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 후 한동안은 컨디션이 좋았다. 마치 예전의 나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한동안은 불면증으로 고생했다. 불면증은 졸라덱스와 타목시펜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라고 한다. 다음 병원 방문까지도 불면증이 지속된다면 처방을 받아볼까도 싶었다. 게다가 어제는 갑자기 종일 열나고 토하고 몸이 힘들었다. 그렇게 지친 하루를 보내고 나면 한없이 다시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전에 남편에게 물었다.
“나는 암세포를 떼어냈잖아. 그래도 난 여전히 암 환자야? 그럼 난 언제까지 암 환자야?”
나는 2년간 ‘졸라’아픈 졸라덱스를 맞아야 하고, 5년간은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럼 그게 끝나야 암 환자가 아닌 건가? 아니면 수술 후 10년의 추적 검사 기간에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 판정을 한다던데, 그걸 받으면 암 환자가 아닌 건가? 그전에 그래도 사회는 복귀할 텐데, 그럼 “안녕하세요. 암 환자 심지혜 국장입니다”가 맞는 거야? 의외로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암 환자라는 타이틀을 기약 없이 마냥 붙이고 살기가 싫었다. 물론 앞으로 평생 음식과 생활습관을 더욱더 신경 쓰며 살 테지만, 그건 그냥 자기 관리의 일환으로써면 좋겠다. 암 환자라서, 재발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하는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환자라는 이름이 왜 계속 불편한 걸까. 차분히 생각해보면 나는 “환자니까 넌 쉬어야 한다.”라는 그 말이 듣기 싫은 것 같다. 혹자는 배부른 소리라지만…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좋아질라치면 자꾸 크고 작게 일을 벌이게 된다. 뭔가 시간을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몸에 배어버린 강박관념… 더 성장해야 하는 때에 오히려 뒤처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있는 걸까 싶기도 하다. 전형적인 대한민국 낀세대의 성장 증후군이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해도 별로 조급한 마음을 못 느낀다던데, 이런 걸 보면 난 사실은 자존감이 낮은 건가? 아니면 그냥 평생 그렇게 살아와서 관성적으로 뭘 자꾸 하려고 하는 걸까.
지난주에 전 회사 대표님을 만나 식사를 했다. 뵙기 전에 잠시 혼자 책방에 들려 이런저런 읽을 책을 샀다. 대표님이 봉투를 빼앗아 책들을 쭉 검사(?)했다. 그러곤 단번에 말을 꺼냈다.
“너는 차~암 안 변하겠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 내려놓고 쉬어야 하는 암 환자가 볼만한 책들로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괜히 뭔가 뜨끔했다.
나도 모르겠다. 자꾸 세상으로 삐죽삐죽 흘러나오는 내 생산 지향적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렇다고 사회에 복귀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슬프지만 나 스스로도 내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종종 느낀다. 그럴 때마다 우울해졌다. 내 마음은 예전 그대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데, 내 몸은 그렇지 않았다.
워워, 수술한 지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여전히 나의 하루하루는 휴식과 회복이라는 큰 주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장기적으로 진정 지속 가능한 나다운 삶을 바란다면 조급함을 버리고 제대로 쉬어야 한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슥슥 정한 매거진 제목이 바로 ‘인생 쉼표’였다. 암으로 인해 강제로 맞이하게 된 인생의 휴식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쉬어야 하는 이때 몸 생각하지 못하고 자꾸 뭔가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 문제라면, 아예 이 쉼표의 의미를 수동형에서 능동형으로 조금 바꿔보는 건 어떨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2015년, 삼성카드는 ‘즐기자 실용’이라는 테마로 카드의 쉬운 혜택을 이토록 위트 있게 표현했다.
그래, 이거다! 이미 쉬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쉬어보는 거다.
암 진단과 수술까지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휴식을 가진 거라면, 본격적인 치유와 회복을 앞둔 지금부터는 조금 더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쉬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 지향적인 나에게도 조금 더 위안이 되지 않을까.
자 그럼 이제 어떻게 격렬하게 쉴 것인가!
아이들은 겨울방학이다. 남편은 회사를 휴직하고 가족 곁을 지켜주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가족 넷이 이렇게 모두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뭐든 할 수 있는 시간이라니…. 전부터 바랬던 제주도 한 달 살기? 와! 아니면 내친김에 치앙마이는 어떨까? 그래, 그 이야기를 가지고 책을 내보는 거야! 좋은 카메라를 이참에 사도 좋겠다! 맞다! 전부터 사진은 꼭 배워보고 싶었는데! 동영상 편집도 배워야겠다!
문득 정신을 차려본다. 어제만 해도 토하느라 얼굴이 벌겋던 나인데… 괜찮을까? 엄마와 시댁 어르신과 병원 관계자들과 날 아껴주는 모든 이의 걱정 어린 시선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대낮에 혼자 수면 양말 신고 쿠션 안고 누워 있으면서 갑자기 의욕 뿜뿜 하는 내 모습이 뻘쭘하다.
그래도 심지혜 씨 같은 유형의 환자에게는 무기력보다는 활력이, 쳇바퀴 같은 일상보다는 새로운 신선함이 더 좋은 약이 되지 않을까. 자기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하잖아.
또 슬그머니 일을 벌이려는 내게서 새로운 에너지가 차오름이 느껴진다. 어머나, 벌써 또 건강해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