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3월, 월간 문학정신지에서 등단소식을 전하기 위해 발송된 등기속달 우편물.
1985년 서울신문사, 범우사, MBC 부산방송국의 수상소식 우편물. 축전과 편지들은 미국으로 이주하기 앞서 짐 정리를 하면서 겉봉만 모아 사진에 담아놓음.
.출간한 다섯 권의 수필집 (발행 순서대로)
2022년 봄호부터 2024년 봄호까지 서귀포 시청 사보에 실린 <서귀포 문화예술인> 인터뷰 기사 일부.
서귀포에는 폭포가 몇 개나 있을까? 위용 멋진 폭포가 무려 일곱 개도 넘는다. 하루 만에 그 폭포들을 다 섭렵했다. 그렇지만 평상시엔 폭포가 다섯 개뿐이다. 한라산에 엄청나게 비가 쏟아져 내려야만 나타나는 폭포가 둘인 셈이다. 처음 목적지는 평소 절벽에 물기 흔적조차 없는 엉또폭포였다. 엉또가 뭣꽈? 제주어로 '엉'은 작은 굴, '또'는 들어가는 입구라니 아마도 절벽 어딘가에 동굴이 있는가 보다.
어제부터 엉또폭포가 터졌다는 소문은 들었다. 강풍이 부는 데다 호우주의보가 연신 발효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비가 줄기차게 퍼붓는지라 꼼짝하지 않았다. 실제 서귀포에 내린 비는 오월 하루에 내린 강우량으로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제주공항은 무더기로 항공기가 결항되며 난리 북새통, 특히 학생들 수학여행 팀이 곤욕을 치른다는데.
간밤에도 비바람 밤새 심했다. 오늘 아침 황 선생과 브런치를 먹고 나서 날씨가 번 해지자 엉또폭포나 가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외출하기 알맞을 만큼 빗줄기도 성글어지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그러나 신시가지에 들어서니 지척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무진기행 배경이 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월산동 지경에 이르자 농무는 더 짙어졌다. 밀감 농원을 둘러싼 숲에서 꺽꺽, 목쉰 소리를 내는 꿩 기척이 들려왔다.
엉또폭포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도로변은 주차장으로 변해있었다. 간선도로는 교통통제로 일체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악근천 강폭 좁다 하며 격렬하게 치달리는 거센 물길을 보고 엉또폭포가 장관이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다. 인디언의 북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둥둥둥! 북 치는 소리는 가슴에서 났다. 심장 박동 쿵쾅대자 어느새 발길 나르는 양 빨라졌다.
길을 메우다시피 하며 폭포로 향하는 사람들이 안갯속으로 속속 빨려 들어갔다. 우리도 처음엔 잰 걸음으로 내달았다. 문득 청렬하게 휘감겨오는 몽환적인 향기.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귤꽃 향기 아니라면 이십분 남짓에 닿을 거리다. 그새 폭포가 사라지랴 싶어 우리는 귤꽃 향 음미하며 느리게 걸었다. 저기압에다 안개까지 짙다 보니 골짜기 가득 꽃내음이 가라앉아 있어 우린 귤꽃향에 듬뿍 취해 들 수 있었다.
꽃 향 더불어 도착한 엉또폭포. 유레카! 왕창 드디어 터졌다. 우람스러운 엉또폭포수는 숫제 엄청난 물 폭탄이었다. 낙하하는 물줄기가 아니라 연달아 폭발하는 수소폭탄 다발 같았다. 다들 유구무언, 감탄사조차 무색해졌다. 폭포는 물안개에 싸여 형체마저 어렴풋한 채 오리무중. 웅장하다거나 대단하다는 찬사 헌정하기도 전, 폭포수 냅다 내리꽂히는 소리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귀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얼떨떨, 넋을 놓고 있다가 겨우 정신줄 챙겨 후딱 자릴 비켜줬다. 꾸역꾸역 인파는 계속 몰려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황 선생이 한마디 했다. 지나가는 말처럼 "천제연 제1폭포도 강수량이 많으면 물이 쏟아진대요" 그랬다. 오, 그렇다면 이번엔 천제연으로 갑시다. 0.1초도 지체하지 않고 내가 말을 받았다. 상류가 맨송맨송한 건천이라 늘 물이 마른 폭포려니 했는데 처음 듣게 된 정보였다. 우리는 의기투합 천제연으로 내달렸다.
제1폭포로 내려갔다. 세상에나, 와우! 물안개에 가린 채 엉또가 보여주지 않은 물줄기의 생얼굴, 천제연은 장대한 폭포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엄청났다. 대단한 위세였다. 압도해 오는 위용, 장관이었다. 드럼통으로 쏟아붓듯 들입다 물폭탄을 내리꽂았다. 실낱같은 물줄기 하나도 내려오지 않던 평소의 천제연 제1폭포였다. 헌데 소리도 요란스러이 수직으로 곤두박질치는 물줄기 뭉텅뭉텅 쏟아져 내렸다. 마구 함성 지르면서 백병전 치르는 병사 무리같이 마구 육박해왔다.
계곡 뒤흔들며 치달리는 물소리에 심장이 덩달아 격렬하게 뛰었다. 그간 서너 번이나 들릴 적마다 수량 대단치 않았는데 이번엔 대형 댐 수문을 열어젖힌 듯 콸콸 내닫는 계류. 모범생처럼 단정하게 내리던 제2폭포는 수량이 늘어난 만치 풍만한 나신 소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알아 한 겹 실크 가운 휘감아 전신 숨긴 채 세찬 물소리로 펄펄 끓는 열정 식혔다. 애꿎은 신록의 숲만 온 데로 퍼져나가는 물안개로 자취 흐려지곤 했다. 주변은 온통 흩날리는 물입자들로 희뿌옇고 연둣빛 연연한 나뭇잎들은 미친 듯 몸을 떨어댔다.
제3폭포는 경사가 급해 오르내리기가 여간 상그러운 게 아니다. 청년들도 기나긴 계단 올라오면서 휴우! 힘들다며 숨을 몰아쉰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막내를 모른 척 외면하고 그냥 갈 순 없잖은가. 조심스러운 빗길 미끄러질세라, 난간을 잡으면서 살살 내려갔다. 3폭도 요란한 물소리에 뽀얀 물보라 레이스 자락처럼 주변에 드리워 놨다. 귀엽기조차 하던 제3폭포는 그만 과체중 비만아가 되었다. 짧은 폭의 낙하, 그럼에도 서로 밀치면서 급하게 뛰어내려 폭포소리 굉장히 우렁찼다. 연거푸 방아질 차지게 해대며 쏟아내는 굉음에 귀청 먹먹해졌다. 이제 곧 폭포수는 힘찬 계류되어 별내린 전망대를 거쳐 바다에 이르리라.
천제연 삼 폭을 다 둘러보고 나니 이번엔 천지연이 걸린다. 그래, 이왕 나선 김에 서귀포 지역에 있는 폭포마다 전부 찾아보기로 하자. 곧장 우리는 중문에서 서귀포 시내로 이동했다. 물론 일부는 걸어서다. 같이 걷는 길동무인 좋은 도반의 조건은? 우선은 마음이 맞아야 하고 움직이는데 무리 없게 체력이 엇비슷해야 한다. 손발이 척척 맞아야 서로 신경 쓰이지 않고 무엇보다 척하면 이심전심 통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조금치라도 걷기 힘들어하거나 내키지 않아 한다면 동행되어 함께 다니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고맙게도 좋은 도반을 만난 덕에 이처럼 비 오는 날 흔쾌히 폭포 투어를 할 수도 있는 것. 더구나 우린 벽 하나 사이에 두고 바로 옆집에 산다.
칠십리 시공원을 지나고 작가의 산책길을 통해서 비교적 얌전한 천지연폭포로 내려갔다. 울창한 아열대숲이 길게 이어진 이 길은 우리들이 수시로 찾기에 아주 익숙한 곳이다. 천지연폭포 인근은 비교적 안온한데다 방문객도 적은 편이라 조용했다. 절벽 양편이 바람막이 병풍 역할을 해준 덕택이고 사람들이 거지반 엉또폭포로 몰린 덕분이다.
폭포수는 평소보다 확실히 수량 풍부했으므로 여울진 강물이 계곡 그들먹해져서 일부 길은 통제가 됐다. 습습한 공기가 신록의 숲을 더욱 웅숭깊게 만들어줬다. 폭포 순례도 얼추 마무리 단계라 마음 여유롭고도 푼푼해졌다. 망사 커틴처럼 드리운 폭포수도 이 줄기 저 줄기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묵직하게 흐르는 강물도 그윽이 내려다보고 밀밀한 푸른 숲도 찬찬히 둘러보면서 느긋하게.
천지연에서 제법 오래 머물다가 서귀포 어판장이 있는 포구를 지나 자구리 해변 쪽 정방폭포로 길을 잡았다. 정방폭포는 마감시간이 아닌데도 출입문이 닫겨 있었다. 강풍으로 출입통제라 정방폭포는 먼빛으로만 건너다보았다. 바다가 험하게 포효하며 높은 파도 몸부림치듯 허옇게 밀어닥쳐 해벽에서 냅다 산화하는 때문이었다. 주상절리 벼랑 아래서 으깨지는 파도는 맹수의 이빨처럼 허옇고도 들쑥날쑥 거칠었다. 한참 떨어진 위치임에도 부서지는 파도 소리 거칠게 저 아래서 으르렁거렸다. 먼바다에서 밀려온 해풍은 그 무엇에도 거침없이 치달리는지라 한껏 자유분방했다.
