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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Feb 04. 2019

#7. 삶은 그리 무탈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신영인 님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3인칭 주인공 시점>은 1시간의 1:1 인터뷰 진행 후 짧은 소설을 써드리는 프로그램입니다. 소설은 인터뷰이의 동의를 받아 익명화되어 배포합니다. 현재 2월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배포된 소설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삶은 그리 무탈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1. 

“어르신, 아가씨 오셨습니다" 

“영인이 왔느냐? 마침 네가 따르는 장영실 영감이 와 계신다.”

“장 영감님 안녕하셨어요? 여름에 만드신 자격루를 임금님이 엄청 마음에 들어하셨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허허, 너한테까지 그 소문이 들리더냐?”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요. 직접 보고 싶은데 제가 궁에 들어갈 일이 없네요. 저도 영감님처럼 궁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은데 여자라서 지원할 수도 없고... ”

“아이고, 꿈이 큰 소녀로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란다. 나도 천한 신분에서 공을 세워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으니.. ” 

“네,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니… 저는 계속해서 야망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열여섯이 되는 영인은 한양 육의전 중 하나로 종이 유통에 있어서 조선 최고의 실세 지전의 대행수 신봉석의 딸이다. 양반이 아니고, 사농공상 서열로 따지면 네 번째인 상인이긴 하지만, 한양 양반 중에 신봉석한테 종이 한 번 사보지 않은 양반이 없을 정도로 봉석은 먹 좀 갈아본 양반들과 친분이 두텁다. 서책을 만드는 사람들과도 친한 덕분에 딸인 영인은 어릴 때부터 서책을 많이 보고 자랐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사마천의 사기를 백 번 정도 독파한 역사광이었다. 이를 두고 어른들은 영인이 양반가에서 아들로 태어났으면 뛰어난 사관이 되었을 거라고 하며 안타까워했다. 정작 영인 자신은 남자로 태어났어도 출세에 큰 뜻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배를 굶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넉넉한 집안에 태어난 것, 특히 여자임에도 서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것에 대해 감사했다. 


2. 

“얘들아, 잘 들어봐. 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고려가 있었고, 고려 전에는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어. 더 전에는 고구려랑 백제라는 나라도 같이 있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어. 그렇지만 고구려의 후예들이 곧 발해를 세웠지. 지금은 우리나라 위로 명나라가 있지만, 이전에는 몽골족이 다스리는 원나라가 있었지.”

영인은 종종 동네의 어린 소녀들을 자기 방에 모아서 역사 강의를 해주고는 했다. 

“언니… 우리 역사 얘기하지 말고 인형놀이하면 안 돼요?”

어물전 딸인 홍단이 하품을 하며 인형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인형놀이? 나쁠 것 없지. 시대는 언제를 배경으로 할까?”

“홍단아, 인형놀이하면 영인 언니의 역사 얘기가 더 길어질 뿐이야. 언니, 그냥 다과 먹고 마당에서 술래잡기하면 안 돼요?”

명주를 유통하는 상인의 딸인 금이가 술래잡기를 제안한다.

‘흥, 이래서 어린애들이랑은 대화가 안 통한다니까. 재밌는 얘기를 해줘도 재밌는 지를 모르지.’

영인은 속으로 생각하며 한숨을 폭 쉰다. 그러다가 창밖을 보는데, 한 개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누구냐!”

영인은 창문으로 몸을 날린다. 

“으악!!!!”

영인의 방안을 훔쳐보고 있던 남자가 영인의 몸통 공격에 속절없이 쓰러진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남자는 영인이 다치지 않게 팔로 감싸면서 넘어진다. 

“영인 누님, 저예요. 김윤성"

“으잉??? 윤성이구나. 난 또 누구라고”

영인은 재빨리 일어나서 치마를 턴다. 

“왔으면 기별을 줄 것이지, 왜 방 안을 훔쳐보고 난리더냐"

“아니 그게… 누님이 역사 이야기해주는 게 너무 좋아.. 아니 재밌어서요.”

윤성은 대명관계 무역의 큰손 김부용의 셋째 아들로, 올해 열네 살이 되었다. 가끔 조선에서 제작할 수 없는 고급 종이를 찾는 양반의 주문을 맞추느라 신봉석은 김부용과 거래를 하고는 했다. 역으로 조선의 고급 한지를 명나라에 수출하기도 했던 김부용은 종종 윤성을 직접 심부름 보내 신봉석의 지전에서 종이를 사 오게 했다. 윤성은 어릴 때부터 지전에서 놀고는 했던 영인과 종종 마주치고는 했다. 영인은 독선생에게 글을 배우는 윤성에게 요즘 뭘 배우는지 꼬치꼬치 물어서 비슷한 책을 구해다가 읽고는, 항상 윤성에게 ‘넌 이거 모르지' 하면서 문제를 내고는 했다. 학식에 있어서 영인에게 놀림을 당하는 게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윤성은 오히려 영인의 식견에 감탄하며 따르다가 언젠가부터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더냐? 홍단이랑 금이이는 내 얘기가 재미없다고 난리인데. 너라도 재밌게 들어주어 기쁘구나. 오늘은 무슨 일로 우리 집에 왔니?” 

