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가스라이팅'의 증거, 우울

조직 부적응자의 고백

by 김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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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우울할 때가 있다. 상사에게 깨질 수도 있고, 동료들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업무의 성과가 원하는 대로 잘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협력업체나 상부기관이 나를 속상하게 할 수도 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하루쯤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우울한 기분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사무실에서 고립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거나 내가 말을 했을 때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면, 그 때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려야 한다. 거기다가 내 주변 사람들이 나의 안색을 걱정한다거나,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당혹스러움을 표할 때는 이미 문제가 심각해 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럴 때는 먼저 ‘우울증 자가진단’이나 ‘phq-9-자가 우울증테스트’를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야 한다. 간단한 자가진단으로 자신이 우울증인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우울증에는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있다. 우울감, 고립감, 무기력감, 열등감, 죄의식, 수치심, 죽음에 대한 생각, 수면의 질 변화, 식욕과 성욕의 변화, 체중의 변화 등등.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우리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는 우울이 허락되지 않는다.


입직 초기, 나는 반복적인 가스라이팅에 심각한 우울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선배들은 ‘원래 신입은 다 그런거’라며 웃어넘기거나 ‘10년 정도 근무한 경력이 아니면 생각도 하지 말고 말도 하지 말라’며 더 면박을 주기도 했다. 나에게는 ‘왜’냐고 물을 힘도, ‘당신들이 틀렸다’고 말할 논리도 없었다. 두 발을 쑤욱 잡아당기는 늪에 빠진 사람처럼 나는 속수무책으로 우울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 선배 하나가 나를 불러냈다. 상사가 ‘쟤 요즘 무슨 일 있는 거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 날 내 표정이 좋지 않았고 함께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전 내도록 선배들이 미룬 일을 하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고, 너무 답답해서 그 날 점심은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피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 선배는 사무실에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고 나를 탓하며 ‘신입이 상사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나무랬다. 형태는 각기 다르지만 마치 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처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선배는 사무실 올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 웃는 가면을 써야한다고 자신에 빗대어 자랑스럽게 조언했고, 또 어떤 선배는 나의 우울함이 거슬렸는지 없었던 일도 만들어서 나를 ‘일 할 의지 없는 사람’으로 몰아갔다.

당연히, 나에게 걱정스레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담배피고 돌아온 다른 선배와 마주쳐 함께 사무실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선배는 사무실 가장 고참으로 상사와의 소통창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한 직장 동료가 내가 윗사람에게 예쁨 받아서 다른 직원들 모두 불만이 있고 사무실 분위기도 좋지 않다는 여론을 만들어 가고 있는 시기였는데, 얼마 후 그 동료는 다른 선배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 귀도 밝고 눈도 밝아요. 아까 oo이가 △△선배랑 몰래 나가서 얘기 하고 온 것도 다 봤어요.’

그 동료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이미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까지 감시하듯 지켜보며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기를 즐겼다. 이런 일은 언제나 있었고, 그렇게 생성된 말은 언제나 진실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곤 했다.


사무실에서는 내 우울을 감출 곳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피난처 자체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모두를 감시했고, 모두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시선은 참으로 야릇한 것이다.


그것이 나를 어떻게 해할 수 있겠냐며 걷어 차버리면 그만일 것 같지만, 자신이 그 시선의 칼날 끝에 있을 때는 쉽게 그것과 맞설 수 없다.

악플과 시선의 힘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악플과 시선은 대상이 허물어질 때까지 조금씩 그것을 갉아먹는 속성이 있다. 악플과 시선을 받은 사람은 그 순간 활시위를 벗어나 이름을 잃어버린 익명의 활이 사방에서 자신을 찔러대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익명의 활은 어디서부터 온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는 한 언제 사라질 지도 알 수 없다. 그것들은 좀비가 되어 벗어날 수 없는 그물망 같은 감옥을 짓는다. 그렇기에 타인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히 의존적이거나 관심종자라서가 아니다.

악플과 시선 세례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뻔뻔해져라’던가, ‘무시해라’는 말은 그 고통을 직접 겪어본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직장 내에서 시선의 그물망에 걸려버린 우울한 먹잇감들에게는 이런 고민들이 생겨난다.


□ 내가 예민한 걸까?

한 번은 선배 하나가 사무실로 간식을 사왔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사무실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모여 간식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상사는 선배들의 ‘같이 드시지요’라는 청도 무시하고 자기 자리에서 꿈쩍 않고 앉아 있었다. 부하직원들이 자신의 일을 마무리 하지 않고 간식을 먹는 다고 생각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일을 다 했냐 물었다. 나는 당황하며 다 마무리 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뭘 다했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내가 한 일을 다 가져 오라했다. 내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자료를 챙겨 가져가니 죄인 같이 서있는 나를 세워두고 자료에 적힌 리스트 하나하나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간식을 먹으려던 사무실 직원들은 자연스레 전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선배들은 ‘상사가 혼낸 것은 다른 사람들을 혼낼 수 없으니 너를 대표해서 혼 낸 것일 뿐’이라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예민하게 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일이 기억에 남는 것은 특별히 과한 일이어서는 아니다. 이런 일에 반응하는 것을 ‘예민’한 것이라 치부하고, 나를 달래 평화를 유지하려는 무언의 법칙을 발견해서였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그 법칙에 늘 순응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을 ‘예민함’으로 정의하고 원천봉쇄하는 폐쇄적인 조직, 그 안에서 ‘예민하다’는 말은 ‘내가 불편하니 너는 입을 다물라’는 폭력이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예민하다’고 평가 받아야 할 사람은 조그마한 불안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직원을 괴롭히는 꼰대들이지 않을까? 늙은 꼰대든, 젊은 꼰대든.