바람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한동안 망연히 서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찬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하며 빠르게 소정방폭포가 기다리는 쪽으로 걸었다. 길목에 있는 소라의 성이 안개비 속에 유령처럼 서있었다. 소정방폭포는 이름대로 정방폭포 아우다. 그런만치 규모는 작으나 여러 물줄기가 쏟아져 아기자기하다. 백중 때 시원스레 물맞이를 할 수 있는 특별 명소로 염천 삼복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폭포다. 정수리로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수는 뼛속까지 시원하게 해줘, 지난여름 벗들 청해 세 번이나 물맞이를 했다.
소정방폭포수는 강한 해풍에 이리저리 후드끼며 마구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도저히 벼랑에 걸린 쇠 난간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체중 정도는 얼마든지 단번에 날려버릴 것 같은 강풍이 겁나서다. 황 선생은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가 동영상을 찍었다. 하여 그로부터 영상과 사진은 전송받기로 했다. 복날 젖은 옷을 말리던 조붓한 해변에는 강풍이 숨 거친 격랑 거듭거듭 부려놓았다. 언덕 위에서 바다 바라보며 수련하듯 심호흡을 했다. 해풍 세례 받으며 있는 대로 코 평수를 넓혀 숨을 들이마셨다. 찹찹한 공기가 비강을 훑은 다음 후두를 통과해 허파꽈리마다 일일이 정하게 씻어줬다.
탄성 발하며 여기저기 종횡무진 치달린 폭포 투어로 멋지게 마무리한 하루였다. 우중 산책 즐긴 어린이날인 이날은 오래 기억될 스페셜데이. 치밀하게 스케줄을 짠 것도 아닌데 우연히 선물처럼 주어진 축복된 하루, 진심 감사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발길 이끌어 주시고 놀라운 비경 접하게 해주신 하늘에 정녕 감사! 돈내코에 있는 원앙폭포만은 출입통제로 도리 없이 다음을 기약했다.
옆집 교사의 동료가 며칠 전 연극표 넉 장을 예매해뒀다고 하였다. 시조를 공부한다는 그녀는 고맙게도 그때 내 표까지 챙겼다. 듣기도 첨인 치마 돌격대란 제목만 듣고는 행주산성 전투를 상상하는 정도가 내 앎의 수준이자 한계였다. 별 기대를 걸지 않았기에 사전 검색도 하지 않고 엊그제 저녁 공연장으로 향했다. 서귀포 예술의 전당에서 개막 축하 공연을 가진 <치마 돌격대>는 '제41회 대한민국 연극제 제주'가 펼친 무대였다.
심드렁했던 처음과는 달리 극 초반부터 흡인력 있는 연극 무대에 완벽히 그리고 오롯이 빠져들었다. 탄탄한 각본에 따른 연극은 갈수록 높은 몰입도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변방의 섬에 깃든 제주민들의 고단하고 힘든 삶의 흔적들이 대사 곳곳에서 배어 나왔다.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고려 시대부터 끊임없이 외적으로부터 약탈 당하는 등 수난을 겪은 제주인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다. 섬은 안팎으로 시달렸으니, 조정에서는 특산물인 전복이며 귤 공납을 독려했고 진상품인 군마 조달 책임도 지고 있는 제주였다.
연극은 투명한 푸른 천으로 표현한 바닷물 속에서 물질하는 해녀로 무대를 열었다. 착취 당하며 소외된 섬주민으로 살아온 한 서린 그들의 푸념이 이어지는 도중, 불길한 주홍빛 번갯불이 번쩍였다. 파발마가 외친,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그들은 혼비백산 흩어져 버린다. 그랬던 지역민들이 어차피 막다른 길, 마지막 용기로 끝까지 죽을힘 다해 싸우겠노라 결사항쟁의 뜻을 다진다.
화북포로 개미 떼처럼 밀고 들어온 왜구들과 주민들은 제주목을 둘러싸고 3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적들은 조선 조정이 제주를 도외시하여 목사 파견 시에도 무능하고 부패한 탐관오리나 보낸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제주로 부임한 목사 김수문은 그러나 전혀 달랐으니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였다. 일생일대의 최대 위기를 맞은 제주민들을 독려해 한덩어리로 뭉쳐 싸우자며 목사가 자진해서 선봉에 섰다.
하나가 된 민관군은 목사를 비롯하여 정예군 70명과 치마(馳馬) 돌격대가 합심 단결해서 마침내 크나큰 시련을 이겨냈다. 연극은 배역에 걸맞은 캐스팅으로 무게감을 살렸으며 이방 역을 맡은 원로 배우 최종원의 감초 연기는 재미를 선사했다. 대규모로 벌어진 격렬한 전투 장면과 기마부대의 활약상을 연극은 첨단 영상기술을 빌려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한정된 공간을 3차원으로 확장시켜 무대를 입체적으로 바꾸는 영상 연출인 프로젝션 맵핑 기술도 돋보였다. 춤이라는 몸짓으로 표현된 역동적인 말 퍼포먼스 역시 무척 신선했다.
규슈에 기반을 둔 왜구떼가 선박 70여 척에 나눠 타고 영암 장흥에서 분탕질 치다가 여의치 않자 제주를 침공했던 1555년. 주로 전라도 해안지방이 왜구의 약탈 대상이었다. 석벽으로 둘러싸인 제주인 데다 환해장성이 가로막아 쉽게 침입하지 못했던 섬. 그런 점에서 이번은 조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왜구 침입이었던 셈이다.
태종의 대마도 정벌 후 근 백여 년간 잠잠하던 왜구가 조선의 군사력 약화를 틈타 발호하기 시작했던 것과도 맞물렸다. 여러모로 외딴섬 제주가 위태롭다는 판단하에 조정에서는 여진족 방어에 공이 뛰어난 장수 김수문을 제주 목사로 임명했다. 조선 명종(명종 10년) 때인 그해 유월, 제주목사의 급한 장계가 올라왔다. "이달 21일에 왜선 40여 척이 보길도에서 바로 제주 앞바다로 와 1리 가량의 거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습니다." 왜구들이 조선시대 제주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로 병사 천여 명을 이끌고 새카맣게 몰려들었던 것.
화북포구는 제주성으로 가는 최단거리에 위치해 있는 바닷가다. 적들은 포구에서 거로 마을과 사라봉 일대를 거쳐 제주읍성 동쪽의 높은 산위에 진을 치고 제주성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단순한 노략질 수준이 아니라 제주성을 점령, 왜구들의 본거지로 삼고자 노린 것이다. 큰 야심을 품고 쳐들어온 왜구들은 그러나 목사를 주축으로 한 치마 돌격대와 70인의 효용군에 의해 결국 격퇴됐다.
명종이 즉위한 1545년부터 1554년까지 그간 총 열두 차례나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제주섬은 왜구 침입이 잦던 곳이다.
고려 말부터 을묘왜변시까지의 250년간 왜구 침입이 40여 차례나 있었다고 고려사에 나와있을 정도다. 당시 제주를 침략한 왜구에 맞서 민관군이 힘을 하나로 모아 접전 끝에 격퇴시키므로 승전의 새 역사를 써내린 제주인들.
1555년 7월 6일, 다시 제주목사 김수문이 장계를 보내왔다. "6월 27일 무려 천명의 왜적들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병이 매우 많았는데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와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해 적군은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투구(紅毛頭具)를 쓴 왜장이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 김몽근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는 명종실록 6월 28일 기록이다. 김상헌의 남사록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그 사실이 자세히 나와있다. 을묘왜변으로 기록된 이 전투는, 목사 김수문을 중심으로 민관군이 왜구 천여 명을 상대로 싸워 이긴 역사적 쾌거였다. 죽음 각오하고 자원한 소수 정예병 치마 돌격대(馳馬突擊隊)는 4인의 기마대를 이름이다. 치마는 한자로 馳 달릴 치 馬 말 마, 즉 말 타고 달리며 싸우는 기마 특공대다. 치밀한 전략을 세워 선제적으로 공격을 감행해 왜구들을 물리친 김수문 목사. 왜변 이듬해 그는, 전공(戰功)에 대한 명종의 배려에 보답하고자 목관아 안쪽에 가장 높은 건물인 망경루를 건립했다.
어느 날, 화북포구 창창한 물길을 휘덮다시피 몰려든 왜구떼. 연극 속의 장면을 상상하다가 잠이 드니 꿈길에조차 바닷물이 출렁댔다. 이튿날 급기야 망경루가 있고 성터가 있고 화북포구가 있는 제주시로 달려갔다. 온갖 환난 품어안고 묵연한 한라산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화북포구다. 화북포구는 처음으로 와본 곳이다. 차도에서 한참 걸어들어와 화북진성을 끼고 포구마을로 들어섰다.
제주 해안가 치고 이리 한적한 바닷가도 있다는 게 심지어 신기할 지경이었다. 관광섬이 된 이제, 한갓진 어촌도 파도 소리 벗 삼아 조용히 살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 세태다. 사업성 괜찮은 마을이다 싶으면 용케들 들쑤셔서 핫플 만들어내니까. 해변마다 카페와 식당들 깔려있게 마련인데 여긴 예외지대였다. 화북포 앞바다 오가는 배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용왕께 빌던 해신사도 그대로다.
나지막 돌담 둘러친 어촌에서 바뀐 거라곤 아마도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변했다는 거? 그래도 살림은 꽤 옹골져 보인다. 선주가 많은 듯 고기잡이배가 여러 척 포구에 묶여있다. 방파제로 나갔다. 망망대해가 끝 모르게 펼쳐졌다. 상쾌하다기보다 어쩐지 느낌 처연해진다. 넓고도 먼 수평선, 창망함이 밀려든다. 무한정 펼쳐진 바다는 기막히게 푸르기도 하다. 아예 검푸르다는 표현이 맞겠다.
