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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삼키셨던 것은

김장 ♡




어제 김장을 했다.


배추는 절인 배추를 샀다.

아파트에서 많은 양의 배추를 씻고 , 다듬고,

절이는 과정이 정말 어렵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그냥 절인 배추를 사용한다.

절인 배추는 살짝 한번 씻고

 채반에 널어서 소금물을 빼준다.

너무 말라도 안되고 너무 젖어 있으면 짜니까

간이 맞다 싶을때까지 빼준다.


양념은 하루 전날 미리 만들어 숙성시켰다.

찹쌀 풀을 묽게 쑤어서 식히고

양파, 배, 마늘, 새우 육젓을 넣고  부앙~ 갈아서

식은 찹쌀풀에 섞고,

고춧가루, 매실액, 갈지 않은 새우젓,

까나리 액젓을 넣고 휘이 휘이 섞어준다.


간은 적당히 천일염으로 하되

미리 너무 많이 넣으면 짜게 되니까

주의해야 한다.

여기에 청갓, 홍갓, 쪽파를 듬뿍 썰어서 함께 섞어서  하룻밤 시원한 곳에 두어 숙성시켰다.


배추 줄기쪽부터 정성껏 양념을 발라준다.

양념을 바른 후에는

배추에 붙어있는 잎중에서 가장 큰잎으로

반드시 한번 감아서

양념이 밖으로 빠지지 않게 해준다.

( 식구들이 무채를 싫어하여 넣지 않았다.)


남은 양념으로는  쪽파에 버무려 파김치 만든다.

이때 쪽파 머리 부분은 액젓을 조금 뿌려 두어

힘을 뺀 후 김장양념을 슥슥 발라주면 된다.


새우 육젓을 넣으면 고소하고

 은 감칠맛이 나서 좋은데

가격이 비싸므로 육젓 반, 그냥 추젓 반 으로 섞어 사용한다.


김장양념은 항상 여유있게 만들어서

남는건 냉동시켰다가

총각김치, 열무김치, 갓김치 등등 만들때

1년 내내 요긴하게 사용한다.


김장이란게 양이 많아 그렇지

양념을 만드는건 어렵지 않다.

이렇게 만들어 두면 내년 여름까지는 충분히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다.

우리집 김치 냉장고에는

 3년 되어가는 묵은지도 있다.

김치는 마지막까지 버려지는게 없는 것 같다.




1년에 한번씩 커다란 푸댓자루에 담겨진

빨간 고추가 배달되는 날에는

등교하는 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 많은 고추로 엄마가 앞으로 무엇을 할 지

눈치빠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집은 김장을 담그기 전에 먼저 했던 일이

고추 다듬기였다.

푸댓자루에 담겨진 어마어마한

고추를 받는 날엔

엄마의 표정이 그렇게 밝고 기쁠수가 없었다..


고추는 몇날 며칠을

깨끗한 마른 행주로 닦아내고

거실에 전기장판을 깔고

그 많은 고추를 말리셨다.

엄마가 고추를 닦으실때

 나 함께 쓱쓱 닦으면서

고추를 마이크 삼아 엄마가 좋아하시던 노래들을 불러재꼈다.

주로 엄마가 좋아하시던 변집섭의 노래였다.

“ 날아가는 새들 바라보며

나도 따라 자유롭고 싶어.

파란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나도따라 가고 싶어~”

( 지금 노래가사를 보면 엄마가 왜

이 노래를 좋아했는지 알겠다.)

할 일은 태산같았지만

내 노래를 들으시면 좋다 좋다 하셨다.


고추가 마를 한동안 집안은 온통 매운 냄새였고

이방에서 저방으로 옮겨 다닐때

고추를 밟고 뒤로 벌렁 자빠질때도 있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말려진 엄마의 고추들은

우리집 보물 1호가 되었다.

봄이 되면 고추장을 담그고

겨울이면 김장을 담가서

1년 내내 우리 식구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엄마의 블란서 여배우 손은 매우 크셔서

김장때면 100포기는 우스운 양이었다.

요즘처럼 절인 배추가 나오던 시절아니었으니

100통의 배추가 배달되면

아파트 복도에 100통을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려 놓으시고

욕실에서 다듬어 씻으시고,

들어가 목욕이나 해야 어울릴듯한

빨간 고무 다라이 두개에 배추를 담고

 천일염 한푸대를 뜯어서

밤새도록 절이고 뒤집고를 반복하셨다.


이 과정까지는 내가 잘못 도와 드렸다가는

소중한 배추를 망쳐버릴 수 있으므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김장하는 날 등교할

“ 엄마! 버무리는건 내가 학교갔다 오면 같이 해.

무만 채썰어 두셔.” 라고 단단히 일러두곤 했다.

하지만 학교 갔다 와보면

동네 친목계  7-8명의 아줌마들이 이미 오셔서

무도 채썰고 양념을 거의 공장 수준으로 비벼대고 계셨다.


김장하는 날은 우리집이 우리의 집이 아니었다.

몇 분의 아줌마와 엄마가 김장 속을 넣고 계실때

어떤 분들은 슬쩍 일어나 수육을 고 계시고

어떤 분은 밥을 짓고 계셨다.


그렇게 김장이 완성되면 친목계 회원 아줌마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우리 집으로 와서 동네 잔치가 되버리곤 했다.

난 서울의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아파트에서 자랐지만

손이 컸던 엄마덕에 시골정서로 자랄 수 있었다.

나 역시 무엇이든 많이 만들어 이사람 저사람 나눠 주는게 참 좋다.


엄마는 나에게 단 한번도 먼저

김장과 고추장 담기를 도와 달라고

 하신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엄마 곁을 지키고 있었다.

밤새도록 잠도 안자고 엄마를 지켰다.

엄마곁에 쪼그리고 아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야기했고

이다음에 시집가면 어떻게 살겠다는

이야기까지 했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엄마는 내가 결혼하고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몇 해 동안은 김장을 담그지 않으셨는데

그때 이유를 물어보니

엄마는 그저 웃기만 하셨고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함께 밤을 새워 주던

하나뿐인 단짝이  곁에 없으니

아마도 흥이 나지 않으셨던게 아닐까.

곁에서 신나게 노래를 불러드릴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까.

변집섭의  ‘새들처럼’ 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부른다고 하셨는데 말이다.


나도 엄마처럼 버무린 배추 한 잎을 툭 뜯어서

따끈한 밥위에 얹어 입 크게 벌리고 먹었다. .

엄마는 그렇게 삶의 무게와 아쉬움과

이루지 못한 꿈들을 

한 입에 삼키셨던것 같다.


https://brunch.co.kr/@myeonglangmom/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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