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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대 Sep 29. 2020

죽음 맞이하기

  나이가 들어서인지 학교 동창생이나 오래된 친구를 만나면 자연스레 산 사람 안부보다 누구누구가 죽었다는 말부터 이어진다. 전에는 별로 말하지 않았었고 듣지도 않았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쉬운 것은 내 주위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지고 있어서인 것 같다.

  며칠 전 내가 속한 단체 회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로 같은 교회에 나가는 친구이면서 교우라 평소 대화를 많이 하고 지내던 사이다. 그를 보내고 나니 더 아쉬운 것은 그가 돈을 모아 아프리카 선교를 가겠다던 꿈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는 치료 중에도 병을 이겨낼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늘 밝은 표정으로 대했다. 두어 달 전까지 운전을 해 물품을 납품하며 열정을 보였다. 한쪽 어깨에 가볍지 않은 가방을 매 축 처진 채 늘 바삐 걷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30여 년을 후학 양성에 힘쓰다 퇴직 후 숲 해설가, 자연환경해설사로 지냈다. 단체로 산이나 들에 가면 이 나무는 무슨 나무, 저 꽃은 무슨 꽃이라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듯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 주던 모습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한 평생을 같이하다 남겨진 배우자와 자녀들이 용기를 잃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친구가 세상을 뜨기 사흘 전에는 다른 회원의 딸이 투병 중에 마흔을 갓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먹먹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많은 말이 포함돼 있음이 느껴진다. 빈소를 찾았을 때 그들 부부는 덤덤한 표정으로 슬픈 기색조차 짙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고 무얼 어찌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오히려 몇 해 전 비슷한 나이의 딸을 잃은 인천 여성회원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울음을 터트린다. 그는 이제야 실감이 나는 모양이다. 서러움이 북받쳐 고인을 위한 예배시간 내내 흐느껴 우는 바람에 참석한 많은 사람이 눈시울을 적셨다. 예배가 끝나자 이번에 일을 당은 엄마를 껴안고 대성통곡을 한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가슴에 묻어 두었던 자식 생각에 울음을 그치지 않아 보는 이들을 더 안타깝게 한다.

  다음날도 어제 일로 숙연해진다. 그런 데다가 출근길 전철 옆 자리에 앉은 육십 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계속 흐느껴 운다. 참으려고 애를 써도 참아지지 않는 듯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연신 눈물을 훔친다. 무슨 사연인지 물어보고 어깨라도 두드려 주며 위로하고 싶은 충동을 고이 억누르며 헤어졌다. 나 자신이 일을 겪은 것처럼 그날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어느 문학지에 실린 수필 한 편을 읽었다. 간경화를 앓는 아버지가 부분적인 간이식으로는 나아질 가능성이 없어 뇌사자의 간을 통째로 이식받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올리고 기다리는 상태였다. 맘 조이며 기다리던 중 기증자 1958년생 F가 나타나 하루 가까이 수술을 거쳐 간을 이식받았지만 100일을 더 살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 이야기이다. 당시 환갑도 안 된 기증자 1958년생 F를 생각하며 글을 쓴 1983년생 그녀도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나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아온 것이 나로 인해서가 아니었듯이 죽는 것 또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무리 돈 많고 지위 높고 많이 배운 사람일지라도 죽음은 누구나 맞이하게 되고, 먼저 떠나는 이는 아무리 아쉽더라도 보낼 수밖에 없다.

  어느 종교에서는

  “누구나 복중 10개월, 지상 한 100년, 그리고 영생을 향한 마지막 단계인 영계에 가는 것이 천리(天理)이다. 사람들은 죽음이 곧 절망과 어둠과 슬픔을 뜻하는 영원한 이별인 듯 생각했다. 장례식에서는 어두운 색이 관례처럼 돼 있으나, 영정 리본이나 넥타이를 순백색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근조화도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다.”    “죽음이 슬픔과 고통과 절망의 대명사가 아니라 신성한 것, 이를 '성화(聖和)'라고 한다. 지상에서의 삶을 꽃피우고 열매 맺어 알곡을 품고 영계 입문하는 것이다. ‘성화식’이란 이처럼 성스럽고 숭고한 의식이므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모시고 영생을 즐기러 가는 첫걸음이라고 한다. 단지 함께 살다 간 그들 모습을 이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에 슬퍼질 뿐이다.”라고 가르친다.

  독일 유명 작가 프랜시스 베이컨도 ‘죽음에 관하여’에 다음과 같이 썼다.

  “‘죽음은 수족의 상처가 주는 고통보다 작은 고통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무서운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무섭다’고 한 말은 지당하다.” 또

  “신음소리, 슬피 우는 친구들, 검은 상복 그리고 장례식이 죽음을 무시무시한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이 죽음의 공포를 제압하고 극복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것이 아니다. 죽음과의 싸움에 이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갖고 있는 이상 죽음은 무서운 적이 아니다.”라고 했고

  “‘인생의 종말은 자연의 은총의 하나다’라고 한 사람의 말이 한층 옳다.”고도했다.  

  사람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기 전까지는 남의 일처럼 여긴다. 그러다가 막상 자신에게 닥치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부모와 자식 간이건 친구 간이건 오랜 인연의 끈이었던 사람이 멀리 떠나면 가슴이 내려앉는다. 그러다가도 이를 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생활을 하곤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볼 수 있을 때 만나서 손도 잡아 보고 목소리도 들어야 되겠다. 남은 생을 멋있게 아름답게 살다가 내게도 아 올 죽음 앞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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