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초가 있는 집에서 에밀리 디킨스를 만나다

작은 화초의 위로

by 무쌍

화분에 물을 주듯 채워진 노트에 눈길을 부었다.

매일 쓰기를 멈추지 않고 싶어서 노트를 뒤척였다. 노트는 다 채워졌는데 써놓은 글을 다시 보니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얼굴을 내밀지 않아도 되고 소리를 내서 말하지 않아도 되기에 글쓰기를 만만하게 보았나 보다. 거짓을 쓰지 않으면 될 것이고, 공개를 할지 말지는 언제든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말하지 못하고 속병이 난 것인지, 갑상선이 망가지고 나지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 게다가 글쓰기가 도와준 덕분에 속마음이 들키는 일이 익숙해지기도 했다.


'뭐야. 내가 이런 사람이란 말이야?' 나 자신도 당황스럽고 아찔했다. 감추고 있던 돌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이다.

글을 누가 쓰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술술 자백하고 있었다. 부족한 것이 더 선명해졌다.


누군가가 '그게 될 것 같아?'라고 묻지만, 멈추기 버튼처럼 꺼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버튼을 누르기까지 망설이는 나를 인정해야 했다. 글로 써버린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건 한계가 있었다.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땐 집안 화초들에게 말은 건다. 시든 잎을 잘라주면서 한숨을 내쉬고, 돋아난 새 이파리를 보며 웃었다. 한결같이 꽃을 보여주는 고마운 친구도 있다. 심술 난 채 뿌루퉁한 얼굴을 내밀어도 귀찮아 하기는커녕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었다.


한파경보가 내린 1월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했다. 신혼집을 꾸밀 때 화초를 가장 먼저 골랐다. 아파트 베란다지만 작은 정원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겨울이라 고를 수 있는 화초는 많지 않았다. 서툰 살림에 화초들도 적응을 못했는지 얼마 못 가 거의 죽어버렸다. 작년까지 산세베리아와 사랑초는 매년 결혼기념을 함께 했지만, 산세베리아가 뿌리가 눈 녹듯 물러지더니 영영 떠나버렸다. 과습, 지나친 물 주기가 문제였다.


올해 결혼기념일엔 사랑초만이 유일하게 남아 우리를 축하해 주었다. 나비 날개처럼 보이기도 하고 큰 클로버 같기도 한 잎은 참 앙증맞다. 땅콩같이 생긴 덩이뿌리에서 솟아난 빨대 같은 줄기 끝에 꽃이 피듯 이파리가 달린다. 해가 뜨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쳐졌다가 저녁이 되면 꽃봉오리처럼 오므라들었다. 저녁엔 잤다가 아침에 일을 하는 우리처럼 말이다.

잎을 따서 물에 꽂아두면 뿌리를 내리고 번식을 할 수도 있다. 생장이 끝난 잎은 바짝 말라서 아래로 축 늘어진다. 죽은 잎을 손질해 줄 때마다, 희한하게도 내 머리카락에서 찾은 흰머리를 자르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사랑초가 나 같고 내가 사랑초 같아서 인 듯싶다. 꽃은 해가 드는 방향으로 피고 꽃다발처럼 여러 송이를 한꺼번에 만들어두고 차곡차곡 꽃잎을 펼쳤다.


연보라색 꽃은 돌돌 말린 채 아침 태양에 고개를 들며 피고, 시들어 갈 때는 꽃잎을 한 장씩 뒤로 말아갔다. 서두른 적 없는 꽃은 차분하고 단정한 기품이 느껴졌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면 사랑초가 차란 차란 거리며 바람마저 우아하게 바꾸어 놓았다.


아무 일 없이 베란다에 나갔다가 사랑초꽃을 보면 가슴 어딘가 편안해졌다. 그래서일까? 아이들도 꽃 앞에선 투덜거리지 않았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아이가 친구들에게 사랑초꽃이 피었다고 자랑했는데, 아무도 그런 꽃이름은 없다고 믿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이름을 지어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참 지난 일인데도 아이는 사랑초 꽃을 보면 떠오르는 듯 하지만, 아이가 사랑초를 아끼는 마음은 더 깊어진 듯했다.

