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를 시작할 때만 해도 분명 작은 공사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던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을 갔더니 말문이 막혔다. 속된 말로 '뼈대만 남기고 싹 다 바꾸는' 어마어마한 공사장이 그곳에 있었다. 보온재를 넣기 위해 외벽을 모두 뜯고, 창문 교체를 위해 창을 다 철거했다. 내력벽을 없애면서 천장으로 지나가는 추가 프레임을 넣어야 했다. 6m쯤 되는 거대한 철제 프레임이 집을 관통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위해 천장의 일부 뜯어내야 했다. 벽과 캐비닛이 없어진 자리로는 흙바닥이 드러났다.
인테리어 작업 치고는 아주 찐- 하게 하는 편이라고 건설업에 종사하는 다른 친구가 정의했다. 그만큼 그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중간 과정은 거창해지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결정사항이 있을 때마다 현장에 불려 갔다. 주에 두 번 정도 집에 들러 새로 발생한 문제들에 의사결정을 하고, 공사 진행 과정을 지켜봤다. 일단 갔다 하면 서너 시간은 우습게 걸렸다. 공사 스케줄, 마감 방법, 다른 공종과의 간섭, 작업 조건들을 말하느라 바빴다.
주에 두 번은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고 가며 만난 이웃들과 친해졌다. 특히 뒷집에 살고 있는 '리타' 할머니는 매일 집 앞을 오가며 지켜본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비가 오면 물을 받는 거터 파이프(Gutter pipe) 청소를 해야 한다거나, 울타리로 둘러져 있는 벽돌들 중 몇 번째 벽돌이 흔들린다는 식이었다.
우리 집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1989년 처음 집이 지어졌고, 1995년 절반을 잘라내 뒷집을 지었다고 한다. 앞집은 이전 집주인이, 뒷집은 리타 할머니가 각각 30년, 25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우리 집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자식들이 각자 다른 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다고 한다. 그때부터 6년 정도 세를 주다가 이번에 팔게 된 거라고. 그제야 조금 퍼즐이 맞춰졌다. 이상하리만큼 무심하게 집을 파는 건, 정말 물리적으로 다른 주에서 오고 가는 게 불가능했구나.
손편지도 한통 받았다. 필기체로 흘려 쓴 편지에는 "미안해. 우리 딸이 가방에 넣어둔 열쇠 한 개를 이사 오면서 가지고 와버렸네. 우린 이 집에 지난 4년 동안 살았던 사람들이야. 우린 이 집에 있는 동안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너희도 새로운 집에서의 생활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했다. 괜히 마음이 몰랑해졌다.
부동산 매매 사이트에서만 봐오던 집들도 매물이기 이전에 결국 사람이 사는 공간이었다. 각자 그 공간을 채우던 이야기가 있었을 테고, 그들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아마 많이도 웃었을 테고, 울었을 테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겠지? 인테리어랍시고, 그 추억의 공간을 헤짚어 놓은 것 같아 좀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이곳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가 내내 자라게 될 곳이다. 녀석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등장할 배경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추억들을 심어놓고 싶다는 욕심을 내게 됐다.
그리고 그 욕심이 필요한 시점이 딱 그즈음부터였다. 이때부터의 인테리어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둥이라던지, 보온재 같은 기본 공사 속성의 것들이었다면 이 즈음부터는 생활에 직접 엮이는 것들만 남았다. 마감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타일 색과 크기, 패턴, 페인트 색, 벽이 설 정확한 위치, 전등 스위치 위치와 개수, 모양, 수도꼭지의 색과 타입, 샤워부스 타입, 문이 열리는 방향, 수건걸이 위치 등등. 생활의 편의와 미적인 부분에 대한 끝도 없는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한 번도 누군가의 집에 가서 수건걸이가 어디 있는지 생각해본 적 없는 곰 같은 나는 이런 질문들이 당황스러웠다.
- "여기서 여기까지의 딱 중간에 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타일 경계랑 아주 조금 차이나네요. 타일 경계에 맞출까요? 아니면 정 중앙을 맞출까요?" 수건걸이를 한 손에 들고 돌아보며, 우리나라 말이 능숙한 파키스탄 작업자가 물었다.
말문이 막혔다.
"모르겠어요. 대충 적당히 잘해주세요."
- "에이. 그래도 정해주세요"
"아........ 그럼 그냥 타일 경계에 맞춰주세요."
Alice in Wonderland, Disney (1951)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이상한 나라에 막 들어와 크기가 다른 문 사이에 몸을 욱여넣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내 집의 인테리어를 하면서 마감을 시작하니, 기어이 "Drink me"를 한 바가지 들이켜고 그 문을 통과한 게 실감이 났다. 가끔은 카드 군단이 뛰어다니고, 길을 안내하는 고양이가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도무지 큰 차이를 모르겠는 똑같이 생긴 타일 가격이 서너 배씩 차이 나기 일쑤였다. 싼 거를 택하자니 뭔가 망치는 기분이고, 비싼 거를 택하자니 속는 기분이었다.