막막한 그 바다에 굼실대는 파도조차 숨죽인 듯 고요하다. 아득한 저 멀리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왜구의 깃발. 그 거리 좁혀질수록 별도연대 지키며 연기 피워올리던 경계병은 긴장으로 침이 말랐으리. 여러 연대를 올라봤지만 별도연대는 구조부터 확연히 차이가 난다. 기단에서 중간쯤 올라와 첫째 망대가 방호벽을 두르고 있으며 다시 그 위에 연대를 올린 이중구조다. 저 창창한 바다에 수상한 낌새의 배들이 나타나면 연대에서는 낮에는 연기, 밤엔 횃불로 위험 신호를 보냈다.
연대에 올라서니 전면은 망망대해, 좌측은 화북포구가 바로 옆이고 우측으로는 임산부 형태인 원당봉이 보이며 검은 모랫벌 삼양해수욕장이 멀리 건너다보인다. 별도연대는 해안을 감시하며 유사시 동으로 조천 연대며 원당 봉수와, 서로는 수근 연대 및 사라봉 수와 교신을 나눴다. 별도연대 아래 단단하게 쌓은 환해장성은 현무암 거친 바위 위에다 큰 바윗돌 촘촘 쌓았으며 높다란 장성 중간중간에 틔여진 공간을 두었다. 그만큼 화북포구는 외부 적들의 잦은 침공 루트였던 모양이다. 환해장성 바윗돌마저도 바짝 귀 세운 채 정면만을 주시하고 있었으리라.
빠르게 전열 가다듬으며 경계태세에 돌입한 군졸들. 웅성대는 해안마을, 아녀자들 벌써 피난 보따리 꾸릴 것이다. 둥둥! 제주성에서 북소리 높아진다.
여진족을 소탕한 김수문 목사는 뛰어난 전략가다. 휘하에는 목숨 내건 치마 돌격대와 용감스러운 70명의 정예병이 포진했다. 포구에 도착한지 반나절 만에 제주성에 닿은 적들은 진을 치고 성곽을 포위한 채 공격해 들어왔다. 성안의 목사 이하 관군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적은 물러나 대오 가다듬은 후 다시 침공 거듭하며 사흘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일전불사의 강한 결전의지에 따라 방어에만 급급하지 않고 목사는 과감히 선제공격에 들어간다. 불퇴전의 정신으로 하나 된 군관민,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맞서 싸울 각오다. 총기로 무장한 거침없는 왜구떼 제주성 향해 다시 새카맣게 몰려온다. 타다당! 철환이라 알려진 총기가 불을 뿜었다. 도저히 화살로는 막을 수 없는 화포 공격에 주춤한 성내, 이때 적진 속으로 돌격하는 치마 부대. 조자룡이 창 쓰듯 마구 칼 휘두르며 백병전에 나선 날쌘 기마대는 말발굽으로 왜구를 짓이겨댔다. 총기 위세만 믿고 들입다 달겨들던 적들은 혼비백산, 퇴각했다.
와와! 성 안팎에서 크게 일렁이는 함성. 을묘왜변은 제주에서 그렇게 마무리됐다. 역사에 기술된 을묘년 왜구 침략, 당시 전라도 여러 지방이 유린당하며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이 왜변은, 전국을 통일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 침공이란 야욕에 불을 댕기는 단초 역할을 하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내 땅을 지켜 승리의 항쟁사를 쓴 제주민의 결기를 조정에서 깊이 새겨봤더라면? 을묘왜변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으로 왜군은 제주를 비껴갔으니, 기나긴 임란의 와중 제주가 피해 전혀 입지 않았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여러 차례 돌고래가 지나는 걸 보았다는 이웃은 그들이 지나간 스팟을 정확히 기억하였다. 노을해안로 무릉리와 영락리 구간에서 누차 돌핀 재롱잔치를 구경했다니 우리도 과연? 돌고래 마중을 가는 오늘 왠지 느낌이 좋았다. 우리의 랑데부가 이루어져 오늘은 꼭 만나볼 수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두근두근, 아무튼 동계가 여간 아니었다.
실은 어제 오후에도 돌고래 만나보려고 살짜기 모슬포에 갔었다. 그러나 정보가 부정확해 헛걸음을 쳤지만 뭐 첫술에 배부르길 바라겠나. 마침 오늘은 서포터즈 팀이 안덕 황우치해변에서 플로깅 봉사활동을 하는 날. 활동 끝나고 살살 다시 찾아가 볼 심산이었으니 어제 헛수고도 과히 서운치 않았다. 헌데 행사 후 모인 카페에서 돌고래가 화제에 오르면서 예상치 않게 서포터즈 팀 중 다섯이 동행되어 노을해안로를 달리게 됐다.
예정대로 오전 내내 해안가로 떠밀려온 표류물과 쓰레기 등을 깨끗하게 청소한 우리는 개운하면서도 상기된 기분이었다. 다들 보람된 일을 마무리한 뒤라 뿌듯한 마음에 들뜬 채여서인지 돌핀 보러 가자는 데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래서 행운이 따른 걸까, 짜잔~돌핀 몇 마리가 힘차게 자맥질하는 걸 바로 앞바다에서 목격했다. 설레는 기대감 가득 안고 바다를 주시하던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돌고래다! 순간 심쿵!
첫 번째 돌핀 사진을 찍은 시각은 정확히 오후 4시 02분이었다. 와우, 진짜 돌고래였다. 신기방기, 운 좋게도 노을해안길을 달리자마자 단번에 심봤다는. 플로깅 후 바다의 선물처럼 돌고래 유영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는. 수족관이 아닌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노을해안로 앞바다에서 덩치에 비해 귀여운 남방큰돌고래를 접했으니 고마워, 돌핀들아!!!
한참 전 캘리포니아 퍼시픽 해안에서 회색고래 무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땐 제법 먼 거리에서 일렬로 떼를 지어 지나가는 고래를 아스라이 보았을 따름. 반면 오늘은 놀랍게도 아주 가까운 갯바위 근처에서 점프질을 하며 숨바꼭질 일삼는 돌고래를 만났다. 야야, 다칠라! 어련히 알아서 다닐까만은 들쑥날쑥 현무암 바위 험한 지형이라 반가운 마음 한편으론 염려도 되었다. 물론 창조주께서 생명체마다 공평하게 나름의 경이로운 감각을 주셨지만.
돌고래는 고래치곤 작지만 몸길이가 2m 넘기에 그다지 작다고는 할 수 없으며 폐로 숨을 쉬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포유류이다. 매끈한 피부를 가졌으며 영리하기로 소문난 데다 유달리 청각이 예민해 음파 탐지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수백 마리씩 무리를 지어 사는 습성이 있다는데 오늘은 대여섯 마리만 근처를 왔다 갔다 하였다. 우리가 만난 돌핀은 ‘보호대상 해양생물’로 지정된 정식 이름이 남방큰돌고래다. 제주 서남부에서는 수애기, 동북부 지역에서는 곰새기라 부르는 돌고래는 몸집이 작고 부리는 긴 편이란다.
전에는 한림읍 일대에서 서식하던 돌고래인데 해상풍력단지가 들어서자 수중소음을 피해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대정 바다 인근에 즐비한 광어 양어장에서 버려지는 배출수에는 영양염류가 녹아있어 식물성플랑크톤 번식이 활발하단다. 자연스레 숭어떼가 바글거리고 더러 양어장 광어도 튀어나오는데 돌핀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광어라 한다. 특히 암초도 많고 물살이 센 바다로 알려진 모슬포 바다는 돌고래들이 서식하기 좋은 조건이라고. 그래서 물가 가까이서 떼 지어 자맥질하며 놀아도 괜찮은 모양이다.
대정현은 예로부터 품섶 너른 들판을 끼고 있어 조선조 제주삼읍 중 남서면으로 분할된 지역이었다. 청정히 맑은 바다가 펼쳐진 대정 해변에서 바라보면 대한민국 최남단 가파도 마라도가 또렷이 보인다. 그간 찾은 영락, 무릉 앞바다는 평화로울 정도로 파도 잔잔했다. 갯바위 낚시꾼들도 숱하고 왜가리며 가마우지도 고기를 낚으려 바윗전에 주르름 서있었다.
그 대정 바다도 이번 토요일 무렵은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어질 거 같다. 기갈 센 바람 소리로 미루어 벌써부터 조짐이 안 좋다.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토요일쯤 제주를 향해 올라올 거라는 뉴스는 엊그제부터 들었다. 어제 아들이 연타로 문자와 기상도 사진을 보내왔다. 태풍에 대비해 미리 생수와 식품 및 양초와 플래시를 챙겨놓으라고 했다. 서귀포에서 오래 산 사람에게 당시 바닷가 상황이 어땠는지 들어보라고도 했다.내가 뉴저지에서 살던 2003년이라 직접 겪어본 바 없는 매미, 초강력 태풍의 습격이라는 동영상도 딸려보냈다. 한반도를 휩쓴 태풍 매미의 위력을 안 봤으니 철없이 무모한 엄마 고래보러 나갈까 봐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지난주부터 닷새 연달아 무릉 바다로 갔다. 돌핀 무리 귀여운 재롱에 혹해, 매일 걔네들을 교황 배알하듯 만나보러 간 것. 첫날은 허탕쳤다. 둘째 날 비로소 돌고래를 봤다. 신기하게도 바로 해안가 가까이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고 신통방통하기만 했다. 폴짝 뛸 듯 신나하며 걔네들에게 정신없이 빨려들어갔다. 나이 상관없이 순수한 동심처럼 해맑다 못해 투명해지는 영혼.