문득 사랑초의 영문 이름이 궁금해져서 검색하다가 꽃말을 할게 되었다. 꽃말이 참 놀라웠다.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사랑초를 살 때 이 꽃말을 알았다면 키우는 걸 좀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다. ^^: 나를 버리니 않은 꽃이라니 참 의미심장한 꽃말이었다.


몇 해전 겨울이었다. 새벽에 한파가 찾아와 영하로 떨어졌다. 베란다에 냉해를 입은 화초들 중에 사랑초도 포함되었다. 삽시간에 잎을 떨어뜨리고 죽은 듯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거실로 옮겨놓았다면 얼어 버리지 않았을 텐데 미안했다. 다시 봄은 찾아왔고, 빈 화분이 된 줄 알았던 흙위로 작은 싹이 솟아났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랑초가 겨울잠을 잔 듯 예전 보다 더 풍성하게 잎들이 돋아났고,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사랑초는 꽃말 대로 나를 버리지 않았다.




시인 에밀리 디킨스의 집을 소개한 책을 보게 되었다. 그녀가 살았던 집은 '디킨스 홈스테드'박물관이 되었고, 세상에 없는 그녀를 대신해 자원 봉사자들이 정성껏 정원과 온실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을 시로 썼던 그녀는 정원에서 나고 자랐고 평생을 함께 했다.


그녀는 없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간을 그대로 품은 그녀의 집과 정원 그리고 실내 온실은 보존되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책 속에서 낯익은 화초를 발견했다.

바로 사랑초(옥살리스 oxalis)였다. 내가 키우는 사랑초가 그녀의 온실 정원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사랑초에 관한 이야기도 읽을 수 있었다.


옥살리스(사랑초)가 있으면 여기는 언제나 여름이었다. 옥살리스가 집안 식구들과 집에 자주 놀러 오는 이들 머리 위로 떠도는 소박한 향처럼 위에 걸린 바구니에서 향이 퍼져 내렸다.
마차 맥다월 <에밀리 디킨스, 시인의 정원> 중에서


정원은 온 가족이 돌봤다면, 온실은 그녀만의 영토였다. 집안에만 칩거했던 그녀를 위해 아버지가 남동쪽에 온실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아침해가 떠오르고 일 년 내내 따뜻한 빛을 받을 주 있는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온실을 좋아하던 그녀는 ' 아주 작긴 하지만 당당하다'라며 자신의 온실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십 년을 넘게 살던 집을 떠나올 때 은근히 걱정했던 건 집안의 화초들이었다. 새집에서 그녀처럼 사랑초와 다른 식물들을 잘 키워 낼 수 있을지 말이다.


이사 온 집은 낯설었지만 남쪽으로 난 통창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겨울 해는 내게 뜻밖에 선물을 주었다. 남향집은 내게도 온실을 쓰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겨울 동안 연보랏빛 사랑초꽃을 보며 지난 에밀리 디킨스의 시를 읽으며 황홀해졌다. 여름을 보낸 베란다는 사랑초가 가장 소박하다. 꽃은 피지만 힘이 넘치는 것 같지 않았다. 매일 같은 날을 보내는 나의 일상처럼 비슷한 차림으로 말이다.

시든 잎을 정리해 주고, 흙을 정리하고 비료를 넣어주었다. 곧 겨울이 오니 이불처럼 덮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에 살던 집에선 겨울이면 사라졌다가 봄이 되면 싹을 올리며 지냈는데, 남향집에선 절대 시들지 않는다.

에밀리 디킨스의 온실처럼 말이다.

오늘도 잊지 않고 꽃대를 올려 나를 응원하듯 내게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날마다 사랑초가 에밀리 디킨스인 것처럼 나의 사랑초에게 말을 건넨다.

말을 건넬 엄두도 나지 않는 대단한 시인이며 정원사인 그녀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디킨스 당신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꽃이 내 문장에서 피어났으면 해요.


집안에서 은둔했던 그녀처럼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모든 것을 갖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것들이 있는 집 혹은 작은 온실을 나도 갖고 싶은 걸까? 그러고 보니 그런 집에 살고 있는데도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 되지 못해서 투덜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게는 작지만 당당한 사랑초가 있어 다행이다. 오늘도 사랑초에게 응원을 받았다.

keyword
이전 06화백일홍이 핀 몬타뇰라에서 헤세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