난 그렇지 않아도 쇼핑을 귀찮아하는 편이다. 가격비교를 하기 위해 상점들을 한 바퀴 더 돌면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조금 손해 보더라도 필요한 걸 후다닥 사고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는 인간의 유형이다. 그런데 인테리어를 마무리하자니, 가스레인지, 오븐, 레인지후드 같은 주방기기부터 변기, 욕조, 샤워 탭, 문고리, 전등 크기까지 선택해야 하는 건 끝도 없었다.
다행히 남편이 이런 쪽에 눈이 밝았다. 컴퓨터를 조립하면서 용산을 좀 휘젓고 다녔다는 녀석은 부지런히 가격과 성능을 비교해 착착 구매해야 하는 아이템들을 지워나갔다. 가끔은 실랑이도 했고, 또 이따금씩 남는 물건을 기가 막히게 반품해왔다. 난 그저 "이 레인지후드는 시끄러워. 이거 사면 나 요리할 때 한 번도 안 틀 것 같아." 하는 식의 코멘트만 덧붙였다. 그러면 남편은 "아 그래?" 하면서 곧바로 준비된 Plan B를 제시했다. 부부 중 한 명은 바보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욕실이 가장 먼저 완성됐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우리가 핀터레스트에서 봐오던 모던한 느낌의 화장실을 어느 정도 구현해냈다. 두루뭉술하게 요구사항을 던져도 핵심을 착착 찾아내던 욕실 사장님 덕분이었다.
단열재를 위해 뜯어냈던 벽도 다시 세웠다. 키다리 보조기구를 단 작업자가 돌아다니며 슥슥 벽을 만질 때마다 뽀얗고 예쁜 벽이 태어났다. 신기해서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작업을 구경했다. 슥슥- 끝. 슥슥- 끝. 리드미컬한 그의 손끝마다 구멍 난 집이 조금씩 메워지고 평평해졌다.
작업이 완료되어 가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갈수록 주머니는 홀쭉해졌지만, 반비례해 풍요로워질 삶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거의 손에 잡힐 듯도 싶었다. 아이 어린이집 등록 일정과 이사 날짜를 슬슬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 있는데 남편의 다급한 카톡이 몇 개 도착했다.
"집 앞이 완전 시위대로 뒤덮였어. 퇴근할 때 조심해."
빅토리아 주의 COVID lock down이 막 230일을 넘어선 날이었다. 공사장 인부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시내 아파트 앞을 빼곡히 둘러쌌다. 빅토리아 정부가 '더 이상 백신을 맞지 않으면 현장에서 일할 수 없다.'라고 공사 현장에 대한 강경책을 내놓은 다음날이었다.
지금까지 <무조건 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묵묵히 따르던 자영업에 비하면 호주 정부는 공사현장에 관대한 편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현장은 회사 자체적으로 발행한 퍼밋만 있으면 작업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쭉 유지해왔다. 사실상 집에 살면서 인테리어를 하는 극소수의 현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현장이 락다운 이전과 동일하게 움직였다. 조금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던 공사현장에도 처음으로 강경한 제약이 내려진 것이다.
그 길로 현장 인부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스크도 쓰지 않고, 형광조끼를 입은 채로 '공사 노동조합'이 위치한 우리 집 앞 Elizabeth street로 집결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변호하지 않고, 정부의 지침을 그대로 받아들인 노동조합에 분노했다.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Freedom!(자유!)"
단전에서부터 쏟아내는 그들의 함성은 아파트 벽을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현장 노동자들의 시위대는 그렇지 않아도 체격이 좋은데, 형광 조끼까지 맞춰 입어 더 눈에 띄었다. 시위 현장마다 등장하는 말(horse)을 대동한 경찰과 검게 색을 맞춘 특공대까지 집 앞을 에워쌌다. 큰 도로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위는 삼 일간 계속됐다. 매일 수백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소리치고, 행진했다. 이따금 무력시위도 있었다. 경찰차로 달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뜨였다. 결국 이튿날부터 더 이상 페퍼 스프레이로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경찰은 고무로 된 총알을 쐈다. 고무총이라고 했지만 발포된 총소리가 "탕- 탕- " 거리를 울렸다. 노동자와 경찰이 뒤섞여 서로를 뭉개느라 바빴다.
축축한 겨울의 끝자락, 비가 온종일 내리고 있었다.
The most liveable city(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가 the most leavable city(세상에서 가장 떠나야 하는 도시)가 됐다는 말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