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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올 때면

by 스프링버드


샐리,


드디어 가을이야! 난 기다리고 기다렸어, 가을이 어서 오기를. 꼭 가을에 읽어야 할 책, 하지만 다른 계절에 읽어도 아주 좋은 책, 바로 이 그림책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말이야.




크리스 반 알스버그 글/그림, 정회성 옮김, 비룡소, 2022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오래전인데 그 사이에 표지가 바뀌었네. 옛날에는 해 질 녘 풍경이었지.



풀빛출판사의 2003판 표지



가을이야. 아름다운 가을. 나무가 노랗고 빨갛게 물드는 계절, 바람이 차가워지며 하늘에 철새가 날아가는 계절, 햇빛이 짙고 진해지는 계절, 얇은 옷을 옷장에 넣고 도톰한 옷을 꺼내 입는 계절,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리며 공중제비를 돌고 길에 떨어져 우리 발밑에서 폭신하게 밟히는 계절. 우리의 가을이 돌아왔어.


작가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이 아름다운 가을을 환상적인 그림과 이야기로 풀어놓았어. 우리말 제목은 <이름 없는 남자>지만 원래 제목은 <The Stranger>. '낯선 사람'이라는 뜻이지. 작가 덕분에 나는 가을을 기다리게 되었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정다운 사람처럼 기다려, 이 계절을.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이었어요.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돼. 계절이 바뀌는 이때를 제일 좋아하던 농부 베일리 씨는 어느 날 트럭을 몰다가 어떤 남자를 치게 되었어. 정말 놀랐겠지? 베일리 씨가 급하게 트럭에서 내려서 다가갔는데,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일어나서 도망을 치려고 했어. 하지만 곧 비틀거리며 쓰려졌지. 차에 치었으니까. 베일리 씨는 남자를 트럭에 태워서 집으로 데려갔어.


다행히 남자가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았어. 머리에 혹만 났을 뿐이야. 의사 선생님 말로는 기억을 잃은 것 같은데 며칠이면 회복이 될 거라고 했어. 그것 때문일까? 남자는 말을 알아듣질 못했고 말을 하지도 못했어. 이상한 낡은 가죽옷을 입고 있어서 새 옷을 갈아입게 줬더니 단추도 꿸 줄 몰랐어. 남자에게는 이상한 점이 많았지. 그래도 아무튼 베일리 씨 가족은 남자를 정성껏 보살폈어.


다음 날 아침 베일리 씨의 어린 딸 케이티는 침실 창문 밖으로 신기한 모습을 봤어. 남자가 마당에서 토끼 두 마리에게 다가갔는데 토끼들도 좋다고 남자에게 깡충깡충 뛰어가 안기지 뭐야. 토끼들은 남자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어. 남자는 들판으로 베일리 씨를 슬그머니 따라가서 일도 하고 싶어 했어. 쇠스랑 쓰는 법을 금방 배워서는 척척 일을 잘도 했어. 땀도 전혀 흘리지 않고 말이야. 베일리 씨는 땀이 나고 힘들어서 자주 쉬어야 했는데. 그날 오후에 케이티는 남자와 나란히 언덕에 앉아서 해 지는 풍경을 봤어. 따뜻하고 진한 노란색 석양을 받으며 남자는 하늘의 기러기 떼를 한참 바라봤어. 케이티는 그런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고.






며칠만 지나면 기억을 되찾을 거라던 남자는 두 주가 지나도록 자기가 누군지 기억해내질 못했어. 그래도 좋았지. 남자는 베일리 씨 가족과 정말 행복하고 즐겁게 지냈거든. 마치 가족 같았어. 베일리 씨 부인은 피아노를 치고 베일리 씨는 바이올린을 켜고, 케이티와 남자는 춤을 췄지! 이렇게 오래오래 영원히 함께 살면 참 좋겠다고 모두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한 주가 흘렀어. 가을이 성큼 찾아온 것 같더니 베일리 씨 농장 주변은 이상하게도 여전히 여름이 이어졌어. 호박은 아주 큼지막하게 자랐고 나뭇잎은 여전히 초록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농장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가 북쪽 멀리에서 빨강과 주황으로 밝게 물든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리둥절해졌어. 베일리 씨 농장 주변만 여전히 초록빛인 걸 보고서 말이야. 남자는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았어. 그다음 날 남자는 기분이 더 나빠졌어. 뭔가 아주 잘못됐다고 느꼈지.



남자는 더는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나무 있는 데로 달려가 나뭇잎을 한 장 떼어 냈어요.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나뭇잎을 잡고 망설임 없이 온 힘을 다해 후 하고 불었지요.





그날 저녁, 남자는 낡은 가죽옷을 다시 꺼내 입고 눈물이 그렁그렁 눈에 맺혀서 식탁에 나타났어. 마침내 기억이 돌아온 거야. 그러니 이제 떠나야 했지. 남자는 가족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껴안아주고는 밖으로 뛰쳐나갔어. 미처 작별의 말을 꺼낼 새도 없이. 베일리 씨 가족은 서둘러 밖으로 쫓아갔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 바깥공기는 차가웠고 초록 나뭇잎들은 색이 변해 있었어.



이름 없는 남자가 다녀간 뒤 해마다 가을이면 베일리 씨 농장에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북쪽에 있는 나무들은 빨강과 주황으로 물드는데 농장을 둘러싼 나무들은 일주일 동안 푸르기만 했어요. 그러고 나서 하룻밤 사이 북쪽의 나무들보다 더 아름답게 울긋불긋 물들었지요. 그리고 서리가 부옇게 앉은 베일리 씨 집 창문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답니다. "내년 가을에 또 만나요."






우리는 농장에 살지도 않고 이런 낯선 남자를 만날 일도 없구나. 하지만 그림책 속 계절처럼 우리의 시간도 이제 가을이야. 여름이 뜨겁게 활활 타더니 문득 가을이 됐어. 갑자기 찾아온 낯선 사람처럼. 이상한 옷을 입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순진하게 쳐다보는 사람처럼. 토끼들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다정한 사람처럼. 가족도 아닌데 가족인 사람처럼. 어리둥절, 재밌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가을이 우릴 보고 활짝 웃고 있어. 낯선 사람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집안에 들여 식사를 대접하던 옛날은 이제 영영 옛날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가을은 두려움 없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할 수 있어.


그리고 떠나겠지. 갑자기 찾아왔던 것처럼 갑자기. 슬퍼하며 떠나겠지. 하지만 우리는 가을에게 따뜻한 작별인사를 받을 거야.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채 꼭 껴안아주는 포근한 작별 인사를. 우리가 같이 했던 행복한 순간들은 남을 거야. 차가운 가을바람으로, 노랗고 빨갛게 변하는 나뭇잎으로, 짙고 깊은 노란색 석양빛으로, 가을의 추억은 우리 몸과 눈과 마음에 담길 거야. 안녕, 안녕, 안녕, 어서 와! 안녕, 안녕, 안녕, 내년에 또 만나!




* 인용한 그림들은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입니다.

* <샐리를 위한 그림책>을 매거진에서 브런치북으로 다시 발행합니다. 같이 해주셔서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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