“저 그게… 누님한테 편지를 한 통 썼습니다.”

“편지?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혹시 연서는 아니지?”

영인이 농으로 던진 말에 윤성은 귀까지 빨개져서 말을 더듬다가 도망치듯 떠났다. 영인은 바로 편지를 열어보았다. 


‘영인 누님 보십시오. 

누님과 알고 지낸 지 어언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더 늦게 제 마음을 밝히면 누님이 다른 놈에게 시집을 갈까 봐 용기를 냈습니다.

누님을 연모합니다.

누님은 제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에 가장 어여쁜 분입니다. 

- 윤성’  


처음 편지를 보고 영인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게 뭐야? 새로운 장난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편지를 읽고 그동안의 윤성의 행동을 생각해보니, 좋아하는 여인을 대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영인의 나이 열여섯. 집안에서 혼사를 서두르는 여자애들은 열세 살부터 혼인을 하기도 했다. 신봉석이 영인을 아끼는 마음에 혼사를 급하게 추진하지는 않았지만, 영인은 올해부터는 아비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한테 시집가는 도박을 하느니, 윤성 정도야 나쁘지 않은 배필이었다. 사실 윤성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괜찮은 배필감으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용모가 단정하고 인성이 바른데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를 자주 출입해 명나라말도 잘했다. 무엇보다 김부용의 집안은 상인 가문이라면 누구나 연을 맺고 싶어하는 집안이었다. 김부용의 세 아들 중 유일하게 미혼인 윤성과 혼인을 맺고 싶어하는 집안이 꽤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영인은 윤성의 집안과 조건보다 영인이 가장 어여쁜 사람이라며 고백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다는 말은 질리도록 들었지만 어여쁘다는 말은 부모님 외에는 거의 듣지 못했던 영인이었다. 

‘어린 주제에 여심을 얻는 방법은 좀 아는구나' 

영인은 답서를 적어 하인을 통해 윤성에게 전달했다. 자신의 배필이 될 영광을 주겠노라는 내용을 미사여구를 잔뜩 붙여 적은 글이었다. 


3.

“어머니, 영인입니다.”

“들어오너라.”

영인은 안채에서 어머니를 만나 오늘 윤성에게 연서를 받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도 여인으로서 사랑받고 살 수 있겠구나.” 

영인의 어머니, 이씨는 종이 제조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신봉석에게 시집오게 되었다. 첫째로 영인의 오빠인 영재를 낳고, 14년 후에 늦둥이로 영인을 낳았다. 시대 치고 많은 자식을 둔 것은 아니었으나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직접 키우면서 엄마로서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늦둥이로 태어난 영인은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원하는 건 대체로 이루며 살았다. 이씨는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운 후에 취미로 서예와 그림을 시작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 영인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인생의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였는데, 그런 딸이 어느덧 자라 시집을 간다고 하니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래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의 집안에 셋째 며느리로 가는 거라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별 탈 없이 혼사가 추진되기를 바랐다. 


4.

안타깝지만 영인의 삶은 그리 무탈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윤성이 연서를 전달하고 일주일 뒤, 윤성의 집안에서 혼담을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때에 신봉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평균 수명에 비하면 갓 쉰이 된 신봉석의 죽음이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나, 별다른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다고 생각되던 사람이 자다가 죽은 채로 발견되니 괴이하게 생각되기는 하였다. 특히 신봉석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전의 새로운 대행수를 뽑는 자리에서 봉석의 아들인 영재가 아니라 평소 봉석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차덕원이 두 표 차이로 선출되면서, 봉석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타살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저자에 떠돌았다. 

봉석이 사망하고 영재가 대행수 자리를 잇지 못하면서, 신 씨 집안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혼담을 준비했던 윤성의 부모는 봉석이 죽은 마당에 딱히 이익을 얻을 것도 없는 집안의 여식을 며느리로 맞을 수 없다며, 혼담을 없었던 이야기로 하자고 윤성에게 이야기했다. 


5.

“괜찮으십니까"

윤성은 삼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피폐해진 몰골로 영인을 찾아왔다. 

“너라면 괜찮겠냐. 너도 딱히 괜찮아 보이지는 않는구나"

“... 죄송합니다, 누님"

“아무래도 우리는 이번 생에 인연이 아닌 것 같다"

“누님… 벌써 마음을 접으신 겁니까"

“난 지금… 한가하게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다. 오라버니에게는 부인과 자식이 딸려 있다. 어머니는 내가 돌봐야 할 것 같다.”

