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tali, Chaconne
가느다란 꼬리를 땅에 붙이고 있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처럼, 슬픔의 실체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커다랗다. 반면 그 뿌리는 회오리바람의 꼬리처럼 보잘것없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다른 사람이 보는 누군가의 슬픔은 대체로 하늘을 가리고 허공에 떠있는 거대한 모습이다. 이런 감정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당사자는 다른 사람-관찰자보다 슬픔을 훨씬 커다란 존재로 느낄 수밖에 없고, 때문에 슬픔이란 한 사람을 짓누르는 감정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슬픔은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실제의 힘보다는 과장된 존재인 것이다.
어떤 음악은 슬픔을 표현한다. 그리고 우리는 슬픈 음악을 찾아 듣는다. 이런 파괴적인 감정을 우리는 왜 자발적으로 느끼려고 노력할까?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토마소 안토니오 비탈리Tomaso Antonio Vitali의 샤콘느chaconne in G minor for violin and continuo는 슬픔의 정점에 있는 곡이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어두운 색채가 통주저음에 실린 느린 3/4박자의 이 곡에서 슬픔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 음악에는 부제가 없다. 사실 이 곡이 비탈리의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 드레스덴 원고 첫 페이지 상단 여백에 필사자가 적어놓은 'Parte del Tomaso Vitalino'라는 메모가 작곡자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더구나 이것은 토마소 비탈리가 작곡자라는 의미라고 할 수도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음악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비탈리가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슬픔이란 그렇게 이름 붙이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바라보는 아르투르 그뤼미오Arthur Grumiaux의 연주는 이런 감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떤 모습일 때 가장 바람직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마치 슬픔과 함께하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가진 슬픈 눈의 소년처럼, 그뤼미오는 어찌 보면 차가운 슬픔을 노래하는 것 같다.
지노 프란체스카티Zino Francescatti의 슬픔에 빠진 연주는, 비슷한 감정을 다시 경험해서 그것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단지 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충분히 그 감정 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슬픔의 원형을 연주한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의 연주는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회오리바람처럼 살아 움직이는 이 파괴적인 에너지 덩어리가 사실은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걸 느끼게 한다. 한 발 떨어져 관조하는 듯한 하이페츠의 연주는, 마치 감정을 만들어 낸 신처럼, 자신의 창조물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예술가처럼, 슬픔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여기-창조물 속에 담겨 있다고 설명하는 것처럼 담담해 보인다.
슬픔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거기서 벗어난다는 게 그 감정을 외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담담히 자신의 감정을 바라볼 때 그것의 진정한 크기와 영향력, 그리고 그 감정 다음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깊이 이해할 지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어쩌면 감정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결국 나 자신에 대해 올바로 알 게 되는 게 아닐까?
어떤 사람에게나 슬픔에 빠진 순간이 있고 때로는 그런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그 상태로 존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앞으로, 그다음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서면 슬픔은 등 뒤에서 점점 멀어지는 회오리바람처럼 내게 불어오지 않고 단지 존재할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