□ 내가 눈치가 없는 걸까?

어느 회사든지 자신이 눈치가 빠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많다. 어쩌면 전부 일지도 모른다. 선무당처럼 몇 가지를 때려 맞추고는 자신의 눈치를 과신하여 매사에 진단과 예언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눈치가 없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이 황금으로 두른 의자에라도 앉아 있는 양 우월한 태도로 눈치 없는 사람을 조롱한다.


눈치가 무엇일까? 눈치는 사회적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보이는 것 이면의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눈치는 좌뇌가 결정한다. 저명한 행동경제학자인 댄 에리얼리의 책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에 따르면 ‘좌뇌는 우리 앞에 일어나는 일과 우리가 바라보는 일에 대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며 어느 정도의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눈치는 ‘좌뇌가 해석한 창의적인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구전동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회사 내 이야기의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조직 내 이야기꾼들이 나름대로의 창의력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그것이 마치 심청전이나 춘향전처럼 재밌고 빠르게 퍼져나갈 뿐이다.


이야기의 힘은 매우 강하다. 사람들은 이야기에 쉽게 설득된다.


눈치가 없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사 자신이 정말 사회적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그것이 나쁜것 만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특성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복잡한 채용 경로를 거쳐 당당하게 입사한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일상생활을 유지할 정도의 눈치는 있지 않을까.


만약 누군가 나에게 ‘눈치가 없다’고 면박을 준다면 그것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너는 어울리지 않아’


다시 말해서 자기만의 서사에 순응하라는 압력일 뿐이다.


□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 걸까?

점점 사무실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다른 동료들이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는 소재가 늘어나는 것이 느껴진다면 사람은 불안함을 느낀다. 딱히 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더라도 사무실에서 혼자가 된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자발적인 독립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이미 내가 타인에게 부대끼는 존재라고 느꼈다면 ‘소외당했다’는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내 사회성이 부족해서 일까?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저런 사람이랑 어떻게 일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며 높은 고과평가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던지, 유독 자신만 튀려는 욕심이 강하다든지, 은근히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이 돋보이려 한다든지, 조그마한 일에도 짜증내며 상대방을 못살게 군다던지, 돈자랑은 하면서 늘 동료들에게 얻어먹는 다든지, 이 모든 특성에도 문제가 생기면 세상 억울한 얼굴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널리 알린다던지...정말 모르는 건지 정신승리인건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있는 곳은 성장형 회사가 아니었다. 굳이 말해서 위계질서가 확실하고 성숙기에 접어든 안정적이고 폐쇄적인 회사 같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는 자신의 성과보다는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더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그런 사람, 즉 진정으로 사회성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이 주로 동료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고 소외당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누구보다 무사히 밥을 벌어먹고 산다. 그리고 때로는 그 누구보다 잘 지낸다.

그렇다면 내가 사회성이 없는가를 고민할 만큼 동료들이 나에게 적대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나를 평가하는 동료가 어떤 사람이냐’결정적이다.


좋은 동료는 옆 사람의 결함을 포용해준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채우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주며, 불완전한 부분은 이해해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는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

나쁜 동료는 조그마한 결함이라도 긁어낸다. 부족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착취하며, 불완전한 부분은 그 사람의 고유한 특성으로 낙인찍는다. 그리고 화려한 입담으로 조직 곳곳에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동료들에게 소외당해서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 건가?’하는 고민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때는 내 주위의 동료가 어떤 사람인지도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




내 삶은 갑자기 망가지지 않는다.


매일 출근하고 퇴근할 때까지의 시간들이 내 몸 안의 세포로 각인되어 있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 내가 겪는 것, 그에 따른 나의 우울한 생각들이 조금씩 내 삶을 좀먹는 것이다. 오랜 기간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앞서 말한 이런 고민들이 생긴다면, 또한 그것이 나의 삶을 훼손할 만큼이라면 그때는 과감하게 고민을 멈추어야 한다. 질문이 잘못된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나를 성장시키는 질문뿐이다. 나에게 해로운 질문은 억지로 내 안에서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는다 한들 내 인생에서 좋을 것이 없다.


과감히 고민을 멈추었다면 나의 외부적 상황, 즉 타인이 나에게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내 안의 늪에서 빠져나와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을 촉발하는 상황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한다. 그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어디서부터 기인한 말인지,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하나하나 살펴봐야 한다.


여기 저기서 주워 들었던 성인군자 같은 말들은 다 집어치우자. I-message도 집어 치우고 ‘내 안에서 답을 찾아라’는 말도 집어 치우고 용서를 운운하는 말도 다 집어 치워야 한다. 지금, 내가 죽겠는데, 내 안의 것을 찾느라 애써봤다 찾을 수 없다.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내 안의 답도 없다.


나의 동물적 감각에 귀를 기울이고,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어쩌면 아주 긴 싸움의 서막이 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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