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역』
간이역 기행을 시작하며 가장 아쉬운 점은 모든 역을 기차를 타고 돌아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 여행의 범주에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과 기차가 서지 않는 역들을 대다수 포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차가 서는 역이라 할지라도 운행 횟수가 많지 않아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렵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심천역도 그중 하나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은 역으로 메모를 해놨었는데 열차편을 탓하며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환승 열차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역이지만 내 여행 일정과 맞추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9월의 햇살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던 날, 나는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심천역으로 검색했다. 더 늦기 전에 승용차를 타고서라도 심천역을 가보기로 한 것이다. 2021년, 국가철도공단에서 발행한 『철도역 100』이라는 철도역 탐방가이드북에 따르면 심천역은 1905년에 영업을 시작했으며 1934년에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역 구내가 파괴되었지만 역사는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일본 철도역사 건축의 영향이 뚜렷하게 남아있어 일본 철도 동호회원들이 많이 찾는 역이기도 하다고 밝히고 있다. 자료에서처럼 심천역은 오래된 역답게 세월의 연륜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나 일자형의 지붕과 조화를 이룬 박공지붕 모양이 역사 전체의 단조로움을 없애고, 깊이를 더한다. 누구라도 역의 모습을 본다면 수직의 비례가 선명한, 반듯하고 꼿꼿한 모습의 역사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역 주변은 공원처럼 깔끔하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쾌적한 쉼터를 제공하려 새 단장을 했나 보다. 넓은 광장에 보도블록을 깔아놓은 것이 살짝 아쉽다. 역사(驛舍)가 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주변 환경들도 거기에 맞춰 보존되면 좋겠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광장 중앙에 심어놓은 나무도 시야를 가려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심천역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나무라면 모를까, 굳이 나무를 심어 역 광장이 좁아 보이는 듯한 느낌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면 일부 개념 없는 사람들이 무분별한 주차를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혼자서 추측만 한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게시물과 사진이 눈에 띈다. 특히 출입문 좌측에 붙어있는 행선표가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실제 사용했던 행선표가 아니라 컴퓨터로 실물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출력물이다. 예전에는 열차가 도착하면 역무원들이 기다렸다가 행선표를 반대로 뒤집어서 부착했다. 대부분의 행선표는 앞면과 뒷면이 짝을 이뤘다. 예를 들어 ‘영주→김천’이 앞면이면 ‘김천→영주’가 뒷면을 이루는 식이었다. 물론 역마다 업무처리 절차가 다르겠지만 영주역의 경우는 행선표를 교체하는 것이 번거로운 일거리 중의 하나였다. 단순한 일이지만 빠른 시간 안에 업무처리가 이루어져야 해서 두 사람이 함께 나가야만 했다.
역 근무 인원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 행선표를 돌릴만한 인원이 없어지자 ‘영주→김천’처럼 한쪽 방향으로 표시되던 행선표를 ‘영주↔김천’으로 새로 제작해서 부착하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나는 지금도 업무 처리상 혁신에 가까웠다고 평가한다. 직원의 일손을 덜 수 있었음은 물론, 고객들 입장에서도 특별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천역 벽면을 장식하는 행선표는 모두 예전의 한 방향 화살표 모양이다.
요즘 운행되는 KTX나 ITX-새마을호는 컴퓨터가 행선표 역할을 대신한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컴퓨터 영상으로 표출되어 행선표를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다. 무궁화호가 사라지면 기차의 모든 행선표도 더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비둘기호를 추억하듯 열차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행선표를 이야기하며 지난날을 떠올리는 날도 이제 곧 찾아오지 않을까.
매표창구 앞에 심천역은 직원 혼자서 근무하며 점심시간은 12시 40분에서 13시 40분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마침 내가 방문한 시간이 점심시간에 딱 걸렸다.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에만 승강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문을 연다고 하여 시간표를 살펴보니 열차가 올 시간도 아직 멀었다. 직원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역 구내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점심시간 안내문까지 써서 붙여놓은 걸 보면 혼자서 근무하는 직원의 고충이 고스란히 느껴져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하루 4명이 근무하는 우리 역에서도 매표창구 앞에 식사 시간이라고 붙여놓고 사무실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열차가 없는 시간에 밥을 먹는데도 붙여놓은 안내문은 그냥 안내문에 불과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원이 밥을 다 먹도록 기다려주는 손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과 연결된 벨을 눌러 밥을 먹는 직원을 어김없이 호출한다. 교대로 밥을 먹기도 하지만 관광열차나 휠체어 도우미, 유실물 처리 등의 업무가 겹치면 여유롭게 밥을 먹는 일은 어려워진다.
간혹 뉴스에서 은행원이나 공무원의 점심시간 확보에 대해서 논의가 되는 방송을 볼 때가 있다. 볼일을 보는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지만 남들 밥 먹을 때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 정도는 지켜주는 게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역 구내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직원의 점심시간 보장에 나름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뿌듯해한다.
커피 한잔을 사 들고 조용한 역광장 의자에 앉는다. 시간을 거슬러 서 있는 듯한 역사를 바라보며 커피향을 음미하니 와글거리던 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간이역이 내게 베푸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이라는 선물을 마음껏 들이마시는 시간이다. 피트닥터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린다. 사람의 머릿속에 가상으로 존재하는 감정 컨트롤 본부를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로 이름 붙여진 다섯 감정 중에서 기쁨이가 다른 나머지 네 감정을 이끌어나가고 있다는데 큰 위안을 받았었다. 심천역 광장에 앉아있으니 내 머릿속의 감정컨트롤 본부에서 기쁨이가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일상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까칠이와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소심이도 이 순간만큼은 그로기 상태다.
커피를 팔던 곳에서 흘러나오던 신계행의 「가을사랑」이라는 노래가 입안에서 맴돈다. 그대 사랑 가을사랑 단풍 일면 그대 오고, 그대 사랑 가을사랑 낙엽 지면 그대가네……. 마음속에 살며시 내려앉은 행복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