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두터운 천국의 문

효명사

by 무량화


입석동 선덕사 지나 한라산 둘레길 어름에 효명사 입구가 나있다.

지난해 아들이 왔을 때 차로 한번 들러는 봤다.

선덕사 뒤편으로 넘어가는 길이 나있는데 막상 큰절에 몇 번 갔으면서도 망설거리다 만 터다.

산길이 너무 호젓해 엄두가 안 나서 못 가봤노라 했더니 아들이 선뜻 앞장서줬다.

거기 있는 천국의 문이 내동 궁금하긴 했다.

사진으로만 접했던 천국의 문은 신비로운 호칭과는 달리 침침한 숲그늘에 싸여 이끼 덕지덕지 붙은 채라 지옥문처럼 괴이쩍고 음산하게 보였다.

오르내리는 층계돌도 푸른 이끼 휘덮인 채라 미끄러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긴 천국의 문보다 내 호기심이 확 꽂힌 곳은 다른 데 있었다.

그날 방문 시 사진작가 서넛이 고목 높은 줄기에서 더부살이하는 어떤 식물에 앵글을 맞추고 있길래 유심히 살폈더니 어릴 때 아버지가 키우던 풍란 비슷했다.

연보라 꽃을 단 그 식물이 1급 멸종위기 풍란인지 확인은 못했지만.

콩짜개란에 싸여 무더기 무더기 고목에 붙어서 살아가던 자생란 이름이 혹시 효명사에 있다는 일엽난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높다란 나무 중턱에 붙어사는 식물이라 포자가 붙어있나 잎 뒷면을 살펴볼 계제가 아니라서 여전히 의문으로 남겨졌다.

일엽난이라면 포자식물이라 꽃이 필 턱은 없는데?

작년에 틀림없이 두 눈으로 연보라 꽃을 보긴 보았으니.

암튼 그때 효명사를 다녀온 뒤로 길눈이 트여, 긴긴 장마철 지난 뒤 또 갔다가, 겁나게 불은 계곡 물소리에 혼비백산, 즉시 퇴각해 버렸다.



청량한 새소리 데불고 걷는 산길은 쾌적했다.

신록이 욱욱한 녹음으로 짙어가는 숲의 푸른 공기 심호흡하며 십여분 남짓 걷자 효명사에 이르렀다.

사실 효명사는 입구 쪽 정원의 불상 외에는 절다운 분위기를 거의 읽을 수 없다.

기와지붕을 인 전각도 없고 풍경소리조차 안 들리는 절이다.

요즘 절마다 물색없이 마구잡이로 세운 석 조각품도 한 찾기 어렵다.

조촐한 석탑 대신 이끼 푸른 돌탑만 오가는 길손이 바위 위에 쌓았을 뿐이다.

이곳 경내에서 가장 각별하게 관심이 가닿는 곳은 역시 노거수다.

거기 착생해 살아가는 식물의 안위가 염려되기도 해서이다.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이 혼재하는 제주 곶자왈 같은 산야나 고산지대에는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보호 대상인 식물이 제법 숱하다.

희귀성에 더해 선비 같은 기품으로 관상가치가 높아, 대부분의 난초과 식물들은 무분별한 남획에다 도채(몰래 캐 가는) 바람에 멸종지경에 이르게 됐다는데.

깊은 숲이라는 청정한 자연생태계를 떠나면 이런 식물들은 인위적으로 아무리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 해도 시난고난하기 마련.

세상 모든 물상은 본디 제 자리를 벗어날 경우 생존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나마 어떤 조건하에서도 악착같이 살아가는 종도

있는 반면 연하고 섬세한 식물은 터전이 바뀌면 적응도가 극히 취약해 결국은 죽고 만다.

한 시절 유행한 탐석, 무정물인 돌조차 그러할진대 분재나 채란 취미가 고아한 정취이기만 할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이렇듯 사라져 가는 많은 것들.

지구란 행성을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옮겨지면 우리는 지금처럼 자재로이 호흡할 수가 있을까.

마찬가지 논리다.

그래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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