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소 곰탕을 좋아하는 이유

괴리 없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by 송광용

학교 급식에서 곰탕이 나올 때만큼 기분 좋을 때는 없다. 둘둘 말린 소면 위에 편편한 쇠고기가 얹힌 그릇을 집어 들어, 하얀 사골 국물을 한계치까지 들이붓는다. 곰탕 국물은 걸을 때마다 그릇의 경계까지 사정없이 흔들린다. 앞에 누군가라도 갑자기 나타나면 잰걸음으로 피하느라 흰 국물이 그릇을 타고 흐르기도 한다.

자리에 앉아 반 숟갈 정도 담아온 다진 양념을 풀면 하얗던 국물은 이내 주황빛으로 물든다. 혓바닥을 따꼼따꼼하게 흥분시킬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먼저 한번 맛본다. 쌀밥을 국물에 투하하고 숟가락 바닥으로 꾹꾹 눌러준다. 숟가락을 뜨면 국물과 한 몸이 된 밥 위에 소면이 반쯤 걸쳐 딸려온다. 삽으로 뜬 흙을 던지듯 국물 밥을 입 안으로 던져 넣고 반쯤 대롱거리는 소면을 마저 흡입해 올린다. 입 안이 가득 차면서, 왠지 모르지만 온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평소 곰탕이 내 최애 음식인 건 아니지만 급식에서 나오는 곰탕은 거의 최애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 뒤엔 조금 씁쓸한 진실이 숨어있다. 곰탕이 급식의 최애 음식이 된 건, 바로 곰탕이 급식소에서 음식 전문점과의 괴리가 가장 적은 음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난 돼지갈비찜을 좋아하지만 학교 급식에서 나온 돼지갈비찜을 맛있게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언제나 잡내가 잡히지 않은 비릿한 고기를 먹곤 했던 것이다. 음식 전문점과 급식소에서 각각 좋아하는 리스트가 다른 이유다.

인간사도 닮은 구석이 있다. 자신이 속한 크고 작은 사회에서 괴리 없이 살아가기란 참 어렵다. 나 자신을 맛 좋은 고급 돼지갈비찜쯤으로 여겼는데, 내가 속한 어느 곳에선 잡내를 잡아내지 못한 갈비찜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가 괴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끔 그런 의문이 떠오른다.
"저 인간, 저렇게 행동하는데, 여기서만 그런 걸까. 집에선, 혹은 다른 집단에선 어떤 모습일까."

나만 하더라도 괴리가 큰 인간이다. 학교에서 난, 시스템을 교란하며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는 독단적인 관리자나 수뇌부를 보면 입에 거품을 물곤 한다. 부당하거나 불필요한 잡무를 만들거나 중요한 일을 구성원의 의견 수렴 없이 해치우는 걸 보면 입에서 불이 나올 거 같다. (내 이름 탓인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서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평소에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있길 좋아하는 성격인데, 상급자에게 덤비는 나 자신을 보면 헷갈릴 때가 있다. 뭐가 진짜 내 모습인지. 난 오히려 동료 교사나 아랫사람에 대해선 눈치 보고 조심하는 편이다. 관리자와 얼굴을 붉히고 관계가 서먹해지는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지만, 동료와 그렇게 되는 건 두려운 일이다.

나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동료들은, 내가 집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얘기하면 놀라곤 한다. 학교에서 보이던 전투력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아내와 두 딸에게 꼼짝 못 하는 모습에 괴리를 느끼는 것이다. 내 전투력은 주로 상급자 앞에서 발현된다. 마음은 늘 조용히 지내고 싶다. 그게 내 성향에 더 맞다. 민주적 시민 양성이 목표 중 하나인 학교가 지극히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곤 하는 아이러니가 없는 곳에서 평화를 찾고 싶다. 대게, 그 평화를 위해선 당장에 평화로워 보이는 분위기를 깨야 한다. 그 모순적인 행위가 대단한 변화를 부를 거란 보장은 없지만, 목소리 하나가 나오면 윗선에서도 뭔갈 결정할 때 아무래도 한 번은 더 고민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

언젠간 나도 곰탕처럼 장소에 따라 큰 괴리가 없는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어느 곳에선 헐렁하고, 어느 곳에선 날이 서있다. 어느 곳에선 너그럽고, 어느 곳에선 깐깐하다. 어쩌면, 곰탕 같은 인간은 영원히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속한 사회가 1로 줄어들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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