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핀 버몬트 숲에서 타샤를 만나다

겨울을 견디는 힘

by 무쌍


내겐 꽃이 글인 것 같고, 책이 꽃다발 같다. 종이에 쓰인 글자들이 빽빽한 책 한 권이 내겐 꽃다발처럼 위로가 된다. 집안에 가만히 지내며 환자 노릇을 할 때가 있었다. 갇힌 시간에 유일한 즐거움은 책 읽기였다. 책을 읽는 일에 빠졌을 땐 날이 저문 늦은 저녁이나 가족들이 잠든 새벽에 일어나 두어 시간씩 읽었다. 매일 챙겨 먹는 약처럼 책을 늘 두고 살았다.


몬트 숲 속에 사는 한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그림과 글을 남긴 동화작가면서 삽화가였다. 버몬트의 숲 안에 넓은 자신의 땅에 집을 짓고, 18세기에 살던 사람처럼 실을 뽑아 옷을 만들고, 양초를 손수 만들고, 감자를 직접 심어 키우고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던 타샤 튜더였다. 그녀가 그린 그림으로 돈을 벌어, 물감과 종이를 샀으니 사실상 그녀는 손수 자신의 삶을 일구었다고 볼 수 있겠다. 마치 그녀가 꽃 그림을 그리기 위해 꽃을 키우고, 모든 계절을 글로 쓰기 위해서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그녀가 부러웠다.


나는 한 번이라도 그녀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그녀가 부러운 건 계절마다 황홀해지는 정원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꺼내어 쓰는 삶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타샤 할머니가 몸소 모든 걸 해내는 모습을 지켜봐 온 건 바로 그녀의 자식들이었다. 자녀들이 말하는 엄마는 드 넓은 대지의 단단하고 착실한 땅처럼 늘 생산적이고 건강했던 것 같다. 큰 대지가 품은 자연처럼 자식들을 키우며, 손수 그린 그림으로 책을 탄생시켰다.


삽화가로 오랜 활동을 한 그녀는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이 쓴 <비밀의 정원>에 삽화를 그리면서 명성은 더욱 빛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그림 속의 인물과 동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사랑스럽고 로맨틱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보는 시선을 그림으로 고스란히 담았기 때문인 듯싶다. 그녀가 꿈꾸는 삶은 그림 속 인물에 부드럽게 날리는 머리카락 한올처럼 자연스럽고 실감 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손에 뭍은 흙이나 풀 진액이 바로 증거들이었다. 손으로 만지고 느낀 대로 그림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에 순응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녀가 험한 대로 그린 것처럼 보였다.


2022.12.14

함박눈이 내렸다. 뿌연 먼지를 머금은 눈은 온 세상을 더 신비롭게 만드는 듯했다. 그동안 미루던 화분 정리를 해야 했다. 토마토는 바짝 마른 가지에 달린 초록 토마토, 여러 번 잘라먹은 대파 뿌리, 꽃씨를 받으려고 남겨둔 나팔꽃 덩굴도 손에서 바스락 거리며 부서졌다.


밖은 더 절망이다. 침묵하는 겨울엔 꽃이 더 그립다. 그래서 타샤 할머니가 더 생각이 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겐 사랑초가 남았다. 베란다 창으로 내리쬐던 태양은 정말 작아졌는지 사랑초 꽃송이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작년에도 베란다가 온실처럼 지켜주었으니 걱정은 없다.


"뒷문에는 눈이 쌓여 있고, 앞쪽에는 스노드롭이 꽃을 피우고 있어요."

하지만 타샤는 꽃송이가 피어날 희망만으로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겨우내 언덕 위 작은 온실에서 그녀의 영혼이 풍성해지고, 그림을 그릴 꽃들이 자라난다.
온실에 있는 화초 중 타샤가 유독 좋아하는 것은 동백꽃이다. 그 섬세한 색과 극적인 움직임에 이끌려 타샤는 믿기 어려울 만치 탐스럽고 복슬대는 귀한 동백들을 모아놓았다.
타샤는 온실에서 따온 동백꽃을 눈에 잘 닿는 곳에 놓아둔다.

-타샤의 정원 (버몬트 숲 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

이맘때면 버몬트 숲 속에도 눈이 내리고 정원은 새하얀 세상 이 되었을 것이다. 타샤 할머니는 겨울이면 온실로 꽃들을 옮겨 심어 두고, 봄을 기다렸다. 초봄 가장 먼저 스노드롭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수선화가 만발해지면 온실에서도 장미처럼 프릴 장식을 한 동백꽃이 피어났다.

타샤 튜더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첫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가 열리던 날 그녀는 엄마와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이 할머니가 된 지금 세상에 없는 그들을 초대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은 날에 그녀가 그린 그림들을 시원치 않게 여겼던 가족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도 마음 한 구석엔 자신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외로움을 견뎌야 했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겨울을 견디는 법은 내게도 유용한 조언처럼 느껴졌다. 겨울이 없이 봄이 오지 않는 것처럼, 마침내 꽃이 피는 것은 차디찬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원 일을 돌보지 않아도 온실을 바쁘게 다니는 타샤를 떠올렸다. 저녁이면 벽난로에 앉아 씨앗 구매를 위해 원예 책을 보거나, 봄에 심을 구근을 얼마나 살지 궁리했을 할머니를 말이다. 나의 겨울도 그녀의 겨울처럼 흘러간다.

제주에 핀 수선화(2018)

울에도 꽃이 피는 제주에선 지금 동백꽃이 한창인가 보다. 꽃들은 정말 시간을 잘 지킨다. 타샤가 있는 버몬트에선 3월이 되어야 볼 풍경이지만, 제주에 사는 꽃 친구들이 막 피기 시작한 수선화 사진과 동백꽃 사진을 찍어 올린다. 예전에 찍어둔 꽃 사진을 꺼내 보며, 타샤의 정원에 실린 꽃 사진을 찾아보았다. 동백꽃 사진을 보며 나는 그녀의 온실로 관통한 길을 걸어 들어간다.

제주에 핀 동백꽃(2018)

바람이 부는 정원에서 수선화 꽃을 잘라오고, 온실에서 동백꽃을 잘라와 꽃병에 꽂아 두는 그녀를 따라갔다. 의자에 앉아 깨끗한 종이를 꺼내고 물감을 묻힌 붓을 움직이면 나도 그 옆에서 글을 쓴다.


밖은 추운 겨울이지만, 온실에서 동백꽃이 피기를 기다리던 그녀에게 그림 그릴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마치 알람이 울리듯 꽃이 말을 건넨다. 제주에서 온 동백꽃 소식에 어서 글을 쓰라며 나를 재촉한다.



keyword
이전 02화겨울 눈꽃이 핀 콩코드에서 소로우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