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마살 Apr 20. 2020

걷지 못하게 된 건 처음이라



중환자실에서 나와서 일반 신경외과 병실로 옮긴 후, 신경외과 병동 1주, 재활의학과 병동 2주, 총 약 3주간을 수술을 받은 병원에 입원 해 있었다. 그 후에는 재활에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병원 재활병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병원을 옮긴 후의 기억은 거의 다 나는데, 첫 병원에서의 기억은 흐릿하게 장면 장면으로 짧게만 남아있다. 하루의 반 이상을 잠만 자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가끔 이 때를 떠올리면 하염없이 긴 시간이었던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던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내 인생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이 때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기억을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한다.


가장 먼저 기억나는 건 내 손이다. 하루는 엄마 지인이 병문안을 오면서 버거킹 세트를 사다 주셨다. 엄마는 지인과 얘기를 하러 병실을 나가고, 나는 종이 봉지에 든 감자튀김을 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침대의 경사를 조금 높인 상태, 그러니까 거의 누워 있는 상태에서 감자튀김 봉지를 몸 위에다가 세워놓고 오른손으로 먹으려다 보니 감자튀김이 든 봉지가 자꾸만 옆으로 쓰러졌다. 왼 손으로 봉지를 지지하고 싶었는데 왼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내 왼 손을 내려다봤는데 정말로 손이 죽었다고 느꼈다. 쓰지 않아서 작고 얇아지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손바닥 윗부분, 손가락 마디가 시작하는 부분이 푹 꺼져 있었다. 그 죽은 손의 이미지가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두 번 째는 내 몸을 침대에서 들어서 휠체어 위에 얹어 놓는 ‘포대기 기구’에 관한 기억이다. 나는 혼자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고, 키 또한 170이 넘는 거구(?)였기 때문에 침대에서 휠체어로 내 몸을 옮기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활 치료를 받으러 가기 위해서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은 휠체어에 올라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포대기 기구’가 필요했다. 포대기 기구의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침대에 불가사리처럼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으면 파란색 천을 내 다리 사이와 등 뒤로 밀어 넣는다. 그런 다음 기계에 고정 된 천을 들어 올린다. 기계를 들어 올림에 따라 천 속에 들어가 있는 내 몸이 딸려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 기계 방향을 조정해서 내 몸을 휠체어 위에 고이 올려놓는다. 30분짜리 물리 치료를 받기 위해서 그 포대기 기구와 20분 정도 씨름해야 했다. 당시 나는 하루 종일 누워 있어서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멀미가 났는데, 그 기구를 타고 들려지는 내내 멀미가 나서 토할 것 같았다. 치료 보다도 그 기구를 타고 휠체어에 올라가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 파란색 포대기 기구를 생각하면 아직도 멀미가 난다.


공포의 포대기 기구



세 번 째는 소변줄에 관한 기억이다. 소변줄은 의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한 번 느껴지는 순간 불편한 감각이 계속 느껴지는 것 같은 느낌적은 느낌이 계속해서 느껴지는, 마치 원효대사 해골물같은 존재다. 위에서 말한 포대기 기구를 타고 휠체어에 얹어지면 소변줄이 이리저리 꼬였다. 엄마는 곁에서 소변줄이 뽑힐까 봐, 막힐까 봐 이리저리 바빴다. 막상 나는 한 번 포대기 기구를 타면 멀미가 나서 소변줄이 꼬이든 말든 머리를 어딘가에 기대고 있어야 했고, 계속해서 내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소변줄을 이리저리 돌리는 엄마 때문에 더 멀미가 나서 짜증이 났다. 소변줄은 처음엔 그냥 꽂아 놓고 소변이 통에 차면 그걸 발견하는 누군가가 통을 비웠다. 한 일주일을 그렇게 지내고 난 다음은 ‘소변줄 훈련’이라는 걸 했다. 딱히 내가 한 건 없고, 소변줄을 뗄 준비를 하기 위해서 줄 중간을 잠가놓고 요의가 오면 누군가에게 줄을 풀어달라고 해서 소변을 본 다음에 다시 줄을 잠그고, 소변통을 비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변줄 훈련을 하는 도중에 소변줄에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소변줄을 풀 때마다 기분 나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소변을 보는 것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일인가, 이렇게 거추장스럽고 힘든 일인가를 새삼 느꼈다. 물을 많이 마셔야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물을 많이 마시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내 소변색은 붉었다. 결국 손등에 다시 한 번 혈관을 잡고 피가 나오지 않을 때 까지 수액을 맞아야 했다. 그 후에 소변줄을 완전히 제거하고 기저귀 위에 첫 소변을 볼 때의 느낌이란 마치 새로 태어나는 듯 한 어색하고도 어쩔 줄 모르겠는 이상하고 기이하고 다시는 느끼고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  다음 기억은 씻지 못해서 각질이 허옇게 일어난, ‘각질 꽃’이 핀 내 손에 대한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각질이 그렇게 심하게 일어나서 쌓인 내 몸을 본 적이 없었고, (다행히)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다. 수술 이후 샤워는 커녕 손을 씻을 수도 없었다. 혼자 화장실도 못 가서 소변줄을 끼워 놓은 상태니까 말 다한거다. 사실 그 때는 내 몸의 청결 따윈 내 안중에도 없었다. 씻지 못해서 쌓이고 쌓인 각질이 결국 내 손을 뒤덮었다. 엄마도 생전 처음 보는 대단한 각질이었는지 이게 대체 무엇인지, 일반적인 각질이 맞는건지 피부과에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간호사는 안 씻어서 생긴 각질이라며 나중에 씻으면 나아질 것 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계속해서 내 손을 물티슈로 닦아냈지만, 그 정도로 닦이지 않는 강력한 묵은 각질이었다. 나중에 첫 샤워를 어렵게 어렵게 방수가 되는 샤워 침대에 누워서 받고 (샤워 침대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나서도 각질은 한 번에 없어지지 않고 겹겹이 남아 있었다. 그 강력한 각질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내 손에 하얗게 겹겹이 꽃이 핀 듯한 형상의 그 각질 꽃을.


처음 보는 것, 처음 해 보는 것 투성이었다. 존재하지도 몰랐던 것들. 소변줄, 소변줄 잠그기 훈련, 포대기 기구, 샤워 침대 등. 뭐 특별한 것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살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힘들었다. 그리고 몸이 아프고, 정신이 힘드니까 짜증도 많이 내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재활 치료를 받고 병실로 돌아와 누우면 눈물이 났다. 몸이 안 움직이니까, 그리고 겨우 그거 가지고 멀미가 너무 나니까. 당장 이것도 힘든데 학교는 어떻게 돌아가나 막막하니까 눈물이 났다. 짜증이 났다. 엄마한테도, 간호사한테도, 그냥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모두에게 짜증을 너무 많이 냈다.

이전 03화 눈을 뜨니 중환자실이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