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언제까지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스승의 날이 되면 교탁에 선물을 탑처럼 쌓아 올려두던 풍습. 영화 <비밀의 언덕>에서 주인공 명은이가 정성스레 포장하던 선물이 선생님을 위한 물건임을 알았을 때, 불현듯 중1 스승의 날이 떠올랐다. 스승의 날이 월요일이었는지 선물 준비에 쓸 시간이 넉넉했다. 돈은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시장에 있는 선물가게에 가서 손수건을 샀다. 다년간 새 학기마다 교과서 표지를 싼 경험에 비추어 네모난 케이스에 든 손수건을 포장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작고 납작한 선물이 다른 선물들에 밀려 선생님의 눈에 들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정성스레 쓴 편지도 넣었는데, 그 편지를 읽고 미소 지을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반배치고사를 잘 쳐서 아빠의 과한 기대(늘 그랬지만)를 안고 시작한 중학교 생활은 4월 월례고사 성적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예쁘고 젊은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 "아버지는 기대가 크시던데 이러면 어떡하냐."며 웃는 얼굴로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대체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집에서 보내는 학원에 가거나 교과서 위주로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거니까 물어봤자 헛수고.
다행히 교육열이 높은 동네가 아니라 중간고사 성적이 그럭저럭 괜찮아서, 나의 구겨진 이미지도 좀 펴졌을까 싶던 5월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여중이라 친구도 거의 없어 내가 나댈 분위기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잠깐 친했던 두 명이 나와 같은 반이 되었는데 둘 다 몇 달 사이에 날라리가 되어 나와는 멀어졌고, 어쩐지 반장 부반장이 된 아이들은 때깔이 달라 보였달까.
내가 중간고사를 잘 치자 근처에 앉은 아이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70점을 넘기지 못하는 아이들의 엉덩이를 때리는 수학 선생님이 있었는데, 기계적으로 회초리를 휘두르는 선생님의 표정과 너무 비장한 얼굴로 체벌을 받는 짝꿍의 얼굴을 본 내가 피식 웃어버려서, 잠깐 따돌림을 받았지만.(어이구...) 지금 이야기하려던 건 그게 아니고!
선물탑에 놓일 나의 작고 소중한 손수건이 눈에 띄었으면 해서 이런저런 궁리로 포장하고 뜯기를 반복, 결국은 포장지가 모자라는 상황에 이르렀다. 밀키스처럼 반투명하고 매끄러운 포장지에는 초록색 나뭇잎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짙은 무늬의 손수건이 비치지 않도록 종이와 포장지를 여러 겹 풀과 테이프로 붙인 포장은 우글쭈글 지저분했다. 다른 선물들과 함께 내 선물도 교탁에 올렸다. 몇 개의 포장을 풀고 선생님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반듯반듯한 직사각형 상자들, 윗부분을 반짝이는 리본으로 묶은 둥그스름한 물건들 사이에서 내 손수건은 선생님의 눈에 들지 못했다. 다른 선물을 뜯는 데에 조금 방해가 되어 슬쩍 더 옆으로 밀려났을 뿐.
그 선물들을 다 뜯었던가? 시간도 많이 걸릴 테니 그러지는 않았겠지. 선생님은 행복했겠지? 선생님의 선택을 받은 좋은 선물을 가져온 아이들은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기쁨으로 마음이 부풀었겠지? 선물을 가져오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겠지? 선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던 아이들도. 그리고 나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려 애쓰고, 서운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쓴 아이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