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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Apr 04. 2024

감정을 느끼는 곳으로 가는 너에게

개나리

  봄은 꽃을 파도처럼 내보낸다. 나무가 차례대로 꽃을 피우고, 바닥은 야생화들이 제멋대로 색을 바꾸고 있으니 도시의 야생화 지도가 다채로워지고 향기가 뒤엉켜 들뜬 마음은 광폭으로 뻗어간다. 

식물이 자라는 장소라면 나무든 풀포기든 꽃이 달려 지도도 필요 없고 어디로든 가도 좋았다. 맘때면 꽃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될 만큼 풍족함이 느껴지는 것 같.


꽃은 보고자 하면 어디서든 피어있다.


매화가 떠났다. 진달래도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잎도 새 가지도 내밀기 전에 꽃부터 피우는 날의 나무들을 보면 하룻밤에 훌쩍 떠나지 않기를 빌었다. 긴 겨울을 견디며 침묵 속에 건져 올린 책 한 권처럼 세상에 내보이는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을지 두고두고 천천히 보고 싶었다. 하루하루가 더디다 싶다가도 서둘러 가버릴 꽃들이 아쉬워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도 많았다.


 목련꽃잎이 낙엽처럼 쏟아지고 시든 매화꽃이 뿌려진 자리는 보라제비꽃이 받들고 있다. 진달래가 시든 뒤로 개나리초록빛 신엽이 돋아나 노란색이 절반만 남았다.   벚꽃이 피니 도시가 온통 액자처럼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 많아졌다. 꽃을 보느라 고개를 더 이상 숙이지 않았다. 나무는 나를 바닥으로 더 내려가지 말라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는 듯 일제히 찰랑거리고 다.


 봄 표지판을 든 태양은 밝고 부드럽게 꽃밭을 쓰다듬시끌벅적 야생화들을 한꺼번에 출발을 시켰다. 변화무쌍한 모든 것을 다 꺼내놓아도 좋다고 허락받은 자연은 작년보다 더 애를 쓴 작품을 쏟아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했을까.


 한걸음 한걸음 직접 걸어 다니며 야생화 지도를 만들었지만,  뒷 주머니에 감추고 말았다. 발이 닿는 대로 디로 가든 로 핀 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할 필요도 없고, 찾아갈 필요도 없어졌다. 온 사방이 꽃이다. 핑계를 찾은 건지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 지도를 그리는 일도, 계획을 세우는 일도 지쳤었나 보다.  


향수병에 걸린 듯 나를 받아줄 장소를 찾고 있었을까?


 한껏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어른이 되어도 자유는 없었다. 돌아갈 고향은 멀어지고 지금 내가 사는 곳이 고향이 되었다. 언제든 찾아가면 텅 빈 마음이 충만해지는 고향 같은 장소를 그리워했다. 과수원 가는 길에 보았던 야생화들을 되살려가듯 나는 도시에서 야생화들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솟구치는 감정들을 하나씩 번역하듯 꽃지도를 그렸다.


나만의 비밀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즐거움이 되었고, 긍정적인 마음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었다. 그렇게 '즐거운 장소'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엄마라는 역할은 환경에 늘 제약이 따른다.

해를 거듭하면서 아이들은 업그레이드를 하지만 나는 변신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하룻밤 깊은 수면이 다음날 상냥한 나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잠만 잘 수 없듯 꽃을 좇는 일도 계속할 수는 없다. 겨울이 있기도 하지만 쫓기듯 시간은 늘 내 편이 아니다. 그래도 꽃이 많은 계절엔 잠깐 고개를 돌려 꽃 한 송이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삶은 족했다.

찾아갈 즐거운 장소가 있다면
 나는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꽃이 없을 때도 생각만으로 야생화 지를 떠올리면 그것도 즐거움이다. 그래도 즐거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야생화 지도에 담아둔 꽃 사진을 이용한다. 찍어둔 사진은 시공간을 넘어 꽃이 핀 장소로 나를 데려다. 꽃사진을 보면 행복이나 감사한 마음은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렸다는 걸 확인한다.  


 망설이다 계절을 따라가지 못해도 지도는 다음 기회를 예상하게 해 주었다. 내가 즐거움으로 둘러싼 곳에서 잘 지내고 있음을 이다. 지도의 장소로 직접 찾아가고 말고는 선택사항이지만 언제든 그곳으로 갈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도시의 야생화 지도, 그 끝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즐거운 곳이라는 선언이 될 것이다.


꽃을 보러 다니는 즐거움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탐닉했던 놀이었다. 사방이 숲이었던 귤밭에서 혼자 놀던 나. 엄마 노릇을 하느라 집 주변을 서성이는 나는 한 선상에 있다. 일탈이 허용되지 않고, 겁이 많았던 아이가 자연에서 누렸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지금 나는 언제든 즐거움을 만끽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분명한 것은 없다. 매번 똑같은 법이 없고, 또 약속을 지키듯 나타나는 꽃들을 보면서 저 멀리 고향에서 지냈던 나의 시간에도 그런 풍경이 남아있겠지 싶은 것뿐이다. 


