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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들 Aug 07. 2023

나의 해고 일지
- 오래된 책장 정리

#오독완 프로젝트

세 번째 상담 이후, 나는 예전보다는 조금 더 산뜻한 기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건, 상담의 효과이기도 할 것이며, 동시에 내 마음속에서 흐트러져 있었던 어지러운 마음이 조금은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나의 마음과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고, 어지러이 늘어진 마음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즈음 나는, 집에 있는 책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시작은 같이 살고 있는 엄마의 성화였다. 어차피 노는 김에 안 보는 책들은 갖다 버리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내 책장엔 책이 약 100 여권 가량 꽂혀 있었고, 한 번은 정리가 필요한 타이밍이기도 했다.  그래, 놀면 뭐 하겠나. 책장이나 정리하자 싶어 나는 집 한 구석에 있던 책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또 그런지라, 막상 책들을 버리자니 너무나 아까운 것이었다. 이것도 보려고 산 거고, 이건 누가 선물해준 거고, 이건 재미있다고 추천해줘서 산 거고 등등 책 한 권 한 권마다 나 자신만의 사연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매정하게 책들을 갖다 버리기가 영 주저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책들을 읽어보자, 나는 그렇게 굳게 마음먹었다.


#오독완 프로젝트


이름하여 '오독완 프로젝트'였다. "늘의 료"의 앞글자를 따서 나는 책을 읽고 내 개인 SNS에 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약간의 허영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책장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내 책장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처음 들은 책은 <불편한 편의점>이었다. 베스트셀러에 올라와있기에 재미있을 것 같아 구매한, 그래도 가장 최근에 내 책장에 들어온 책이었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고, 소설책이었지만, 오랜만에 책을 읽으니 집중이 쉬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참고 읽어보자며, 나 자신을 다독이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가 휴대폰으로 SNS를 보기도 하고, 또는 울려대는 메신저 알람에 일일이 답을 해나가는 등 책을 읽는 시간은 온전히 책을 읽어가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게 산만한 독서의 시간이 끝이 나고, 나는 책 한 권을 겨우 떼었다.


책 한 권을 떼자 그다음부터 무엇을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책장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다음 책은 무엇을 읽을까, 무엇을 읽어야 잘 읽었다고 소문이 날까(?) 하며 나는 책장을 보며 다음 책을 골랐다.  그 뒤로 읽은 책은 <왜 세상의 반은 굶주리는가>였다. 선정 기준은, 책이 얇아서였고, 폰트가 작지 않고 컸기 때문이었다. (결국 읽어야 할 내용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책은 그래도 처음 책보다는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보다 다소 진중한 내용에 나도 모르게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잘해보자며 나 자신을 달래서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한 권이 두 권이 되고, 두 권이 세 권이 되고, 세 권이 다섯 권을 향해 갈 때쯤, 나의 #오독완 프로젝트는 나의 초창기 예상보다 조금은 더 진지해져가고 있었다. 물론 중간에 재미없는 책을 만나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이번만큼은 끝까지 한 번 읽어보자, 포기하지 말고 재미없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설령 나중에 책 내용이 단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더라도 그냥 읽어보자, 는 마음의 소리가 나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책을 읽고 책 마지막장을 덮고 SNS에 #오독완프로젝트 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그리고는 책의 인쇄페이지를 무심코 살펴보았는데, 책의 인쇄 날짜가 10년 전으로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 다른 책들도 괜스레 한 번 살펴보니 8년 전이었고, 10년이 넘는 책도 있었다. 최근에 샀다고 방심했던 책 마저 3년 전에 출간된 책이었다. 


그 순간 머리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은 내가 최소 3년부터 길게는 10년까지 손 하나 건들지 않은 책들이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 시간 동안 책 하나 볼 만큼 여유로운 삶을 살지 않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업계에 들어오기 전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어쩌면 업계에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좀 더 나를 채근하며 달려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미뤄둘 만큼 나는 그렇게 바쁘게 달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막상 해고된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던 것일까. 허탈감과 허망함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나를 돌보지 못할 만큼, 나는 앞으로 열심히 달려가기만 했던 셈이었다. 


오래된 책장에서 내가 발견한 것


바쁘게 달려온 만큼 중요한 것을 잊고 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한 무언가가 느껴지긴 했지만,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책장에 있는 책들을 읽어 보기로 했다. 책들을 읽다 보면 알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아 있었다. 


초반에는 2~3일에 1권 읽던 내 페이스가, 어떤 날은 재미있는 - 혹은 가벼운- 소설책을 만나면 하루에 1권도 뚝딱 읽기도 했다. 집에서도 읽고, 카페에서도 죽 치고 앉아 읽었다. 어떤 날은 책을 읽지 말까 싶다가도, 왠지 이것마저 해내지 못하면 영영 앞으로 아무것도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기에, 나는 그냥 '읽었다.' 


그러던 중, 다음 책을 고르기 위해 책장을 유심히 보던 나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내 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동안 이 책들이 여기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왜 그동안 이 책들을 보지 않았을까? 그러자 머릿속에 내가 그동안 놓치고 산 것이 뭔지 알아냈다. 오래된 책장에서 보던 오래된 책을 읽지 않고 외면한 것. 그건 결국 내 중요한 감정과 생각을 외면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봐야지, 나중에 읽어야지 하며 피하고 외면했던 내 생활의 패턴은, 결국 내가 여태껏 살아온 인생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회피하고 외면하며 살았던 내 태도는 어쩌면 결국 여기까지 나를 끌고 왔는지도 모르던 일이었다. 직접 맞서서 싸우기에 두려움이 컸기에, 외면하고 피하며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하는 느슨한 마음을,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오래된 책장에서 나는 여태껏 나의 못난 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게 좋을 때도 있었지만, 확실한 건 지금에 와서는 좋은 태도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책장에서 오래도록 더께가 쌓인 채 외면받았던 나의 그 수많은 책들은, 사실 더께가 쌓인 채 오래도록 외면받았던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오독완프로젝트는 두 달 정도 지나자, 약 40권 정도를 읽게 된 셈이 됐다. (약 2일에 1권 정도) 

읽은 책들은 처분하기 시작했는데, 중고로 팔 수 있는 책은 온라인 서점을 통해 팔았고, 팔지 못하는 책들은 재활용 쓰레기로 내다 버렸다. 처음엔 책장 안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기 위해 시작했던 프로젝트였지만, 비어져 가는 책장의 칸을 볼 때마다 어딘가 마음과 머리가 조금씩 시원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의 오래된 마음 속 켜켜이 쌓인 먼지들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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