토에서 생겨난 게 죄라면 죄.




구상나무는 또 어떤가. 얼마 전 중앙일보 미주판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다. '소나무과 전나무속에 속하는 상록 침엽수인 구상나무 (Abies koreana Wilson)는 전 세계에서도 오직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고유종이자 희귀종이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인해 한라산. 지리산 등지에서 자생하는 구상나무가 집단으로 말라죽고 있다는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구상나무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위기 속의 구상나무가 뜻밖에도 태평양 건너편 조용한 수도원에서 생명을 키워 가고 있다는 보도 역시 놀라웠다. 더욱이 구상나무 5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는 세인트폴 뉴튼 수도원은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 6.25 전쟁 때 '흥남 철수'의 주역으로 꼽히는 레너드 라루 선장이 묻힌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는 전쟁 후 여기서 평생을 수도사로 살다가 2001년 10월 87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이 수도원에서는 한인 수도사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재정난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던 수도원을 한국의 왜관수도원이 운영을 맡아 되살렸기 때문이다.



수도원 측은 지난 2009년 구상나무 묘목을 구입해 심었다. 나무를 관리하는 오드리 이 신부는 "새롭게 심을 품종을 조사하던 중 구상나무의 영어 명칭인 'Korean Fir / Abies koreana Wilson (한국 전나무)'를 보고 심어서 잘 가봐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 수도원은 크리스마스트리를 판매하는 곳으로도 이름 높다. 수도원이 재정 마련을 위해 심은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는 구상나무를 포함해 4만여 그루다. 바다 같이 너른 평원에 열을 지어 청청하게 자라고 있던 구상나무. 그외 트리 용도에 따라 키가 큰 가문비나무와 전나무도 자라고 있다.



병충해에 강하고 참한 솔방울에다 향이 좋아 실내용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는 구상나무다. 위의 뉴스 기사를 보며 트리 판매를 도우러 갔던 몇 해 전 겨울의 뉴튼수도원이 떠올랐다.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무능한 나라 자체가 씁쓰레 부끄러웠다. 이 무렵 지리산에 가면 능선에 좌악 깔렸던 원추리꽃 그리고 아우라지 강가에 점점이 피었던 나리꽃... 눈에 밟힌다. 덕유산 정상부에 군락 이룬 구상나무 하얀 고사목 풍경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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