셋째 날은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려 혼자 살짜기 다녀왔다. 돌핀이 노니는 스팟을 알기에 바로 그 장소로 직행했다. 걔네들이 나타나자 환호하고 탄성 보내며 동영상을 찍어댔다. 내게 아직, 어쩌면 그리도 순수한 열정이 남아있었을까. 뙤약볕 아랑곳하지 않고 돌핀 무리 따라 영락리에서 무릉리 바닷가 아래 위로 누비고 다녔다.
넷째 날은 옆집 황 선생과 동행했다. 꼭꼭 아껴두고 혼자만 보고 싶으나, 그녀도 좋은 곳 서슴없이 안내해 주는지라 주말 기해 앞장을 섰다. 사랑스러운 보배를 소개하려니 마음 먼저 나부대며 설레기 시작했다. 차가 출썩거릴 때마다 어깻죽지에서 날개라도 돋을 거 같이 스멀스멀 거렸다. 하지만 돌핀은 그날 무엇에 토라졌는지 도통 모습 나타나지 않다가 겨우 한 마리만 이내 스쳐가 버렸다. 그녀는 바로 그 짧은 순간을 놓쳐버렸으니 내 들뜬 설명만 들었을 뿐 정작 돌핀은 만나지 못했다.
한 시간여 버스에 흔들리며 벼르고 온 터라 황 선생에게는 미안쩍게 됐지만 도리 없었다. 그렇게나 잘들 노닐던 얘네들이 어쩐 일이야?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걸까 걱정이 다 됐다. 하긴 드넓은 바다 어디를 유영하건 돌고래 맘이고 좋은 먹이가 있는 데라면 어딘들 못 가랴. 자유자재 기분 내키는 대로 한림에서 성산포까지 동으로 서로 이동하는 돌고래다.
다섯 번째 날은 요 근래 드물게 일기 매우 쾌청했다. 멀리까지 시야 트여 청옥빛으로 바다 빛났으며 햇살 유난히 따가웠다. 영락 마을 노을해안길에 도착하자마자 돌고래 무리가 보였다. 정확히는, 먼저 돌고래가 눈에 띈 게 아니라 길가에 차를 대고 서있는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고래가 나타났음을 알아차렸다. 폰을 꺼내 동영상 모드로 바꿔가며 해안가 바위로 내려갔다.
울산 반구대 선사시대 유적지 석벽에서도 만나본 고래다. 19세기 고래기름 수요가 급증하며 한때 포경업은 호황을 누렸으나 현재 고래는 멸종 위기라 국제보호종으로 지정이 됐다. 제주 해역에 백여 마리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남방큰돌고래는 2012년부터 해양수산부 지정 해양보호생물이다. 난개발로 인한 서식지 감소와 오염물질의 해양배출 및 무분별한 선박 관광 등으로 멸종 위기에 몰린 돌고래.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국제보호종인 돌고래 토종 상괭이도 보호 조치가 필요한 실정이다. 노을해안길 가까이에서 만난 돌고래는 육안으로도 관측이 가능해 더더욱 감탄사가 터질 만큼 신기 진기하고 놀라웠다. 쌍안경이 있으면 좀 더 정확히 볼 수 있겠고 망원렌즈 달린 카메라라면 쟤들 모습 선명히 포착할 수 있겠으나 이쯤으로도 어딘가.
캘리포니아 퍼시픽 코스트에도 고래 탐방 투어 상품이 있지만 이는 뭍에서 망원경으로 먼바다 지나는 회색고래 떼 관찰하는 정도다. 날렵한 몸매에 긴 부리와 선명한 등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를 가진 제주 돌고래가 숨 쉬고자 점프하면 동시에 탄성 보내는 사람들. 솟구쳤다가 다시 긴 자맥질을 하며 헤엄치는 귀요미 돌고래들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나부터도 서너 번까지는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돌고래 묘기에 취해 마냥 손 흔들며 반가워했다.
그러나 다섯 번째에 이르러 돌고래 무리 따라다니는 배를 예의주시하게 됐으며 바다 생태계를 해치는 행동에 주목하게 되었다. 마치 주홍 글씨의 칠링워드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어찌 저럴 수가! 강조하건대 대정 앞바다 돌고래는 선상 관측이 아니라도 해안에서 충분히 육안 관측이 가능하다. 굳이 배를 탈 필요없이 뭍에서 고래 구경을 하면 보다 확실한데다 이는 돌고래에게 자유를 허하는 일이 되며 여행비 절감도 된다.
얼마 전에 방영된 우영우라는 유명 드라마 열풍까지 겹쳐 고래 투어가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요즘 대정은 난리도 아니다. 해변길에서의 고래 구경은 물론 선박 관광상품까지 나와 네 척이나 되는 배가 돌고래를 좇는다. 돌고래가 시야에 떴다 싶으면 귀신같이 알고는 쏜살처럼 냅다 달려오는 고래 투어 유람선들은 최신형이다. 알고 보니 운진항에서 하루 다섯 차례, 요트로 고래 투어를 하는 상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 마을 청년 자치회에서 어선으로 고래 구경을 시켰다고 한다. 지금은 전문 투어 상품을 내건 새하얀 복층 선박들이 등장하면서 어선은 퇴장, 네 곳 회사에서 고래 관광을 시킨다고. 뻔질나게 대정 해안을 누비는 돌핀 관광선은 요금도 만만찮아 5만 삼천 원부터 선셋 투어는 6만 오천 원. 고래가 이동하는 근처까지 전속력 다해 질주해 온 선박은 시동을 끄지만 이미 돌고래는 엔진 소리에 행동 자체가 교란 받는다. 잘 알다시피 초음파를 이용해 먹이를 찾고 의사소통을 하는 특성상, 돌고래는 기계 소음에 유독 민감할 터다.
자유로이 유영하던 돌고래 무리 가까이로 배가 치고 들어오면 돌핀은 가던 방향을 틀면서 우왕좌왕 마구 흩어져 버린다. 그중 한 마리가 선박을 유인하듯 혼자서 티 나게, 가던 방향 따라 부지런히 헤엄쳐 가는 몸짓이야말로 자못 비장스럽다. 마치 전투 시 위기에 몰리면 무리의 퇴로를 열어주고자 적군의 표적이 되어 적병을 유인하듯이. 돌고래는 그저 단지 본능적 감각의 지시에 의해 선두에 나서, 무리 지키려는 그 몸짓 지켜보자니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치솟았다. 반대로 우리가 관광유람선에 쫓기는 무릉바다 돌고래 입장이라면?
인간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하지 못하는 동물이라서 그렇지, 자유를 박탈 당한 돌핀들은 얼마나 괴롭고 짜증 나겠는가. 사람 사이에 이 같은 불편한 일이 생긴다면 목숨 내건 분쟁으로 비화될 사안이다. 이처럼 돌핀 투어 선박은 돌고래 무리 ’50미터 이내 접근금지’ 규정을 어긴 채 범법 운항도 불사한다. 어쩌자고 해양수산부는 귀중한 해양자원인 돌고래들 스트레스 주는 이런 상행위를 허가해 주고 규정 어기는 만행조차 눈 감는지. 이를 원천 차단시키는 법적 토대가 없어 단속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해양환경단체 핫핑크돌핀스. 심지어 국회에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는 등 백방으로 손을 써보나 아무 진척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른다고.
적정 거리의 돌핀 보호구역이라도 법령으로 설정해 놓으면 선박 관광 업체들도 조심하겠고 돌핀들도 자유로우련만. 빠르게 돌아가는 스크루에 부딪는 경우 목숨 잃는 돌핀도 생길 테고 이대로 가다간 선박 소음에 지쳐 서식지를 바꿀 수도 있겠다. 조속히 보호구역 지정이 돼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돌핀들이 제주 앞바다를 누빌 수 있게 되기를. 걔네들이 여기를 편안한 삶의 터로 여겨 맘 놓고 안정되이 살면서 개체 수 늘려가기를. 그래야 우리 후대들도 저들 귀여운 재롱을 보며 해맑은 웃음 지을 수 있으리니.
돌고래가 제주 바다를 영영 떠나기 전에 빠른 대책 세우길 유관 단체들에 촉구하는 연판장이라도 돌리고 싶다. 무엇보다 자연과 환경을 아끼는 관광객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호응을 기대해 본다.
제주도와 한라산은 하나이다. 신생대 4기인 120만 년 전에 일어난 화산 폭발에 의해 한라산이 우뚝 솟고 이 산기슭에 분포된 오름에서 연속적인 분화 활동이 발생했다. 기생화산 활동기인 약 1만 년 전후로 여기저기서 분화구가 열렸으며 병약오름도 이때 폭발했다. 화순곶자왈이 이뤄진 시기는 마그마가 분출된 시기와 겹쳐진다. 용암이 이 땅에 시뻘겋게 흘러내리며 가공스러운 모습을 나타낸 때는 2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우주의 나이로 치자면 제주도 용암층은 매우 젊은 편이다.
대부분이 제주의 화산 활동 중 마지막 단계에서 형성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화산 분출로 만들어져 식생부터 분화구의 모양 등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화순곶자왈은 병악 오름이 약 2700년 전 폭발하면서 생성됐다니 상상외로 젊은 연대치를 보인 셈이다. 이는 화순곶자왈 하류인 채석장 용암류의 하부에서 채취한 고 토양을 가지고 탄소동위원소를 이용하여 측정한 연대치라고 한다. 병약오름에서 시작해 경사로를 따라 하류로 흘러내린 이 용암류는 화순해수욕장의 중심부를 자르며 바다로 흘러들었다. 이 용암의 길은 느리게 흐르며 곶자왈을 남겨놓게 되었다.
