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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 in Sep 16. 2024

상실과 결핍이 알려준 것들

채움의 온기

* 상실: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 결핍 :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헨더슨빌 생활을 단어로 요약하자면 상실과 결핍이었다. 특히 익숙한 한국 음식에 대한 결핍은 불편함을 넘어 그리움으로 다가왔고 , 김치를 먹지 않는 날은 과장 같지만 하루를 살아낼 기운을 잃었다. 유명한 햄버거 체인점의 햄버거를 먹고 와도,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 멕시코 음식을 먹고 와도, 소문난 헨더슨빌 음식점에 다녀와도 모든 음식의 끝맛은 느끼함이었다. 결국 집에 와서 꼭 김치 한 조각을 먹어야 비로소 속이 개운해졌다. 남편과 라면에 김치를 먹으며 속을 달래다 “우리 피 속에는 김치국물이 흐르는 것이 아닐까? ”라며 웃음기를 싹 거두고 진지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냉장고에 김치가 떨어지는 날에는 초조해졌다. 아시안 마트에서 사 온 배추에 고춧가루, 게세마리 액젓, 다진 마늘을 넣어 오이김치, 양배추김치, 겉절이를  만들며 한국에서보다 더 자주 김치를 만들고 한국 음식에 집착했다. 잡힐 듯 안 잡힐 듯 풍족하지 못한 음식에 대한 결핍으로 인해 늘 음식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 아쉬움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익숙함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가져온 참기름 한 방울, 조선간장, 된장, 고추장 한 스푼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 전 세계에서 한국인만 먹는다는 콩나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3시간 반을 자동차로 달려야 구할 수 있으니, 헨더슨빌에서 콩나물은 귀하디 귀한 식재료였다. 콩나물은 장기 보관이 가능하지도, 냉동 보관이 가능하지도 않기에 한꺼번에 많이 사지도 못한다. 한인 마트에서 대용량 콩나물 딱 한 봉지를 사 와서 한 주 동안 부지런히 알뜰히 요리를 한다. 먼저 콩나물무침을 만들고, 콩나물을 김치찌개에 넣고 어묵탕에도 넣고, 주말이 되어 삼겹살에 김치와 데친 콩나물을 넣어 지글지글 구워 먹는다. 콩나물 한 봉지의 쓰임새가 얼마나 많은지. 콩나물로 일주일을 다양하게 요리조리 요리를 해 먹으며 어느새 나는 상실이 알려주는 풍요를 배우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콩나물 파티를 벌이며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곁에 있을 때는 모르고 살다 상실을 느껴보고서야 일상의 당연한 것들에 대한 그 소중함을 느끼게 된 다는 것을.


 상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상실의 빈자리는 또 다른 것들로 채워졌다. 익숙한 한국 음식이 상실되었을 때, 이웃들의 따뜻한 손길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K 아주머니가 정성껏 차려주신 사랑이 담긴 한국 음식, 마당발 M 아주머니의 텃밭에서 키운 한국 부추와 친구분들의 한국 식자재, 멕시코 친구 호비타의 부대찌개 맛이 나는 멕시코 음식 Frijoles charros, 옆집 마이크 아저씨의 덜 달고 폭신한 바나나 브레드, 제시카의 유기농 달걀, 니콜 선생님과 클로우디아 선생님의 달콤한 쿠키들. 상실이 없었다면, 어쩌면 음식이 전하는 사랑을 일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상실과 결핍이 음식뿐이랴. 간혹 복작복작 서로가 부딪힐 만큼 좁은 거리를 걷는 도시 생활이 그립고 외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복잡한 도시 대신 이곳에서 내 시야를 가리는 것은 손에 잡힐 듯 낮게 떠 있는 구름과 쭉쭉 뻗은 나무숲이 대부분이다. 헨더슨빌에서 아이가 사귄 친구집에 초대되었던 날이었다. 구글맵에 주소를 입력하고 따라가다 보니 점점 산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설마 친구의 집이 산 정상에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이.럴.수.가 정말로 친구는 산 정상에서 살고 있었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스쿨버스가 다니는 것도 신기하고, 산속에서의 삶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신기함도 잠시, 친구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어둑해진 바깥을 보니 집으로 잘 돌아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 되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산길을 달리며 불안감이 밀려왔다. 과연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건지, 불쑥 곰이 나타나는 건 아닌지 겁이 덜컥 났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가다 문득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리둥절함과, 이 낯선 땅에서 예측 불가능한 모험을 겁도 없이 다채롭게 벌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내 우려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내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헨더슨빌의 웅장하고, 다정해 보이는 구름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고, 생각이 많아질 때면 둥둥 떠있는 구름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복잡하게 얽힌 생각이 깔끔해지고 단순해졌다. 말로 충분히 표현해지지 않는 자연의 아름다움, 아마 평생을 살면서 절대 궁금해하지 않았을 비밀스러운 산에 대한 호기심들은 도시의 익숙함이 상실된 후 얻게 된 소중한 채움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을 인생이었는데 상실 덕분에 멋진 풍경을 감상할 줄 알게 되었다.  자동차의 경적 소리 대신 새소리에 깨어나서 아침을 맞이하고,  날이 밝아오는 것을 천천히 멍 때리면서 바라보는 시간이 간혹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Park at Flat Rock의 이른 아침 풍경