“... 제가 좀 더 부모님을 설득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안될 일이야. 너네 부모님이 이상한 게 아니라,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는 굳이 나를 며느리로 맞이하지 않을 거야. 괜히 애쓰지 마.”

“제가 누님을 보쌈이라도 하면 어떨까요.”

“푸하하하하, 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어버렸구나. 말했다시피, 난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 네가 나를 생각한다면 서원 다니면서 나한테 일거리나 좀 주면 좋겠구나. 책 필사도 잘할 자신 있고, 좀 위험하긴 하겠지만 숙제 대행도 할 수 있을 거야.”

“알아볼게요"

“그래, 너라도 좋은 배필 만났으면 좋겠다"

윤성은 슬프게 웃음 지으며 돌아갔다. 영인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6.

‘자, 그럼 나는 이제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아볼까' 

영인은 신봉석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확신했다. 저잣거리에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지 않게 막았지만, 봉석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것은 영인이었다. 아침 문안인사 겸 윤성과의 혼사를 논의하기 위해 일찍 찾아갔다가 죽은 봉석을 발견했다.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평소 봉석의 잠버릇이 험하다고 어머니한테 여러 번 들었는데, 그날 봉석은 시체처럼 단정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또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 났을 때, 영인은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가족들과 하인들이 달려왔고, 영인은 실신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6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런데 그 빠른 시간 안에 아버지의 장례가 준비되고 있었다. 영인은 말도 안 된다고, 부검도 하고 사인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지만 어머니와 오라비는 황망해하며 정신을 놓아버렸다. 영인이 뛰쳐나가 관아에 가서 친하게 지내던 다모 지연을 데려왔다. 하지만 그 사이 누군가의 지시로 인해 시신에 대한 염이 진행되고 있었다. 영인은 지연과 함께 아버지를 다시 봤다. 주먹이 펴져 있었다. 염을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왔을 때는 이미 손이 펴져 있었다고 했다. 지연은 신봉석의 손을 찬찬히 살피며 냄새를 맡아보더니, 희미하게 국화향이 난다고 했다. 


7.

영인은 범인 후보를 추려보았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새로 대행수가 된 차덕원과, 차덕원이 대행수가 되면서 이득을 보게 된 인물들이었다. 지전 내에 약 5명 정도가 있었다. 그 외에도 봉석이 원한을 샀을 만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봉석은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고, 주고받는 것을 명확히 하는 사람이었다. 덜 줘서 서운하게 만들지도 않았고, 더 줘서 질투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일단 차덕원을 비롯한 5명의 당일 행적을 조사했다. 얼마 조사하지도 않아 그들의 당시 행적은 명확해졌다. 그날은 명화루에서 상단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지연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봉석은 열한 시경쯤 자리를 떴고, 나머지 상단 인물들은 새벽이 다되도록 명화루에서 놀고 마셨다. 다른 사람을 영인의 집에 잠입시켜 봉석을 죽이는 가능성도 있지만, 하인들이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영인네 집을 이렇게 흔적도 없이 다녀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8.

혼란스러운 상태의 영인은 집을 나가 저잣거리를 쏘다니며 바람을 쐬었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익숙한 대문이 보였다. 명패를 보니 김부용의 집이었다. 

‘어그러진 혼사에 미련이 남아 있었구나' 

쓸쓸하게 돌아서는 영인의 옆으로 한 가마가 한 채 지나갔다. 가마에서 내린 남자는 당당한 걸음으로 김부용의 집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꽃향이 났다. 

‘국화향…?’

생각해보니 신봉석이 죽어서 이익을 얻은 건 지전 내의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신봉석의 죽음으로 영인의 혼사가 어그러졌고, 이로 인해 김부용과 혼사를 맺고 싶어하던 집안들에 다시 기회가 생겼다. 이 모든 걸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영인은 범인을 알 것 같았다. 

조선시대의 첫 여탐정이 탄생한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끝>




- 인터뷰일 : 2019년 1월 9일 

- 인터뷰이의 소설 만족도 : 4.181592/5점

- 소설을 본 인터뷰이의 소감 :

무엇보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단편 소설인 줄 알았는데 장편 소설의 첫 챕터라는 느낌의 글이었어요. 조선시대라는 환경적 한계를 주인공이 앞으로 어떻게 극복할지 기대가 됩니다. 4점 이상인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인터뷰 시간 그 자체 때문입니다. 명선 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성찰이나 회고가 아닌 자신의 과거를 관찰(?)하는 묘한 경험이 더 인상에 남았습니다. (지인들이 이 소설을 읽고 저의 어떤 면이 이 소설에서 잘 보이는지도 궁금해지네요.)





글/김명선

- 수원에서 인터뷰서점 '리지블루스' 운영

- lizzyblues0330@gmail.com /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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