화순곶자왈 생태탐방 숲은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서동로에 드넓게 분포돼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중산간 지역, 한경, 안덕 곶자왈지대에 펼쳐졌다. 가까이에 산방산이 수호신처럼 우뚝 마주 서있다. 조각공원과는 바로 이웃이다.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 지형이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독특한 지형이다. 곶자왈은 나무, 넝쿨, 암석 등이 생태적으로 안정된 천연림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이다. 생물 서식 공간을 확보하고 생태계를 지키며 나아가 훼손지를 복원해나가는 노력이 참으로 시급한 작금이다. 공적 자산인 곶자왈은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물적 대상이 아니다. 이는 자손 대대로 물려줄 제주의 고유한 자연유산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돼 뿌리내려지길! 곶자왈은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미래 세대로부터 신탁 받은 재산이기 때문이다.
용암 분출 때 생성된 화산암과 돌무더기가 지반을 이루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땅인 곶자왈. 곶자왈 용암지대는 토양 발달이 빈약하고 표층은 물론 심층까지 크고 작은 암괴들로 이루어져 있다. 워낙 척박한 대지라 식물이 자라기 어렵고 식생 속도가 느려 숲의 형성은 오랜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 그나마도 60년대까지는 나무는 땔감으로 쓰일 뿐 아무 쓸모 없는 땅이라 외면당한 곶자왈이 새로운 부활기를 맞은 건 근자의 일. 곶자왈의 가치를 재발견하면서부터다. 생물 서식 공간을 확보하고 생태계를 지키며 나아가 훼손지를 복원해나가는 노력이 시급한 작금이다. 공적 자산인 곶자왈은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물적 대상이 아니다. 이는 자손 대대로 물려줄 제주의 고유한 자연유산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돼 뿌리내려지길! 곶자왈은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미래 세대로부터 신탁 받은 재산이기 때문이다.
희귀 동식물 50여 종이 서식하고 다양한 기후대의 식물이 모여 있는 숲이다. 종가시나무, 생달나무, 새덕이, 산유자나무, 탱자나무, 아왜나무,참식나무 등 상록수림이 가득 들어찬 화순곶자왈. 낙엽활엽수인 무환자나무, 예덕나무, 이나무, 단풍나무 등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개가시나무, 약난초, 더부살이고사리 등 멸종위기 식물도 품고 있으며 50여 종의 희귀 동식물이 분포된 곳이다. 구불구불한 수형의 나무와 덩굴, 바위마다 융단처럼 깔려 있는 푸른 이끼와 고사리류. 그늘진 터나 고사목에는 여러 종의 버섯류가 공생하는 곶자왈이다.
화순곶자왈 길은 1.2.3 코스로 분리 독립돼 있다. 1.2 코스는 개방돼 있으나 3코스는 아직 정비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다. 시설 면에서 길 표시 등이 가장 용이하고 편리하게 고루 잘 갖추어진 곳은 1코스다. 반면 2코스는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괜찮을 만큼 하나로 난 길 단순해서 좋다. 1코스 입구 쉼터에는 정자와 그네, 벤치, 화장실, 해충기피제 자동분사기가 구비돼 있다. 산책로 곳곳 적당한 위치에 벤치 및 평상이 놓여 있어서 잠시 쉬거나 간식을 들되 쓰레기만 챙기면 된다. 곶자왈 천년 비경 숲 따라 야자매트길, 목재 데크로 된 층계, 데크 산책로가 안전하게 탐방길을 이어준다.
한라산과 산방산이 마주 보이는 전망대 또한 훌륭하다. 다만 전망대 가는 길은 천연 그대로의 거친 곶자왈 길이라 운동화 차림이 아니면 걷기에 좀 불편하다. 또 한 곳, 홈밭동산 전망대가 있는데 초입 언덕부터 길이 흐릿한 상태라 거의 폐쇄된 채 조망권 확보조차 어려웠다. 의외로 1코스 내의 산책길은 좌우 양 갈래로 나있는 등, 골라 걷는 묘미가 있으나 약간 복잡해 헷갈린다.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길 안내 지도를 숙지할 필요가 있겠다.
산책로 양옆, 선태류와 양치식물 자욱한 숲엔 이끼, 애기모람과 콩짜개가 빼곡하게 덮인 바위도 흔하다. 고사목에는 크고 작은 별의별 모양의 버섯들이 다수 기생하고 있다. 대부분 처음 보는 희한한 버섯류다. 양지쪽으로 시선 돌리면 싱그러운 초목들이 제각기 영역 넓혀가고 있다. 햇빛 향해 키 돋워 그래도 멀쑥하게 솟은 무환자나무 꾸지뽕나무 보리수나무 예덕나무 때죽나무 새덕나무. 돌덩이 천지인 척박한 터전이다. 거기에 뿌리내려 강인하게 살아가는 나무들이 퍽 대견스럽다. 곶자왈에는 표토층이 거의 없거나 얇다. 해서 대부분 나무 씨앗은 바위틈이나 심지어 바위 위에서 싹을 틔운다. 열악한 환경에 겨우 걸쳐진 뿌리는 바위 사이로 드러나 있게 마련이다. 노출된 나무뿌리는 파고들 땅이 없으므로 옆으로 길고 편평하게 발달하여 '판근'이라 불리는 괴이쩍은 뿌리로 성장한다.
이렇듯 겨우 한목숨 부지하기도 힘겨운 판에 여기 더부살이하는 식물들도 꽤 된다. 주위 나무를 타고 올라가며 얼크러 설크러진 여러 종의 덩굴식물 어수선하게 휘감겼다. 칡, 마, 등, 머루, 마삭줄, 다래, 으름, 망개, 송악, 더덕, 인동덩굴과 노박덩굴. 여기에 담쟁이까지 높다라니 기어올랐다. 이리 온갖 덩굴 들입다 엉켜 있으니 어찌 풀어볼 재간이 없다. 그 바람에 나무 몸통은 울퉁불퉁, 줄기는 스프링처럼 꼬인 기형이 돼버렸다. 1코스에서는 이끼 낀 잣담을 만나기도 하고 터 표시만 나있는 일본군 막사 자리도 지나게 된다. 허리 높이 겹담을 돌로 쌓아 올렸다. 마소가 깊은 숲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든 목축문화의 유산인 잣담이다. 다른 하나는 질곡의 근대사 현장이다. 일제강점기 때 쓴 군 막사로 주변에는 무기 저장고며 참호 흔적이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있단다.
탐방로 서너 곳에 방사탑이 서있고 오가는 이들이 쌓은 돌탑도 길가에서 흔히 보인다. 함몰지인 골짜기엔 숨골이 숨어있어 아늑하고 따스하고 평화스럽다. 노루 가족도 여기 깃들어 살고 있으며 향기로운 산야초 피고 또 펴서인지 근방에 양봉가 벌통도 여럿 눈에 띈다. 탐방로 주변이 트인 데가 많아서 어둑신한 여타 곶자왈과는 달리 해가 들어 환한 편. 갑갑하지 않아 좋으며 더러 부드러운 잔디 길도 밟게 된다. 걷다 보면 소나 말을 방목하여 기르던 과거에 쌓은 잣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소 무리와 마주칠 수도 있다. 그래도 전혀 겁낼 게 없는 것이, 소는 본디 유순한 동물이라 먼저 해치려 사납게 덤비지 않는다. 스스로 비켜나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지나가면 된다. 다만 길에서 방심하고 걷다가는 소똥을 밟을 수 있으니 그 점 유념해 주의를 기해야 한다. 여길 한 바퀴 둘러보려면 순환코스로 30~40분 걸리는데 비교적 평지로 이루어져 남녀노소 누구나 가볍게 걸을만한 코스다. 아무리 평지길이라 해도 무장애길은 아니므로 유모차나 휠체어는 불편하다.
화산섬 제주의 허파인 곶자왈은 생명의 숲이다. 여기서 곶은 숲, 자왈은 덤불을 이르는 제주 방언으로 덤불숲이란 뜻. 곶자왈은 화산활동 중 분출한 용암류가 만들어낸 불규칙한 암괴 지대에 형성됐다. 오랜 세월을 거쳐 원시림을 이룬 곶자왈은 실제 매년 중형차 4만 대가 내뿜는 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들인다고 한다. 고마운 점은 그뿐 아니다. 바위 덩어리들이 갈라지고 쪼개지면서 만들어진 숨골이 여기저기 분포돼 있어 연중 기온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이곳. 숨골은 지표에 있던 물이 지하로 스며드는 구멍으로 숨골을 통해 아래로 잦아든 빗물은 제주인들의 생명수가 된다. 현재 우리가 마시는 물은 18년 내지 30년 전에 내린 빗물, 사십 대 때 내 어깨를 적신 빗방울을 지금 마신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무튼 생명의 원천인 물의 성능 좋은 정수기 필터 역할을 하기에 곶자왈이 한층 더 중요한 이유다.
점성 높은 용암이 굳어 생성된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이 덤불진 숲으로 다양한 식생을 이룬 특별지대가 여기다. 요철 심하게 난 독특한 지형이라 구간마다 다른 기후대를 형성, 같은 숲 안에 다양한 기후대의 식물이 공존하는 특이한 생태계를 보인다. 따라서 하나의 숲에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이 동시에 관찰된다고. 제주도에는 한경-안덕, 조천-함덕, 애월, 구좌-성산 등 네 곳의 큰 곶자왈 지대가 자리했다. 실제 제주 전체 면적의 6%를 차지하는 곶자왈은 과거에는 쓸모없는 땅으로 치부됐으나 이제는 생태계의 보고로 재평가되고 있다. 우리에게 청정에너지를 주는 힐링공간인 곶자왈은 자연 생태환경이 잘 보전된 생명의 공간으로 보전 가치가 높은 지역이다.
