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여주인공 다림은 정원을 ‘아저씨’라고 부른다. 요란하지 않게 배려하고 부드럽게 웃어주는 아저씨 정원이 점점 좋아진다. 20대의 풋풋한 미녀가 아저씨의 푸근함에 이성적으로 반하는 일은, 현실에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원 같은 매력을 지닌 아저씨가 현실에 없다는 뜻은 아니다. 눈 씻고 찾아보면, 우리 주변에도 100퍼센트에 가까운 아저씨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십 대 초반에 내가 공익요원으로 복무했던 곳은 각종 아저씨들의 전시장 같았다. 내 복무지는 군청 환경위생과였다. 삼십 대 중반부터 오십 대까지 아저씨들은 서른 명 남짓 되는 사람들 중에서 수적으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내 친구들이 군대에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선‧후임들과 빡빡 기고 뒹굴면서 더 단단해져 갈 때, 난 다양한 아저씨들을 지켜보며 조금 다른 루트로 인간을 알아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이 든 남자를 예사로 부르는 말이라,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한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아저씨들을 들여다보면 ‘아저씨’라는 말만으론 어떤 개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저씨라는 말 앞엔 적당한 수식어가 필요하다. ‘키다리 아저씨’나, ‘키 작은 아저씨’처럼.
난 다양한 아저씨들과 생활하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채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내가 언젠가 다다르게 될 지향을 가늠해보기도 하고, 저런 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만난 첫 번째 좋은 아저씨는, 삼십 대 후반의 A 주사였다. (지금은 공무원을 지칭할 때 주무관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이지만, 그 당시엔 주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었다.) 그는 내가 군청에 머물도록 한 공익요원 관리자였다. 우리 동기는 다섯이었다. 그중 둘만 군청에 남고, 나머지 셋은 각 읍면사무소로 나가야 했다. 나와 내 동기 하나가 무던하고 순해보였던지 그는 우리 둘을 군청에 남겼다.
A 주사는 유능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다. 부드러운 성품에 추진력과 리더십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신뢰했다. 내뱉는 말은 신중하고 간결했다. 그렇다고 딱딱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매번 적절한 말을 찾아냈고, 우스갯소리를 건넬 줄도 알았다. 그는 내게 몇 마디의 말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돈 많은 부자로 사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럭저럭 잘 사는 건 어렵지 않아.”
스무 살 초반의 내게도 그 말은, 참 멋있게 들렸다. 철학이라고 말하기엔 거창하지만, 그는 분명 자기 나름의 신념 비슷한 걸 갖고 있었다.
한 번은, 면사무소로 내려간 내 동기 중 하나가 공무원과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A 주사가 그 동기를 군청으로 불렀다. 나와 A 주사는 그 동기와 함께 휴게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그는 동기의 갈등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이 물을 쏟으면, 다른 사람은 스펀지가 되어 줘야 하는데, 둘 다 물을 쏟으면 답이 없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그의 삶이 되어버린 철학이었다. 누구나가 물을 쏟는다. 고의일 수도, 실수일 수도 있다. 내가 물을 쏟을 때 상대방이 스펀지가 되고, 반대로 상대방이 물을 쏟을 때 내가 스펀지가 되는 그런 사이. 모두가 그런 사이가 될 수 없을까. 서로 약속 대련하듯, 그렇게 어긋나지 않게 합을 맞추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살아가는 동안, 화가 나고 누군가와 대립하고 갈등할 때, A 주사의 말은 불쑥불쑥 내 마음에서 솟아올라 나를 돌아보게 했다.
A 주사가 주변에 주었던 신뢰의 근원은 바로 삶으로 정립한 자신만의 철학이었다. 그건 그 사람에게 일관성을 부여한다. 신념을 가진 부드러운 신사. 그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군청에서 만난 두 번째 좋은 아저씨는, B 주사였다. 그는 조용하고 묵묵하게 자기 길을 가는 개미 같았다. 내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계장이 사무실이 떠나갈 정도의 큰 목소리로 내게 고함을 질렀다. 자신이 필요할 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화근이었다. 복무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라 낯선 환경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을 때였다. 계장은 목소리 크고 흥분도 잘했다. 나중엔 그런 성향에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지만, 열다섯 살 이후로 누군가의 화를 이렇게 받아본 적 없었기 때문에 난 적잖이 당황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B 주사가 일어나서 인쇄물을 갖고 돌아오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내라.”
짧은 시간, 그는 속삭이듯 내게 말하곤 자기 자리에 앉았다. 당황스러움과 분노, 그리고 수치심이 뒤범벅된 내 마음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그때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그 손은 세계의 온기를 대표하는 것 같았다. 세계는 아직 너를 위로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난 B 주사를 통해서 적절한 한 마디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질 수 있는지를 느꼈다.
