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참호

퇴사일지 6

by Juas




언제나 도망칠 곳이 있었다. 마지막 참호를 마음속에 두고 산다는 것은 마음의 안정이 되기도 하는 반면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을 핑계가 되기도 한다. 그 참호가 사실은 부모님의 마지막 남은 공간이며 이제 내가 숨길 수 있는 건 겨우 발치뿐이라는 것을 매년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사라지는 마당의 나무들을 보며 서서히 알게 됐다.


세 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우리 모두 부모에게서 평균치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시골의 생활은 마치 평행 우주와 같아서 고향을 생각하면 80년대 아침 드라마 속을 살다 온 것처럼 도시와의 간극이 크게 느껴진다. 그들의 열망 속엔 안타깝게도 자식의 성공은 한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좋은 학벌과 대기업으로의 취직, 능력 있는 배우자 따위 말이다. 부모의 많았던 재산은 본인들의 젊은 혈기를 치우는 데 모두 쓰였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우리는 도시에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모두 30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 속도로 땅을 딛고 사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어리석은 셋이다. 우리는 몹시 순진하고 느긋하게 자랐다. 더러운 것을 멀리 하는 태도로서가 아니라 마치 두 다리가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알아도 뛰고 싶지 않아서일까, 필요치 않아서일까. 진심은 전자인데 후자인 척 마음을 속이고 사는 걸까.


자연스레 30대 초반에 약속이나 한 듯 세 남매가 모두 줄줄이 회사를 그만뒀다. 우리는 버텨야 될 이유를 찾질 못했다. 언니는 요가에 빠지더니 인도로 떠났고 나는 마음의 고향인 영국으로, 동생은 아직 세계 여행 중이다. 그곳에서 다들 무엇을 느끼고 돌아왔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땐 여기가 아닌 곳에 나를 두고 내가 아닌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회사 생활은 언제나 오물을 뒤집어쓰고 사는 것 같았으므로. 그리고 어딘가에 누군가 파놓은 참호가 있길 내심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을 리 만무했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나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회사를 갔고 집세와 이자를 냈고 다시 마음속에 쌓인 티끌들이 산처럼 쌓일 무렵 작은 입김에 어김없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겐 더 이상의 참호도 물러설 곳도 없게 됐다. 이젠 마당 한가운데 심긴 고고한 목련 나무 한그루만 남기고 고향집은 지워버려야 할 때임을, 뭉툭한 마음을 날카롭게 다듬고 앞에 있는 단단한 흙을 엎어야 할 때임을 느낀다. 앞으로도 내가 쉴 곳은 누구도 만들어주지 않음을 알고 있고 이 많은 모순과 슬픔과 거짓을 매일 목도함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부대껴 오늘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매일 도망치는 나보다 훨씬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나도 이젠 이 틈에 섞여 똑바로 서 있어 보려고 한다. 더 이상 앙앙 울며 나자빠져 있지 않겠다. 이것이 나의 2023년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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