화순곶자왈은 한경-안덕 곶자왈 지대에 속한다. 병악오름 용암류가 흘러내려 만들어진 화순곶자왈은 1.5km의 폭으로 약 9km에 걸쳐 길쭉하게 펼쳐졌다. 이곳은 201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한 바 있는데 세계적으로 희귀한 동식물 50여 종이 서식하고 있어서다. 숲에는 개가시나무, 더부사리 고사리, 새우난, 긴꼬리딱새, 제주휘파람새 등 멸종위기종에 해당하는 귀한 생명체들이 살아간다. 화순곶자왈에서 특별히 눈여겨 볼 곳은 1코스 탐방이 거진 끝날 즈음에 접하게 되는 "곶자왈 국민 신탁지"이다. 안내글에 따르면 화순곶자왈이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에 따른 국민 신탁지라는 설명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땅 1평 사기’ 와 같은 공유화 운동을 추진하면서 2006년 국민신탁법이 제정되었던가 보다.
2014년 일이다. ‘화순 곶자왈 생태탐방숲길’속의 곶자왈 4필지가 시민과 기업의 후원으로 자연환경국민신탁의 보전재산이 되었다는 내용에 뒤늦게 감격한다. 뜻있는 이들을 통해 곶자왈 공유화 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으나 현재 후원액 모금이 미미해 모쪼록 범국민적 관심과 지원이 확산되었으면. 제주 곶자왈은 전체 면적의 60%가 사유지란다. 고로 골프장 건설, 도시 확장 등 개발 요인으로 인해 사라질 위험성이 높아 안정적인 보전책이 시급하다고. 그중 사유지 처분으로 훼손의 우려가 큰 한경, 안덕지역 등 곶자왈은 전체 곶자왈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니 걱정스럽다. 지자체 나아가 국가적으로 위기관리 대책을 강화해 곶자왈 지역을 공적기금으로라도 매입해야 하지 않을까.
왕도깨비가지는 가짓과 꽈리속 식물이다. 이름 그대로 도깨비처럼 괴이쩍고도 험상궂은 형체를 가졌다. 현재 목장 주변에서 왕성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이 식물은 동종 중에서 가장 큰 식물에 붙는 왕(王) 자까지 딸려있다. '왕'자가 붙었듯 외형이 엄청 크고 무성해 50-100cm 키에 가지가 많이 갈라져 한 그루가 숫제 덤불숲을 이룬다. 이리 살벌하고 지독스런 게 곶자왈 주변에 군락을 이뤄 점점 더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한국의 토종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식물로 환경부에서 진작에 판정한 바 있는 식물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원산지인 다년생 관목으로 줄기와 잎맥마다 바늘 같은 가시가 돋아 있다. 다년생 관목이라 하듯 뿌리만 살아있으면 계속 번진다는 얘기다. 실제 원 줄기를 잘라냈는데도 요즘 들어 살펴보니 아래쪽에서 무리 지어 새파란 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식물에서 가시가 돋지 않은 부분은 열매뿐이다. 씨앗을 품은 열매는 처음엔 수박색이나 익을수록 노랗게 변한다. 열매가 익은 근자엔 땅의 습기에 닿으면 자체적으로 껍질이 갈라져 씨를 뱉는다. 표피가 두꺼운 꽈리 형태의 열매는 높은 줄기에 매달린 채 건조돼 외부 자극에 의해 바스러지며 씨앗을 쏟아낸다
어쩌자고 이런 고약한 불량품이 청정 곶자왈에 나타났을꼬? 자연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사회악에 다름아닌 존재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지구상에 창조된 모든 것은 상대성을 띠어서일까.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듯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이라서 일까.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낼 때는 쓰임새 알맞게 만드셔서 제각각 다 몫이 있다고 하셨는데.
왕도깨비가지는 알레로패시 효과를 나타내는 페놀 화합물을 토양으로 방출하여 자생식물을 밀어내고 있다 한다. 이는 제주대학교의 연구결과로 하부 식생의 발아나 생장 등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생태계에서 경쟁적 우위를 점하는 것으로 판단된단다. 인간에게 유독한 솔라소딘을 함유하고 있는 이 식물은 미국에서 의학적 용도로도 연구되고 있긴 하다고. 솔라소딘은 감자, 토마토와 같은 가짓과 식물에서 발생하는 독성 알칼로이드 화합물. 약리학적 활동으로는 항균작용, 항진균작용, 항살충작용, 해열작용 활성, 진통활성, 항산화 활동, 항암 활동을 한다는 보고도 나와있다.
화산섬 제주의 허파인 곶자왈은 생명의 숲이다. 오랜 세월 거쳐 원시림을 이룬 곶자왈은 실제 매년 중형차 4만 대가 내뿜는 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들인다고 한다. 우리에게 청정에너지를 주는 힐링공간인 곶자왈은 자연 생태환경이 잘 보전된 생명의 공간으로 보전 가치가 높은 지역. 반면, 여기서 겁나게 세를 확장해 가는 외래종 왕도깨비가지는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유해식물 중에서도 왕초 격이다. 줄기는 물론이고 잎 전면에까지 길고 날카로운 가시로 중무장한 채 설치는 무뢰한이다. 남미에서 건초더미에 섞여 들어온 듯 목장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번지고 있다. 이 식물은 열매를 맺기 전 미리, 각별히 신경써서 게릴라전 펴듯 소탕작전 펼쳐 초전박살을 내야 할 고약한 무법자다.
화순 곶자왈과 소떼가 풀을 뜯던 목장의 경계지점, 완만한 언덕 바로 아랫녘 쪽에서다. 이삼일 뒤면 동지, 한겨울임에도 목장터에는 연초록 식물들로 봄기운이 감돌았다. 자잘한 클로버, 광대나물, 꽃다지와 별꽃풀 등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다. 풀잎들 사이로 흰 버섯 비슷한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기에 다가갔다. 발끝으로 건드려보니 활짝 벌어진 왕도깨비가지 열매였다. 열매 안쪽에 자잘하게 들러붙은 씨앗 수량에 그만 질겁을 하고 말았다.
땅에 떨어진 열매는 수분을 접하면 스스로 탁 터지며 속에 저장된 씨앗을 뱉어내는 듯. 줄기는 물론 잎새까지 날카로운 가시로 전신 무장한 왕도깨비가지는 번식력 끝판왕인데다 무법자인 생태계 교란 식물이다. 가만, 그렇다면 열매를 알뜰히 거두는 일이 급선무이겠다.나부터 열매 하나라도 제거하므로 하느님이 지으신 우주의 한 모퉁이를 살뜰하게 다듬어야 하리. 환경을 어지럽히는 온갖 병폐들로 인해 시름에 잠긴 지구별을 위해 빗자루를 들어야 하리.
여름내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뤘던 왕도깨비가지는 열매가 익어갈 즈음 예초기로 거의 다 베어졌다. 그러나 사유지인 목장터만 예초기가 사용됐다. 산자락이나 숲으로 번진 그 식물은 키대로 자라 지금은 잎 지고 노란 열매만 오소소 매달려있다. 멀리서 보면 유채꽃이라도 살랑대는 줄 알겠지만 노랗게 익은 왕도깨비가지 열매들이다. 예초기가 지나간 목장터 역시도 그 식물이 완전히 퇴치된 게 아니다.뿌리짬 줄기마다 새순이 올라와 왕성한 생명력으로 키 돋워 세력 넓혀가고 있으니까. 왕도깨비가지는 그렇게 유유히 옥토를 장악해 나갈 것이다. 한라산에 눈이 허연 한겨울이건만 이 식물만은 여전 독야청청이다. 아마도 명년 봄 활기차게 가지 뻗고 키 움쑥 키워 다시금 수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그간 왕도깨비가지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려, 보이는 족족 전지가위를 들이댔는데 개인 힘으론 역부족, 그 정도로는 소탕되기가 어렵다. 어쩌다 일회용으로 환경단체에서 현수막 내걸고 소탕작전을 펴봤자 소용없다. 화순 마을회에서 주부들 동원해 한나절 열매 수거했지만 겨우 눈 가리고 아웅한 격이었다. 왕도깨비가지에 명승지 잠식당하기 전에 더 본질적이고 대대적이며 지속적이고 근원적인 대책 수립이 요망된다. 도나 시 차원에서 팔 걷어붙이고 나서야 면이나 리 단위에서 그나마 하는 시늉이라도 낼까. 열매를 달기 이전, 늦어도 여름까지는 이 식물을 면도기로 턱수염 밀듯 깔끔스레 처리하지 않는다면 근절시키긴 어려울 터. 그러지 않으면 해마다 영역이 늘어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터다.
서양에서 슬그머니 딸려온 왕도깨비가지는 가시가 많고 번식력도 강해 일찌감치 생태계 교란종으로 판정 난 유해식물이다. 왕도깨비가지(Solanum viarum Dunal)는 가짓과의 여러해살이 귀화식물로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악성 외래식물 1순위. 열매 외피가 두터워 꽈리속인 거 같은데 꽃이 가지 꽃을 닮아 가짓과에 해당되나? 감자꽃과도 비슷한 연보라색 꽃을 여름에 피워 애기수박 같은 동그란 열매를 맺었다가 가을엔 노란색으로 익는다. 가시를 피해 조심스럽게 열매를 채취해 쪼개보니 씨앗이 소복이 들어있다. 언뜻 보기에 익기 전의 열매는 마치 아기 수박 같고 다 익으면 노란색 구슬같이 예쁘게 생겼다. 누군가 이 열매 맛을 봤는데 입안이 아리고 얼얼해서 꼭 마취된 느낌이더라 했다. 성질 자체도 독초에 속하는 식물인 모양이다.
