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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Aug 11. 2021

텃밭의 히트작

고추

 여름 말복을 넘긴 고추 모종이 수상하다. 장맛비에 여러 번 쓰러질듯 버텨내더니 잔 가지가 많아졌다. 고추가 거대한 나무로 보이기 시작했다. 헐렁했던 가지에서 한두 개 큰 고추를 조심스럽게 먹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 삽시간에 고춧잎이 많아졌다. 하마터면 밭을 찾지 못할 뻔 했다.

 

 대나무 지지대가 자꾸 쓰러지자, 로 된 지지대를 꽂아줘서 그런지 이젠 나무처럼 꿈적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지대보다 더 크게 자라서 고추 수확은 한결 수월해졌다.

 지난 오월 손가락 길이 만했던 모종이 어느새 내 허리만큼 자랐으니, 아이들 크는 것처럼 느껴졌다.


 추가 우리 네 가족수와  딱 맞으니, 고추하나씩 잡고 따는 재미가 생겼다. 가장 큰 고추를 따고 그다음 큰 고추를 따고 계속 가장 큰 걸 골라 따면 어느새 고추가 양손에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편이 고추를 한꺼번에 살피며 남은 큰 녀석을 찾았다. 늘 남편 눈엔 실한 고추가 남아 있었고, 월척을 잡은 듯 배시시 웃었다. 어느새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질렀던 탄성을 고추 앞에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고추가 길어지고 고추잎은 무성해진다
헐렁했던 고주 가지가 빽빽하게 촘촘해진다

 고추를 수확하면 왠지 마트에서 사 먹는 고추값과 비교하게 된다. 8개 남짓 담긴 일반고추 봉지가 삼천 원 정도 하니  '이야!' 소리가 절로 다.


"이거 사 먹으려면 얼마, 여보 지난번보다 더 많이 달렸다. 그렇지?"

"그것 봐 내가 고추 심자고 했지!"

"그러게 말이야."


 남편이 텃밭에 고추를 심으라고 했으니, 실컷 우쭐한 기분을 들어주기로 했다. 나란히 자라고 있는 깻잎까지 남편이 심자고 했으니 다행이었다. 여름 텃밭을 지키며 지난번보다 더 많이 자란 고추에게 고마웠다.

 

 고추를 다 따고 나면 고마움에 대한 보답처럼 집에서 준비한 쌀뜨물을 충분히 줬다. 그리고 하얀 고추꽃이 몇 개나 달렸나 어림잡아 세어보기도 했다. 밭은 반절은 비었고 남은 건 깻잎과 고추뿐인데 봄 텃밭처럼 여전히 분주했다. 수확할 것이 많으니 손이 즐거웠다.

 게다가 흙을 만질 일이 거의 없었다. 잡초들도 더위에 지쳤는지 더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흙을 만지지 않는 밭에 고추 따기는 팝콘 먹으면서 영화 보는 것만큼 신이 났다.


도통 익을 생각이 없는 토마토

 잡지와 책에서 텃밭 이야기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텃밭을 하면 예쁜 장화를 신고, 영국산 정원용 앞치마에 꽃무늬 장갑을 낀 손으로 앙증 맛은 소쿠리 양동이를 든 모습을 꿈꿨지만, 역시 본모습을 쉽게 바뀌지 않았다.  

 나는 큰 숄더 백안 늘 뒤죽박죽이어서 물건을 찾을 때마다 시간이 좀 걸리는 스타일이다. 그런 내가 텃밭을 갈 땐 까만 장화에 맨손으로 매번 재활용하고 있는 큰 지퍼백을 여러 장을 들고 녔다. 자 텃밭을 가는 길에 홀가분함을 더 즐거워했던 건지 모르겠다.

 

 한 번은 긴 머리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대나무 소쿠리를 들고 텃밭의 바질과 토마토 수확하는 여자를 보 감탄한 적이 있다. 바질 잎을 자르는 손은 손잡이가 예쁜 가위가 들려 있었는데, 매번 가위와 칼을 챙겨 가는 걸 빠뜨리는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녀가 수확하는 모습은 사진을 찍어도 작품이 될 듯 폼이 났다.

 내 밭 토마토는 익지도 않는데 그 밭은 익지 않은 것보다 익은 것이 더 많아 보였다. 난 푸성귀만 잔뜩 심었지만, 그녀 밭엔 예쁜 봉선화도 피어있었다. 을 좋아하긴 해도 그녀처럼 여유와 멋을 부릴 줄 모르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추를 따다가 '이게 뭐람?' 그냥 심술이 났다.

잠깐 앉아 고추꽃 구경하며 그녀가 어서  수확을 마치고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쿠리 한가득 수확을 마친 그녀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 어쩜, 고추를 이렇게 잘 키우셨어요? 전 고추 모종 다 버렸지 뭐예요. 너무 잘 키우셨다."

얼른 답을 못하고 난 얼굴이 빨개져버렸다.

"안 그래도 밭마다 고추 망쳤다고들 아쉬워하는데 부러워요!"

"감사합니다."

 

 갑자기 들은 칭찬에 어깨가 우쭐해졌다. 여름 동안 나는 고추를 잘 키우는 밭주인으로 인사치레를 많이 받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밭엔 고추가 많지 않았다. 고추 모종을 가장 늦게 심은 밭이라 크는 것도 더디기만 했지만, 여름을 보내며  다른 밭에는 고추가 거의 남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우리 밭은 고추가 텃밭의 히트작이 되었다.
수확한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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