해가지고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아이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어서 빨리 흘러가면 좋겠다. 계속해서 저녁이 오길 기다렸다. 그날의 시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다림이었고 아무런 대가도 없었다. 1분 1초가 너무 길어서 시간을 잊어버린 듯 감각도 사라졌다.


아무도 봐주지 않은 야생의 풀을 찾아서 내 마음대로 꽃을 꺾어서 수프를 만들 건, 꽃다발을 만들건, 색깔 수집을 하던, 풀밭에 누워서 잠들 건 항상 태양이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시계를 볼 줄 몰랐다. 겨울엔 할머니 집에 갇혀 그림책을 보다가 잠들다 깨곤 했던 기억이 지금 나를 이곳까지 끌고 왔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혼날 짓을 하지 않고 조용히 보내는 법은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면 나는 행복해졌을까?


 

 도시의 야생화 지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 돌아가 어린 시절의 감정 지도를 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출발은 그랬지만 어느 순간 나는 나의 삶을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매일 매주 나는 집 밖에서 꽃을 보는 시간을 보냈고, 기록은 사진이 되었다. 일부러 내 사연을 들추지 않아도  일상은 꽃들과 함께 글이 되어 갔다.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진부하거나 지루한 곳은  설거지를 하는 싱크대 주변 세탁기 주변인 것 같았다.


 나는 왜 집 밖에서 행운을 불러오고 신선한 기분을 느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있을 때 얼마나 새롭고 성장한 느낌을 받는지 나는 안다. 기대하지 못했던 기회들을 찾았고,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매일 무엇을 쓸지 궁리한다. 야생화들을 따라다니면서 공상과 영감을 오간다고 믿었지만 늘 딴생각을 한다. 뭔가 간지럽히며 글로 써놓지 않으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았다. 오락가락하는 마음으로 적어둔 글을 읽으면 건조되지 않은 수건처럼 축축하고 냄새가 났다. 족들이 만들어 놓은 탁물을 모으러 다니다가 다시 글을 매만진다.


글쓰기는 순간순간 방해하는 것들과 실랑이를 하며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었다. 같은 시간 같은 행동들로 인해 쓰는 일은 자꾸만 어긋났다. 봄이 와서 더 그렇다. 꽃이 없던 겨울에 다 써놓았어야 하는데 꽃지도 때문에 마음이 온통 꽃밭에 있다.


 결국 용기를 내서 대단치는 않지만 나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다. 내가 한때 성공을 좇아 걸어왔던 고된 길을 말이다. 비록 특별하진 않을지라도 그 길을 따라 힘겹게 걷고 있을 다른 고행자들에게 조금이나 격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내 안의 빨강머리 앤>의 서문에 실린 글이다. 그녀의 험한 길에 다한 소외가 담겨 있는데, 책은 마흔세 살의 그녀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는 말년에 정신적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무단으로 출판하고 허락 없이 저작권을 판 출판사와의 소송으로 남은 생을 힘들게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도 인간이고, 인간은 살아가며 누구나 우여곡절을 겪는다. 험난한 길을 선택하는 건 나지만 우여곡절은 나의 선택과 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가의 이야기를 내 것처럼 품고 집을 나섰다.


무슨 꽃을 보러 갈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산책이 길어졌다.

화단 끝에 다다르면 노란 개나리 담장이 나를 막아섰다. 다시 뒤돌아 중랑천을 향했다. 정처 없이 걷는 내게 곧바로 길을 따라가라면서 벽을 치고 나를 막는다. 동네로 돌아왔지만 집 근처 화단에 노란 개나리가 나를 막아섰다. 가는 곳마다 개나리가 있었다.


아이가 돌아 올 시간이었다. 한동안 가지 못했는데, 시간 맞춰 마중을 나갔다. 학교 담장을 따라 노란 개나리가 아이들을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한눈에 나를 알아본 아이는 한껏 들떠 있었다.


"엄마! 엄마한테 줄 게 있어!"

아이는 가방을 열더니 뭔가를 찾는다. 그리고 내 손위에 올려놓았다. 작고 노란 개나리 꽃잎이었다. 시든 꽃잎은 생기는 없지만 노란색의 선명하게 드러난 있는 그대로였다.


"아침에 내가 주운 거야. 아직도 노랗지?"

 아이는 가방을 내게 맡기고 떨어진 개나리 꽃잎을 모으기 시작했다. 내 손에 있는 개나리 꽃잎은 점점 많아져 손바닥이 노랗게 물들어 갔다.


그렇다! 우리는 글로 쓰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순간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지도를 그린다고 했을 때, 나침반을 보며 어디로 전진할지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감정이란 나침반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때였다. 흔들리는 나를 개나리 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써야 한다는 조바심과 마음을 졸이며 꽃을 좇았던 나를 아이처럼 쓰다듬어 주었다. 침내 나는 노란색을 좋아하던 아이를 기억해 냈다. 꼭 닮은 아이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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