남미 원산의 이 식물은 미국, 호주를 비롯 열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널리 퍼져 살고 있는 골치 아픈 식물이다. 미국발 환경 뉴스에도 미 동부 해안 지역과 호주 중부 해안에 침입해 Solanum viarum Dunal이 무섭게 번져나간다며 우려한 바 있다. 왕성한 번식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식물로 무성하게 열매를 맺어 골프공 크기 된다고 했는데 토질이 비옥해 그럴 수도 있겠다. 바로 그 식물이 건초에 실려 건너온 듯 제주 목장지대를 중심으로 화순곶자왈과 당오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제주시 쪽에서도 관찰되는 모양이다.
잎이며 줄기마다 길고 날카로운 가시로 중무장해, 보고도 선뜻 다가서 손대기 겁나는 식물이다. 소나 말도 위장장애를 일으켜 뜯어먹지 않을뿐더러 가시 때문에 다가가지도 않아 매우 빠르게 번식해 주변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사실 예리한 가시가 온 전신 여기저기 무수히 나 있어 아무리 맛있는 풀이라 해도 먹을 재간이 없을 게다. 목장에서 예초기를 동원해 자르던 데 그 기계로는 뿌리까지 훑어내지 못하기에 한계가 있다. 그나마 예초기 외에 낫도 소용없는 것이, 제거 시 왼손으로 어디 한 곳 거머잡을 데가 없어 겨우 전정가위로 잘라내야 한다. 목장갑으로 부족해 가죽장갑으로 무장하고도 최대한 조심해서 가위질을 해야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
괴물같은 이런 독종은 처음 본다. 무엇보다 가을이 되기 전 꽃 피는 여름에 박멸작전에 들어가야지, 열매 맺은 다음엔 어영부영하다가 익은 씨앗이 온 데로 퍼진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여름철에 예초기로 베어내고 밑바닥까지 꼼꼼하게 게릴라 소탕하듯 훑어야 기세 꺾이지 싶다. 범시민운동이라도 벌여 땅에 뒹구는 열매를 깔끔스레 주워서 소각시킴으로 왕도깨비가지를 곶자왈에서 퇴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가을 곶자왈에 자연학습 견학을 온 유치원 아동들 조그만 손에는 곧잘 노란 열매가 쥐어져 있었다. 딴에는 노랑 방울같이 예뻐서 가시에 찔리며 취한 왕도깨비가지 열매이리라. 양갈래머리 쫑쫑 따내린 소녀가 검지에 일회용 반창고를 감고는 손가락을 호오 불었다. 이 열매를 매단 식물은 줄기 전체를 비롯해 잎맥 위로 가시가 날카로이 돋아있다. 열매꼭지에도 머리카락같이 가늘면서 강한 가시가 나있어, 보나 마나 열매를 맨손으로 따다가 찔렸으리라. 이 가시에 찔리면 한동안 아리고 또 아리다.
해서 열매는 하나씩 감귤 따듯 전지가위로 꼭지를 절단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잡을 곳이 있느냐 하면, 가지고 줄기고 잎이고 가시 투성이라 어디도 만질 데가 없다. 코팅된 목장갑쯤은 마구 찔러대는 가시다. 최대한 손 조심하며 몸 사려가면서 가위질을 해도 어느새 가시에 찔려 손가락 아릿해진다. 곶자왈의 무뢰한 왕도깨비가지, 난생처음 희한하게 생긴 고약한 식물을 만나 목하 전투를 치르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한다면 부담이 돼 재미없겠지만 스스로 자원한 일이라 보람이라는 묘미도 느낀다. 숲에서 재잘거리는 새소리 들으며 수행하듯 왕도깨비가지 열매를 구도정신으로 따고 있는 중이다. 동안거 들어간 승려처럼 말이다.
제주섬에 와 일년살이를 시작했다.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곤 오로지 걷기뿐이라 한라산을 비롯 오름이며 올레길 걸어 다닐 요량이었다. 서귀포에 거처를 정하고 온데 사방으로 자재로이 쏘다니면서 맘 내키는 대로 제주 곳곳을 섭렵해나갔다. 일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갈 곳은 천지, 다시 한 해 더 연장한 지도 열 달 넘었으니 또다시 연장하면 삼 년째가 된다.
제주의 자연과 환경은 걷기 좋아하는 체질에 딱!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는 이대로 눌러살 참이다. 하여 스스로 건강관리 잘 해나가며 선물 같은 시간을 즐기고 있다. 서두에 걷기 타령부터 하는 것은 제주에 닿자마자부터 찾고자 했던 곳인데도 이제야 방문한 데 대한 민망함 때문. 본디 역사에 관심 깊은 터라 백 년여 몽고의 지배하에서 살았다는 제주 역사 자체가 수수께끼였다. 어쩌다 오랜 기간 동안 원의 직할지로 말을 풀어놓고 키우는 목마장 노릇에 일본 공략의 전략기지로 이용당했던 제주 섬이다
공민왕 때인 1374년 최영 장군에 의해 말 돌보던 몽고족이 벌인 목호(牧胡)의 난이 범섬에서 토벌될 때까지 숱한 고초를 겪었던 섬사람들. 당연히 항몽 유적지는 순위로 봐서 앞머리였으나 상그러운 교통편 핑계로 여타 명소들만 쫓아다니기 바빴다. 사적 제498호인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13세기 세계 제패를 꿈꿀 만큼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거의 정복한 강대국 원나라라는 몽고족과 삼별초군과의 마지막 항쟁터다. 이는 천여 년도 더 전인 1273년도의 일이다. 요즘에야 해외 노동자 되어 한국으로 기를 쓰고 몰려들 오는 몽고인이자 과거 변발족 몽고인데 정말로 인생사나 세상사 새옹지마다.
고려 고종 시인 1231년부터 원의 침략으로 왕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까지 하며 궁지에 몰린 고려 무인 가운데 배종손 장군이 나섰다. 그가 앞장서 1270년 군사를 규합해 삼별초군을 짜서 대몽 항전을 결의하였다. 세계 최강 군대를 맞서기엔 역부족, 삼별초군은 해전에 약한 기마병인 몽고 군사들 유인책의 일환이었던가. 배를 타고 진도로 가서 용장성을 근거로 항전했으나 1271년 진도에서마저 패했다.
이때 배중손 장군은 전사하고 김통정 장군이 잔여 부대를 진두지휘, 탐라로 들어왔다. 육지로부터의 뱃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애월 산지에다 결사항전의 터를 닦았다. 그렇게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대몽항전을 계속하던 중 1273년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성은 함락되었다. 삼별초군은 거의가 순의(殉義), 남은 얼마간의 군사들은 오키나와로 떠났다는데....
어쩌다 보니 하필이면 유난히 폭염 기세등등한 팔월, 비로소 시절 인연이 항파두리와 닿게 됐다. 택시에서 내리자 여전히 염제의 횡포 대단했으나 한라산 아래 울멍줄멍 솟아있는 뭇 오름 전망이 눈맛 시원하게 해줬다. 드넓은 광장은 연초록 잔디 정성스레 다듬어져 있었으며 둘러싼 왕벚나무 그늘 어둑신했다. 삼별초군의 푸른 결기와 붉은 단심이듯 순의문 앞에는 퐁낭 노거수 짙푸르고 배롱나무꽃 한창이었다.
자주 호국의 결연한 민족 의지가 혼불처럼 타오르며 새겨놓은 역사의 주요 페이지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찌는 듯 무더운 팔월 정오 무렵이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순의문을 지나 삼별초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항몽순의비 참배하고 경내 잠시 둘러보는 사이. 등에서 주르르 땀이 흘렀다. 쟁쟁 울리는 매미소리가 달궈진 태양을 한층 더 뜨겁게 했다. 이 터에서 산화한 삼별초군, 항파두리 마지막 항전터에 마련된 전시관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사실 너무도 더워서 냉방시설이 돼있는 공간으로의 도피 즉 피서 목적이 더 컸다. 뾰족한 돌조각이나 깨어진 토기 쪽에 기대는 고고학 발굴에 거의 가까운 항몽 격전지가 아닐까 싶었다. 땅속 파헤쳐 본들 유구 터에서 토성 규모 파악이나 간신히 될 듯, 아주 먼 고려 시대 유적지 그것도 급히 조성된 요새 자리다. 토성 사대문에 문을 달며 사용했던 돌쩌귀가 이끼 낀 퐁낭 앞 노지에 진열돼 있던 걸로 미루어 석물이나 그 세월 견뎌냈을까.
출토 유물이 별로 없으리라던 예측 대로였다. 전시품은 암막새 수막새 같은 기와 편과 바스러지다시피 잘게 조각난 막그릇 부스러기 외에 목조 구시통(물통) 일부분이 전부였다. 무너져 내린 성터 발굴을 통해 얻은 자료를 토대로 삼별초군이 어떤 방식으로 적에 대비하였나를 보여주는 실물을 벽 전면에 만들어놨다. 토성의 평면도와 횡종단면도가 그나마 여기 이르러 실제감을 갖고 다가왔다.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그림도 현장감을 덧보태줬다. 삼별초의 대몽 항전 결의도, 항파두리 축성도, 여몽연합군의 함덕포 상륙도, 최후의 혈전도 등 기록화 몇 점도 양 벽면에 걸려있었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는 영상 미디어물이 혼자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항파두리에 관한 영상물에 집중했다.
긴 시간 동안, 그 덕에 어느 정예 해설사보다 적확한 역사 해설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의 국제정세와 인과관계 나아가 후대에 전하는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피서하며 접하게 됐다. 영상물 목차는 고려와 몽골의 전쟁, 삼별초의 또 다른 전쟁, 몽골의 제주 지배 백 년, 과제와 교훈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13~14세기 고려와 중국 그리고 제주의 연대표에 주목했다.
