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미친듯이 사랑을 원하지만 결국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최후랄까.
억까도 이런 억까는 없을 거다. 마츠코는 세상 모든 불행을 온몸으로 맞은 여자다. 아픈 여동생만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얼굴을 구기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면 아버지가 자신을 보며 웃어 주기 때문이다. 지독한 애정결핍을 안은 채 어른으로 자랐고, 나름 번듯한 교사가 된다. 그러나 세상이 그녀를 가만 두겠는가. 제자 료의 도둑질 누명을 덮어쓰면서부터 그녀의 인생이 혐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도 아니고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라니.
마츠코는 사랑을 갈망하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그녀를 배신하고, 결국 그녀는 외로움과 혐오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이 영화는 사랑과 행복, 구원과 혐오를 넘나든다. 마츠코는 사랑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그녀의 여정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영화 초반부에서 그녀는 무한한 사랑을 주려고 애쓰지만, 정작 자신은 상처받고 고립된다. 사랑은 그녀에게 마치 쏟아지는 비와 같아, 한때는 생기를 주지만 이내 그녀를 눅눅하게 만들고 만다. 이러한 사랑의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오히려 혐오로 이어지는가? 마츠코의 삶에서 혐오는 끊임없이 존재한다. 사랑을 추구하면서, 그 사랑은 결국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 고통은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마츠코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그 혐오는 점점 더 깊어져 그녀의 존재를 짓누른다. 그녀는 늘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삶을 혐오하지만, 그 혐오는 그녀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의 한 부분이었다. 마츠코는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며, 그 결과로 혐오는 그녀의 삶을 따라다닌다. 혐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마츠코의 존재를 정의하는 하나의 강력한 요소였다. 그녀는 사랑과 행복을 갈망하지만, 그 끝에 다다르면 혐오와 자기 부정이 기다리고 있다.
마츠코의 삶은 마치 찬란하게 빛나다가도 금방 깨지는 유리 조각처럼, 한 순간은 빛나고 다른 순간은 부서진다. 그녀는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을 꿈꾸며, 구원을 찾아 방황한다. 하지만 그 끝자락에서 그녀가 마주하는 건 혐오와 자기 파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토록 부서지기 쉬운 사랑과 행복을 향해 질주하면서도, 결국 그 무엇도 손에 쥐지 못한 한 여자의 서사다. 이 영화는 지독한 양가감정을 보여 준다. 사랑과 혐오, 행복과 구원이라는 감정들이 어떻게 하나의 삶에서 복잡하게 얽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만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 한 가지를 묻는다.
사랑, 끝없는 갈망의 허상
마츠코에게 사랑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녀가 사랑하는 순간, 그것은 마치 찬란한 꿈처럼 다가와 한순간에 깨진다. 그녀의 사랑은 늘 결핍에서 시작된다. 그 결핍은 그녀를 사랑에 미치게 만들지만, 그 사랑은 그녀를 돌아서게 한다. 마츠코가 사랑을 갈구할 때마다, 그 사랑은 손에 잡히지 않으며, 그로 인해 그녀는 점점 더 고통스러워한다. 그녀의 사랑은 끊임없이 부서지는 유리 조각들처럼, 빛나는 순간도 있지만 그 끝에는 상처와 좌절이 남는다. 마치 무언가를 쥐려 할수록, 그 무엇도 손에 남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랑은 마츠코의 삶에서 항상 가까워 보이지만, 실상 그녀는 그것을 붙잡지 못한다. 그 사랑을 향한 그녀의 발걸음은 끝없는 탐색처럼 보인다. 어느 순간은 사랑을 통해 구원을 꿈꾸고, 또 어느 순간은 그 사랑이 자신을 찢어 놓을 거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녀가 쫓는 사랑은 결국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함은 그녀를 더 깊은 상처와 자책으로 몰고 간다. 사랑은 마츠코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사랑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구원의 또 다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행복, 미소 속의 불안
마츠코는 행복을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여정은 때때로 마치 찬란한 미소처럼 보인다. 사진 속 마츠코는 항상 웃는다. 행복해서 웃는다기보다 행복하기 위해 웃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미소에는 항상 불안과 고독이 숨어 있다. 행복은 그녀에게 손에 잡히지 않는 물체처럼 여겨지며, 한 발짝만 다가가면 그 물체는 사라진다. 마츠코는 늘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은 언제나 그녀의 손끝에서 흩어지고 만다. 그녀의 행복은 마치 흐린 유리창을 통해 보는 풍경처럼, 반짝이지만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행복을 좇는 마츠코는 결국 그 행복이 어디에 있을지 모른 채 헤매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츠코는 구원을 갈망한다. 그녀의 삶은 구원을 찾으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구원은 언제나 멀리서 빛나는 별처럼 보인다. 그녀가 찾은 구원은 그리도 뚜렷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흙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흐릿하다. 마츠코는 언제나 그 꽃을 잡으려 하지만, 결국 그 꽃은 그녀의 손을 피하며 다시 사라진다. 구원은 그녀에게 한 걸음도 가까워지지 않으며, 그 구원은 결국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츠코가 추구한 구원은 사실 그녀가 내면에서 찾고자 했던 진실, 그녀 자신의 존재와 직면하는 과정이었다. 구원은 물리적인 어떤 것이 아닌, 그녀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마츠코의 이야기는 사랑과 혐오가 경계를 넘나든다. 그녀는 사랑을 추구하고 행복을 꿈꾸지만, 그 사랑은 그녀에게 결국 혐오와 절망을 안겨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츠코는 계속해서 사랑을, 행복을,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왜?"라는 영원한 물음. 그래도 혼자인 것보다는 낫지, 하는 자기 위안과 함께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며, 그 부정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진정한 구원을 찾고자 한다. 그녀의 고통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마츠코는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붙잡고 있다. 사랑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행복은 그녀의 손을 피해 가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마츠코가 끝내 사랑을, 그리고 구원을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본다.
마츠코의 삶은 결국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고, 행복을 꿈꾸며, 구원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혐오하며 상처를 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사랑, 행복, 구원을 탐색한다. 마츠코의 인생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여정이지 단순히 혐오스런 비극이 아니다. 인간이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지, 그 끝에서 우리가 무엇을 원했는지 보여 준다. 마츠코는 사랑과 혐오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도 사랑을 향한 갈망을 놓지 않는다.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그렇게 데이고 버려질 바에는 혼자인 게 낫지 않아? 난 여전히 마츠코를, 사랑을 잘 모르겠다. 적어도 마츠코에게만큼은 그의 존재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힘이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