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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Jan 09. 2024

나는 미식가인가?

아닌 줄 알았다.

체온계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추웠다. 입이 빠싹 말랐다. 물을 한잔 마시고 싶지만 주방까지 갈 수 없었다. 간신히 두꺼운 이불을 꺼내서 덮었다. 지난주에 독일로 돌아간 동생식구가 덮었던 것을 빨아서 거실 한쪽에 놔두었고 몸의 이상기운으로 거실바닥에 누워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열에 차서 널브러진 나를 보고 남편이 병원에 데려가주기를 바랐다. 아침이 되자 방에서 나온 남편에게 아프다고, 말했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녀? 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신종플루에 걸렸을 때도 한겨울이었다. 밤새 끙끙 앓다가 아침이 되어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자 남편은 갔다 오라고 했다. 큰 병원에 갈 만큼 아팠기 때문에 차를 끌고 가려는데 차가 눈에 폭 쌓여 있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빗자루를 들고 나와서 눈을 털고 병원으로 갔다. 그날 입원했다. 사람들은 내가 스스로 운전하고 왔다는 것에 경악했다. 딸이, 맹장이 터졌을 때 스스로 운전하고 갔다고 해서 아휴, 하고 한숨이 나왔었다.


남편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고집을 꺾으면 남편은 좀 편할 거다.

병원 데려다줘? 어.

밥 좀 줄까? 어.

그냥 -라고 대답하면 되는데 그게 뭐라고 그 말이 안 나왔던 지난날의 나, 반성한다. 그냥 어-가 아니더라도 해줘!라고 하면 안 해줬을 리가 없는 남편이다.


A형 독감은 아니라는 진단이 나왔다. 코로나 검사는 권하지 않는단다. 코로나라고 해봐야 약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회사에 제출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지어주는 약을 먹으면 나을 거란다. 분명 A형 독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다행인 건가.


남편은 열심히 밥을 해줬다. 아침에 누룽지에 김치, 점심에 신라면에 김치, 저녁에 무려-마트까지 갔다 와서 끓인 콩나물국에 김치. 다음날 아침에 누룽지를 끓이고 있는 남편에게 반찬이 김치냐고-계란 프라이라도 해달라고 하니 바로 해준다. 다른 반찬이 먹고 싶었던 것을 보니 이제 낫고 있던 거였나 보다. 입맛이 없어도 억지로 약을 먹으려고 먹는 밥이지만, 남편이 해주는 밥이 너무 맛이 없었다. 밥이 맛이 있을 때는 김치 한 가지로도 신나게 먹을 수 있지만 입맛이 없으니 맛없는 밥이 짜증이 났다. 입덧하는 줄.


오늘 저녁쯤 되지 몸이 움직일만했다. 빨리 나아서 내가 밥을 해 먹어야겠다는 의지? 당황스럽지만 그 부분이 나의 병이 낫는 것에 큰 기여를 했다. 냉동고에 있던 오리훈제를 꺼내고, 냉장고에 있는 콩나물과 배추를 꺼냈다. 콩나물을 깔고, 오리 훈제와 배추를 잘라 넣고 비린 맛을 잡아 줄 미림 한 숟갈, 간을 맞출 어간장 한 숟갈 넣고 그저 불 위에 올려놓으면 완성되는 오리 훈제 야채찜. 물 없이 가능해서 찜이라고 말하겠다. 밤새 또 아플 수가 있으니 내일 아침도 미리 준비해 놓기로 한다. 팬트리에 있는 단호박을 잘라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익힌 후 단호박 수프를 끓였다.

 나는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사람이지만, 맛이 없으면 먹기 힘들다.

이제, 편하게 아플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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