고려 위쪽에 있는 몽골 대륙에서 전설적인 인물 칭기즈칸이 1204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어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 몽골국을 건설한 무패신화의 쿠빌라이 칸 시대가 펼쳐졌다. 전 세계를 제패할 듯 세력을 뻗어나가던 그들은 1231년부터 일곱 차례나 이웃나라 고려를 침공해 왔다. 1271년 세계 최강대국인 된 몽골은 원나라를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남송을 정벌하고 일본에 두 차례나 군대를 보냈으나 거친 태풍이라는 신풍, 기적 같은 가미카제 덕에 일본은 정복당하지 않았다.
현재 코리아로 불리게 된 근원인 고려국은 1206년에 건국하였다. 그 후 중국 대륙 제국들로부터의 침공은 견뎌냈으나 몽골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다 못해 1232년 개경에서 강화로 왕도를 옮겨야 했다. 몽골의 강압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약체 민족이 겪어야 하는 수난사 그 자체였다. 고려 원종 11년, 조정이 몽고군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하자 이에 끝까지 항몽 결의를 다진 이들이 있었으니.
강화에서 봉기한 무장세력인 삼별초군은 국난극복을 위하여 끝까지 자주적으로 결사항전할 것을 다짐했다. 그들은 고려군의 정예 별동 부대로서 고려 원종 11년 고려 조정이 몽골군과 강화를 맺자 이에 반대하여 반몽 항쟁을 선언하였다. 무신 집권자인 최우가 야간 치안유지를 명분 삼아 야별초를 조직한 것은 1230년의 일. 별초란 가려뽑은 부대를 뜻하는데 야별초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 확대시켜 삼별초가 되었다.삼별초는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다가 그 정권을 붕괴시킨 주체였다가 대몽항쟁의 주력으로 부상했다. 그들은 진도로 내려와 용장성에서 항몽 의지를 더욱 굳혀나갔으나 이듬해 여몽연합군에 의해 성을 함락 당한다. 이때 삼별초군의 중심이었던 배중손 장군도 전사했다.
김통정 장군이 잔여 부대를 이끌고 제주에 입도,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제주 북서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조망권 최대한 확보되는 데다 지리적으로 천연 요새터라 외성과 내성을 이중으로 설치했다. 그들이 제주도에 쌓았던 내·외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고토성 고장성 항파두리고성 애월목성 등이었다. 고장성은 오늘날 환해장성으로 불리는 석성으로 원래는 1270년 조정에서 김수를 비롯한 관군 풀어 삼별초의 제주 입도를 막고자 쌓았다. 별도포에 설치된 고장성을 이용,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의 진입을 막고자 석성 시설을 대폭 확장시켰다. 이 석성은 바닷가를 따라 둘러쌓았는데 둘레가 120여㎞나 됐다고.
항파두리고성 규모는 둘레 700m 정도이며 장방형의 석성으로 보이는 내성이고 성읍 전체를 두른 외성은 토성으로 길이가 6㎞에 달했다. 토성 위에는 재를 뿌려놓고 적이 나타나면 말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달리도록 하여 재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연막전술까지 폈다. 이처럼 철두철미 방비를 했으나 한꺼번에 1만 2천여 명의 대군이 병선 160척을 이끌고 추자도를 경유해 함덕포로 밀려 들어왔다. 결국 중과부적, 1273년 여몽연합군의 총공세에 제주성은 무너지고 삼별초군은 거의가 순절했다.
몽고군은 바닷길의 요충지인 제주의 입지조건에 혹해 1275년 탐라통관부를 설치한 뒤 실질적인 제주 통치에 들어갔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통정 장군 등 70여 명은 한라산으로 탈출, 3년간의 항몽 활동이 무위로 끝나자 장군은 붉은오름에서 자결한다. 몽골은 고려와의 연고권을 끊기 위해 제주를 탐라로 호칭하기 시작했다.(그렇다면 탐라라 부르기가 영 꺼림칙.) 또한 제주에 '탐라국 초토사'를 설치한 다음 육지와는 달리 관부를 두고 관인을 파견해 직접 지배에 나섰다.
몽골 지배하의 백 년, 처음엔 몽골말 160마리를 가져와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서 방목했다. 한편 일본 정벌을 위해 병선을 건조하였으며 섬에서 나오는 물자를 본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역참을 전라도 각처에 설치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 사망 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 균열과 라마승의 발호 및 자연재해 등으로 제국은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와중에도 몽고 황제 순제는 마지막 의탁처로 제주 서남부 지역 엉또폭포 인근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던 흔적을 남겨놨다.
마침내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군에 의해 원나라는 몽골고원으로 밀려났다. 고려는 1370년 명과 수교를 맺게 되고 국교 수립과 동시에 제주마로 인해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1374년 명나라에서 제주마 2천필을 요구하자 원나라 말을 적에게 보낼 수 없다는 목호의 반발로 겨우 삼백 필만 상납했다. 그즈음 공민왕은 제주말을 빌미로 명나라가 침입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다. 같은 시기, 몽골이 목마 관리를 위해 보낸 목호 세력은 난을 일으켰다가 고려의 최영 장군에 의해 범섬에서 소탕되었다. 그로써 1세기에 걸친 제주에 대한 몽골 지배는 종식됐다.
얼마 후인 1392년 조선시대가 도래했다. 이 역시 새옹지마 고사처럼 몽골의 영향으로 우마 사육이 정착되며 제주는 최대 국립목장지가 되었다. 그밖에 이제는 제주 전통음식으로 자리매김된 고소리술이나 상애떡 빙떡도 몽골 음식에서 유래됐다고. 여기까지는 전시관 영상 자료에서 발췌한 내용임을 밝힌다. 아무튼 삼별초의 대몽항쟁사는 국토와 백성을 유린한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일어난 병졸들의 대 궐기였다.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한 국가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내세워 세계 최강 몽골을 상대로 3년간 항전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삼별초의 독자적인 항몽 투쟁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려는 호국 충정의 발로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토성을 따라 걸으며 항파두리 유적을 찾아보았으나 장수물이고 구시물이고 도무지 만날 수 없었다. 안내 센터에 재차 문의도 했으나 이정표가 없어 찾기 어려울 거라던 말대로 실컷 헤매다 허탕치고 되돌아왔다. 하물며 살맞은 돌이라는 입석이야 1킬로 정도를 가야 볼 수 있다니 이 불볕에 더위 먹을 일이야 할 리 없고. 극락사 경내에 있다는 옹성물은 차밭골까지 갔다가도 길이 험해 더는 내려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참을성 있게 전시관 영상물을 보는 이도 드문 판에 김통정 장군이 관군에게 쫓기다 뛰어내린 바위에서 솟은 샘물조차 보기 어렵다니...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항파두리이나 진짜 볼거리와 만나기 이리 상그러운 데다 안내도조차 빈약하니 무엇에 중점 두고 운영하는지. 하여 드넓은 꽃밭 계절별로 조성해 사진 찍는 명소로 더 알려지게 되고 말았나 보다. 실제 이 정도 대규모로 어마어마한 유적지를 만들어 놨으나 실속이라곤 별로 없는 산책로 구실이나 할까. 세금 들입다 쏟아부은 요량하고는 명분 없기가 걷기 공원 수준이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겨우 꽃놀이나 하자고 예까지 왔나, 하는 아쉬움마저 이는 게 사실.
그 기분 상쇄하려 좀 전 전시관 영상이 던진 오래된 질문을 곱씹어 봤다. 1429년 해상문화를 꽃피웠다는 류쿠 왕국이 바다 건너 오키나와에서 건국되었다고 한다. 고려 유민들이 도래해 세운 왕국이라는 설이 제기된 데는 까닭이 있다. 1982년 우라소에 성터에서 발견된 기와에는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란 글귀가 박혀있었다. 계유년이라면 1273년 제주 항파두리에서 삼별초군이 최후를 맞은 그 시기다.
다른 하나는 1393으로 조선왕조 개국 시기다. 어디에서 흘러왔건 어느 한 곳에 정착지를 삼으면 어떻든 누구라도 먼저 거처할 집부터 세운다. 그가 기와 굽는 장인이었다면 흙을 개어 기와를 빚어 문양 새긴 다음 자신의 사인 넣은 다음 가마에 구웠으리라. 우연의 일치일까? 기와 무늬는 진도 용장산성 기와문양과 흡사히 닮았다고 한다. 말 못 하는 유물이 가끔은 이처럼 말을 건넨다.
역사란 미래를 향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하였다. 우라소에 성터에서 발굴된 와당을 만든 이는 고려적 어떤 유민일까. 패퇴한 삼별초군이 목선에 의지해 남으로 남으로 노 저어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생겨날 법도 하다. 나라 잃은 유민들이 봇짐 지고 북간도로 떠나듯 현대에도 더러 망명객 되어 제 나라를 미련 없이 떠나듯이.
토성 뒤로하고 숲길 걷는데 건공중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기를 쓰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소리쟁이 마른 대궁 긴 가지를 꺾어 거미줄 치우고 잠자리를 구해냈다. 거미줄에 뒤엉킨 은빛 나래는 마구 퍼득대느라 찢긴 채 여기저기 상해 있었다. 칡잎 위에 올려놨는데 기진맥진한 듯 잠자리는 얼른 달아날 생각도 못 했다.
모든 생명은 애틋하다. 포획망에 걸렸으니 그대로 두면 거미의 한 끼 식사감이 될 터다. 거미는 한 끼 굶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미안하지만 덫을 놓는 일은 죽음을 부르는 일이라 마뜩지 않아 잠자리에게 자유를 허해줬다. 조물주의 섭리에 반할지라도 항파두리의 비극을 되씹으며 걷던 중이라 생사에 어쩔 수 없이 개입했노라고 중얼거린다. 토성 주변 여기저기, 침략군에 항거하다 스러져간 그 옛날 삼별초의 넋인 양 망초 하얀 꽃들이 나붓거려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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