세 번째로 만난 좋은 아저씨는, A 주사가 다른 과로 발령 나고 그 자리로 온 내 두 번째 사수 J 주사였다. 그는 사십 대 초반의 나이였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푸근한 구석이 있었다. 드라마 <철인왕후>엔 “노타치 합시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미래에서 온 남자의 영혼이 몸에 들어간 왕후는 자꾸 다가서는 철종이 부담스러워서, ‘노타치 합시다’라고 말하며, 그건 ‘각자 행복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J 주사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 노타치 합시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공익요원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거나 자신이 처리해야 할 업무까지 요구하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그는 공익 요원이 해야 할 일 이상의 것을 일절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일개 공익 요원도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대했다. 난 그를 통해 적절한 선과 거리를 지키는 것, 사적인 이익이나 관심을 충족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배웠다. 오지랖을 떨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아저씨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필요한 건, ‘노타치’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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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들의 전시장엔 좋은 아저씨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앞서 잠시 말한 K 계장은, 지양해야 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아저씨였다. 그는 자신의 일을 떠넘기고 밖으로 나도는 일이 잦았다. 컴퓨터를 조작하는 일에 미숙했던 그는 어느 날 나를 불러서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적어놓은 메모를 군청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라고 했다. 그 게시판은 <칭찬게시판>이었고, 그가 적어놓은 메모는 자화자찬이었다. 어떤 업무 성과를 칭찬하고 군수가 그 공로를 치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다른 사람이 올리는 것처럼 적었다. 그걸 타이핑하면서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했다. 그렇게 한다고 유능한 아랫사람들이 이룬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돌릴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을 좀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타인이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엔 그런 저런 인간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른 이들에게 애초부터 큰 기대를 품지 않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누군가는 부끄러운 자신을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젊은 날, 그는 누군가가 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보면 낯이 뜨거워졌을지도 모른다. 타인이나 자신의 어떤 행동을 견디는 일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부끄럽고 몰지각한 행동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이 무뎌졌다.
나이가 들면 무뎌지는 감각도 있지만, 발달하는 감각도 있다. 누군가는 나의 안위를 위해 주변 사람들을 체스의 말처럼 움직이는 감각이 발달한다. 누군가는 주변의 미숙함에 눈높이를 맞출 줄 알게 된다. 상반된 감각 같지만, 이것들은 누적된 경험이 비료가 되어 자란, 같은 토양에서 난 감각들이다.
L 주사는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30대 후반의 그는 말이 많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일에 입을 대곤 했다. 마초적인 면이 있어서, 자신이 관리하는 공익 요원들이 군기가 빠졌다며 지하 창고로 불러 훈계하기도 했다. 선임들에게 후임 구타를 은근히 종용하기도 했다. 난 다른 계 소속이었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땐 같이 불려 내려가서 구타당하기도 했다. 군대의 구타가 금지되기 시작하던 시기였지만, 후방 중의 후방인 군청 공익요원의 세계에선 여전히 복무의 일부였다.
그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일을 시키는 건 물론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지르기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뇌물 사건으로 한 번 옷을 벗었다가 다시 들어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그의 이미지가 어떤지는 가늠할 수 있었다.
유부남이었던 그는 우리 과에서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여자 공무원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여성의 아픔과 상실을 이용해 끈덕지게 접근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엔 어리숙해 보이는 내 동기에게 구애 편지 비슷한 걸 전달하라고 시켰고, 그의 바람과 달리 내 동기는 눈치가 빨랐다. 동기는 그 날 내게 그 일을 말해주었다.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었다. 신뢰하기 힘들고, 징그럽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인간.
사무실의 어떤 아저씨는 주변에 냉랭했고 자기 일에만 몰두했다. 어떤 아저씨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대할 때 태도가 확연하게 달랐다. 어떤 아저씨는 두 집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내연녀의 이사를 위해 공익 요원을 동원하기도 했으니까. 또 어떤 아저씨는 나쁜 점도 없었지만 배울 점도 없었다. 별의별 아저씨들을 다 겪어보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아랫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인격이 고매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걸 생각해볼 때, 아랫사람의 위치에서 본 아저씨들의 모습은, 그들의 실상에 꽤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아저씨들의 전시장에서 100퍼센트에 근접한 아저씨들을 만났던 건 행운이었다.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그 얼굴을 닮아갔던 소년처럼, 난 수시로, 삶의 현장에서 타인들을 존중하고 배려했던 아저씨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한 부분이라도 흉내 내려할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다가 마침내 그런 아저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아저씨의 시기는 길고, 나도 누군가에게 100퍼센트의 아저씨로 기억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