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리자, 선의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악의

직장동료가 조언할 때, 악의와 선의 구분하기

by 김반장

어렸을 적 손이 아주 찬 아이가 있었다.


그 작고 마른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연약한 뼈에 늘러붙은 살가죽은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을 띠었다. 심장병이라 했다. 아이의 심장이 펌프질을 잘 하지 못해 서너 걸음만 걸어도 뜀걸음이라도 한 듯 숨이 몰아쳤다. 매일 아침엔 딱 자기만한 어머니에게 업혀 학교의 계단을 올랐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학교는 빠짐없이 왔고 생활기록부 식으로 말하자면 매사에 의욕이 넘쳐 원만한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친구의 실없는 우스갯 소리에도 꺄르르 티없이 웃을 줄 아는 순수함과 체구에 맞지 않는 큰 교복을 입고도 자신만만함을 잃지 않는 그 품위를 고작 '원만한 학교생활'이라고 표현해도 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녀와 그리 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벼운 체증의 기미처럼 내 가슴 언저리에, 어쩌면 등 가까운 곳 어딘가에 걸려 있는 기억이 있다.



여느 날과도 다르지 않았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설 때였다.


"아니, 아무리 아프다 해도 자기 맡은 청소는 제대로 해야지."


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타공인 정이 많아서 학원 선생님 결혼식에서도 펑펑 울었다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매사에 자신만만했다. 말도 잘하고, 웬만한 거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당당함이 있었다. 그 친구는 마치 색색깔의 깃발을 휘날리며 선두를 달리는 여전사라도 된 듯, 신발장 청소 담당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몇 마디 더 붙이고는 자신의 운동화를 꺼내 신발장 위에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신발을 내려 놓았다. 아니, 신발로 신발장을 때렸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신발장 위에는 운동화에서 추방된 진흙 부스러기들이 속절없이 널브러졌다.


신발장 청소 담당은 다름아닌 그 아픈 아이였다.


아픈 아이는 손이 많이 가는 존재다. 함께 단체생활을 하다 보면 그 아이가 느리게 해내는 역할이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잘 웃든, 얼마나 성실하든 우리에게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그 아이의 존재는 '아픈 아이'라는 정체성의 동심원에 견고하게 갇혀 있었다. 우리는 그녀가 가진 개성을 그 정체성에 가두고 그녀를 '돌보는 시스템'에 우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약자'의 위치가 만들어내는 무언의 명령에 익숙해져 갔다.


그런데 한 친구의 목소리가 그 견고한 시스템을 쩍 갈라놓은 것이다. 자신만만한 아이의 운동화가 찰싹하고 신발장을 때리는 순간, 우리가 지키고 있었던 '아픈 아이'의 영역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이 잘못된 시스템이 아니었나 하는 그런 의문이었다. 청소 정도는 그 아이 혼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왜 저 아이를 도와야 하지? 우리가 왜 그 아이를 지켜줘야 하지? 이런 생각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대가리를 쳐드는 뱀처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나도 운동화를 꺼내 신발장 위를 찰싹 때렸다.

내 친구도 푸른색 운동화를 꺼내 신발장 위를 찰싹 때렸다.

누구의 운동화에서 떨어져 내린지 모를 진흙 부스러기들이 신발장 위로 정신산만하게 흩뿌려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우리는 진정 '정의감'에 불타올랐다.


그 때 그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혁명적 순간의 불길에 비하면 그녀의 존재는 하찮게 느껴졌다. 무언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면 기실 무언가가 아주 잘못 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격정적인 기분에 취해 잊은 것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날 나와 내 친구들이 정의를 지키고픈 활력에 취해 잊어버린 것은 비단, 친구들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삼켰던 그 아이의 미소만이 아닐 것이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남긴 긴 편지에는 1번 부터 45번까지 모든 아이들의 이름과 그녀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 소중한 친구들의 각기 다른 개성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의 반 아이들은 그녀가 병원에서 한 자 한 자 눌러 쓴 편지를 오래도록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 날 내가 자신만만한 친구의 말을 믿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한 번이라도 그 말을 의심했다면 어땠을까.

그 아이가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부족했다고 해도 그녀의 잘못은 아니라고, 조금은 불편해도 우리가 하면 되는 거라고 말해줬으면 어땠을까.


거짓도 100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확신에 찬 말은 다 믿는다. 나 역시도 그랬다. 나는 순진하다고 자평하지만 멍청함에 가까운 단순한 뇌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믿는 편이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구분할 노력도 필요도 없이 눈앞에 있는 사람 말을 그냥 믿어버려도 세상은 돌아갔다. 혹시나 서로를 악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도 만나면 그저 황희 정승 이라도 된 양 앞에 있는 사람을 편들며 어설픈 중립만 지키면 그뿐이었다. 중립이라는 무관심으로 무심하고 무탈하게 살다 보니 세상이 기울어진 운동장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악한 사람은 없다는 나태한 믿음에 가려 악한 행동을 방관하고, 때로는 동조했다.


세상의 가해자들은 다들 비슷한 말을 한다.


자신이 더 당한 것이 많아서 억울함에 그랬다던가, 피해자가 공동생활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해 오히려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던가, 피해자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던가. 다들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학교나 가정, 폐쇄적 관계 내에서 일어난 범죄의 가해자들은 특히 그들의 신념이 확고하다. 그들은 일종의 '정의감'에서 비롯된 거사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하찮게 여긴 그들의 위대한 논리는 '참작사유'라는 말로 보호 받기도 한다.


결과야 어찌됐든 그들은 '악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불편함을 부당함으로 착각하고 '정의롭게' 항쟁했던 나와 내 친구들처럼.