  미국에 살면 대도시든, 교외든, 시골이든 막연하게 영화나 티브이에서 보는 것처럼 여러 파티에 참석하며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부르지 않으면 누가 불러주지도 않고, 솔직하게 말하면 많이 지루하다. 해가 떨어지면 집 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지니 비겁하게 다음 날 동트기 만을 기다린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고, 그나마 집 앞 공원이나 등산을 하면 숨통이 트인다. 내성적인 성격이라면 고립되기 십상이다.  ​


 그래서 여유로운 생활일 줄 알았는데 아이들 픽업과 드랍으로 시간이 바쁘고, 세끼 차리다 보면 하루가 간다. ESL을 다녀도 영어는 딱히 안 늘고, 한국에서는 도서관에서 책 제목에 이끌려 책을 골라서 보는 맛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미국 도서관을 가보지만 영어책 제목조차도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뭘 해도 온전히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겉도는데 바쁜 생활, 이 커뮤니티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어딘가 속해 지지 않는 공허하고 쓸쓸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마트에서 카트를 밀 때가 있을 만큼 단조롭고 바쁜 헨더슨빌 생활에서 즐거움 중 하나가 단연코 장보기다. 한국에서의 편리함과 한국음식에 대한 상실이 한계치에 다다를 때면 애틀랜타 한인타운에 간다. 한국인에게 한인 마트는 친정집이고,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우리가 사는 곳에도 한인 마트가 있지만 소박하다. 또한 아쉬운 대로 동네 마트의 아시안 section에서 아시안 식재료를 살 수도 있고, 근처 (Asheville Trader’s Joe) 애쉬빌의 조씨네 상회에는 냉동식품 코너에 파전, 떡볶이, 잡채, LA갈비가 있고, 월마트에는 조미김부터 신라면, 불닭볶음면, 비비고 만두까지 한국 음식이 제법 많이 보이지만 양에 차지 않는다.


 헨더슨빌에서 차로 불과 3시간 반을 달리면 한인타운이 잘 조성된 애틀랜타 둘루스에 도착하는데 같은 미국에 사는데도 헨더슨빌과는 정말 딴 세상이 펼쳐진다. 익숙한 한글간판이 가득한 이곳에서 우리는 한두 군데의 마트에 들르고, 리뷰가 괜찮은 한식당에 간다. 만족도가 높았던 식당으로는 메ㄱ마트 기사식당, 아C 마트 푸드코트의 분식, 소공O 순두부, 남대O 마트의 얼큰한 대구 매운탕과 밑반찬, BB큐 치킨. 중식은 뷰포드 근처 중O집, 일식은 애틀랜타 공항에서 가까운 강남스O다. 우리는 주로 한국산 쌀을 사기 위해 둘루스 메ㄱ마트에서 장을 본다. 매장이 깔끔하고, 한국에서 직수입하는 물건들이 많고, 매장의 제품 배치마저도 한국의 마트와 똑같아서 마치 한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Nam Dae Mun Farmers Market 안의 대구 매운탕 , Duluth, GA
Assi Plaza. Duluth, GA
Mega Mart. Duluth, GA

 마트 안에 있는 뚜레쥬O 빵집에서 찹쌀도넛, 꽈배기, 단팥빵을 사고, 빵집 옆의 일ㄹ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하여 마시며 제대로 한국을 느꼈다. 신선한 광어회를 파는 코너 앞에서 흥분을 멈추지 못하고, 초밥과, 광어회 모둠 두 팩을 카트에 담고, 그 옆의 한국식 수제 왕만두까지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 음식에 대한 상실감은 애틀랜타 한인 마트 쇼핑으로 말끔하게 사라졌고, 대신 트렁크에 한국 식자재로  ‘한국’을 풍성하게 담았다. 한인 타운 거리에서 맡는 익숙한 한국 음식 냄새,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나와 같은 피부색과 머리색들. 아무도 모르지만 왠지 다 아는 듯한 이 익숙함 속에서, 오랜만에 이방인으로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마음을 꽉 채우며 나도 모르게 안도감을 내쉬었다.



 비가 오는 주말 아침, 애틀랜타 한인마트에서 사 온 헨더슨빌에서 귀한 콩나물과 미나리, 부산 어묵 한 봉지, 청양고추를 넣고 어묵탕을 끓여 먹으니 기가 막힌 맛이다. 내가 이렇게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니 미처 몰랐다. 가족 모두가 시원하고, 뜨끈한 어묵탕 한 그릇을 감사하게 먹으며 행복한 아침을 맞이했다. 상실을 겪어서 감사한 인생이라고 나직하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실은 자발적 비움이 아닌 타의에 의한 비워짐이니 상처로 봐도 무방하지만 상실은 단순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로운 것들로 채워가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상실과 결핍의 시절에 배운 것들로 앞으로도 잘 살아가길, 스스로에게 당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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