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된 아이와 다니다 보면 종종 아이가 하나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주로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면 으레 소신을 실어 동생 예찬론을 펼치시곤 합니다. 얼마 전부터는 아들도 아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치더군요. 동네에서 흔히 만나는 유모차 때문인가 싶었습니다. 출산율이 아무리 바닥을 쳐도 신도시엔 갓난아기들이 화려히 수를 놓습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그리워 이 동네를 찾았다는 할머니도 뵌 적이 있으니, 참 낯설고 서글픈 현실이지요.
석 달 전 시험관을 시작했습니다. 임신을 위해 반년의 시간을 흘려보낸 참이었죠. 마침 근처에 난임 전문병원이 있어 처음엔 검사라도 받아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결과는 난임,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연임신을 기대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나이였죠. 노산도 많겠다, 초산도 아니겠다, 대수롭지 않던 계획에 금이 갔습니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인공수정도 의미가 없어진 마당에 주저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시험관 선배들과 잠시 한 공간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힘이 실렸고요.
그간 유산, 조산, 사산이라는 단어는 결코 와닿는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임신이 수월했었던 만큼 아이를 갖기 어렵다는 이들의 하소연도 지나치면 그만인 말들이었죠. 경험은 또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에 취해 보지 못했던, 보려고 하지 않았던 장면을 맞닥뜨린 순간, 자연스레 겸허해지더군요. 희망을 품는 게 사치일 수 있다는 우울과 절망이 찾아온 적도 있고요. 아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한 마디, 유모차에 누워 방긋 웃는 아기의 말간 눈빛이 제 마음 한구석에 희망의 꽃을 피울지는 한 치 앞도 알지 못했던 때문이겠죠.
당시 의사는 2년의 공백을 권고했습니다. 다시 임신을 계획한다면 말이었죠. 자세한 설명은 없었기에 짐작건대 몸의 회복 시기를 그렇게 본 것 같습니다. 상실로 그늘진 세월이 지나버린 뒤, 조심스레 말문을 연 건 부부 모두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의사가 점쳤던 그 시간이 지난 즈음이었죠.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타이밍, 자의든 타의든 저에겐 그런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제 나이가 좀 더 적었다면, 첫째가 있지 않았다면, 또 선택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말이죠. 시선을 의식할 겨를조차 없었지만, 남편과 아들, 떠난 둘째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숱한 물음에도 딸은 결국 답을 주지 않았지만요.
시험관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호르몬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다 보니 절로 신경이 곤두서고 몸도 팅팅 부었지요. 살아생전 난자 개수로 동성 간 질투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자력으론 어찌할 수 없는 나이를 탓할 밖에요. 그래도 주사 공포증을 극복한 뒤 이 과정을 만나게 되어 천만다행입니다. 이렇게라도 가능성을 걸어볼 수 있음에도요. 신선이니 동결이니, 또 한 번 세계를 확장하게 된 것도 반가웠습니다. 물론 연이은 실패로 인간의 무력함을 감당해 내는 중이지만 뭐 별수 있나요, 쿨럭.
곧 세 번째 시험관 과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 번째 난자채취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아직 배아 이식 한 번 해보지 못했으니, 전 과정의 절반밖에 와보지 못한 셈입니다. 징징거릴 때가 아니란 걸 알기에 다시 한번 자각하며 아기와 나눴던 그 교감을, 그 영광을 용기 내 희망해 봅니다. 핑계나 불평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전업주부의 일을 하자고 다짐했던 때처럼요. 어지러운 잡생각들에서 벗어나 오늘,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다시 한번 희망을 품은 시작점은 오롯이 전적인 저 자신이었으니까요. 비 갠 하늘이 유독 맑고 파란 오늘이네요. 뭉게구름 뒤에서 둘째가 방긋, 엄마의 길을 응원해 주는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