이처럼 세상의 모든 악의는 선의의 탈을 쓰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선의의 탈을 쓴 악의', 혹은 '불안한 선의'를 자주 마주하게 된다.

나를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상관이 인사발령 받았던 날, 어느 선배는 나에게 선의로 '니가 착한 아이인데, 그럴 리가 없는데,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성희롱의 피해자라고 주장한 것이 나쁜 짓이었다는 뜻이었다. 또 다른 선배는 '네가 마음고생이 심했겠다. 그런데 네가 착하기는 한데, 너무 마음이 약한 것도 사실이더라. 물론 단점도 있지만, 네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걸 어쩌겠노?'라고 말했다. 성희롱이 상사의 잘못이 아니라 내 마음이 약해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선의의 탈을 쓰고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장 동료가 이처럼 조언을 빙자한 비난을 할 때,

선의와 악의는 어떻게 구분할까?

먼저, 악의는 모호하고 출구가 없다.

그 사람에게 나에게 선의로 조언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에는 건설적인 방향이 있게 마련이다. 조언을 들으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업무상 이런 부분이 불편해요. oo씨가 이런 쪽으로 조금 배려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라던가 '이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기분이 안 좋아요. 그런 말씀은 삼가주셨으면 좋겠어요.'처럼 듣다보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각이 나오는 것이 진정한 선의다.


하지만 악의는 그렇지 않다. 들으면서도 이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짚어 내기가 힘들다.

예를 들면, 한 선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일할 의지가 없다. 사람들이 너에게 일할 의지가 없다고 말한다. 누가 그러던데 네가 선배한테 일거리를 던져 놓고 그냥 퇴근했다더라.' 참고로 말하자면, 세 번째 문장은 나와 이름이 비슷한 다른 사람이랑 헛갈려서 오해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은 '앞으로 일 할 의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고 외치는 것, 내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변명하는 것, '선배님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시잖아요'하고 싸우는 것 등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다. 그저 그 선배가 원하는 것은 앞으로 그 선배의 마음에 들도록 내가 알아서 기는 것이다. 그것은 정해져 있는 행동 패턴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한다. 며칠 후 내가 작은 실수라도 하게 되면 그 선배는 나를 불러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너 행동 조심하라 그랬지.'

더더구나 이 선배의 말에는 '사람들'이라는 총알도 장전되어 있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과 과거의 일을 끌어내서 나와 기싸움을 하고 고립시키려는 전략이다.



그 다음으로, 악의는 내 변명을 듣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변명이라는 벽돌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노동법 전문가이신 은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변명이 변명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변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선의의 동료가 나에게 조언을 한다면 그것은 앞으로 협력을 잘 하고자 하는 목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기분 나쁜 점을 나에게 이야기 하면, 내가 '기분나쁘게 했다면 미안해요'라는 사과와 함께 내 상황을 변명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건설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향이다.

하지만 악의의 조언자는 내가 변명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나를 멸시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과거의 다른 일을 끌어와서 나의 변명을 반박한다던지, 아까 그 선배처럼 타인의 말을 인용한다던지, 어떻게든 나의 변명을 깎아내리는 행동을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모든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인정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그 사람이 한 모든 오해와 비난을 수긍하고 바닥에 철퍼덕 엎드려야 그 사람의 화가 풀릴 것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협력이 아니라 화풀이니까.



마지막으로 악의는 나를 고립시킨다.

악의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수세에 몰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이유는 악의가 가지는 파급력 때문이다. 악의의 말은 단순하고 힘이 세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선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의는 내가 가진 성향과 행동패턴, 그 날의 상황 등 이 모든 것들을 생략해 버리고 하나의 슬로건으로 나를 표현한다. 악의는 50%의 진실과 50%의 허구로 나를 잠식한다. 악의를 가진 사람은 나에게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정의한 슬로건과 그에 어울리는 감정적 이미지로 자기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침묵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 수록 조금씩 자기도 모르는 새에 동조하기 시작할 것이다. 50%의 진실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그것에 출구가 없다고 느끼고,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다면 나는 벌써 고립무원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고립은 그들의 최종 목적이자 가스라이팅의 시작이다. 이쯤이면 당신은 그들의 권위에 복속되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 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상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나조차도 그 악의에 설득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내 건 슬로건과 타인들이 만들어낸 침묵의 카르텔 속에 갇혀 나를 잃기 시작하는 상태. 그때부터는 앞뒤 가릴 것이 없다. 도망치거나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나를 잃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정한 선의는 발화자의 말과 의도가 아니라 행동의 방향성, 그리고 일관성으로 증명된다. 이때 행동의 방향성이란 화합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며, 일관성이란 특정 대상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관적 기준을 가지고 말하되 발화의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는 마음의 앙금을 해소할 줄 아는 성숙한 태도이다. 그들이 주장한 대로 그들이 한 말이 선의라면 내가 진심어린 사과와 존중 그리고 변화의 의지를 표할 때 그 이상의 화풀이는 하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흐를 수록 더 나은 협력 관계로 진전할 것이다.


하지만 악의라면 사정이 다르다. 악의를 가진 이들은 감정을 호소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악의를 인지하면 그때 부터는 그들이 호소 하는 억울함, 때로는 눈물, 그리고 미소를 믿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이치를 흉내낸 인류애로 그들의 악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쟁취해야 하는 현실이 아무리 삭막하다 해도 타인의 존재를 침해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자신을 지키고 싶은가?

그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의 적인지 아군인지부터 알아차려야 한다.


기억하자.

악은 언제나 평범한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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