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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un 15. 2024

14. C사 명품백 말고 튼튼한 배낭이면 돼

2024. 3. 13 El calafate


  Free time!!

  이동도 없고, 예약된 일정도 없는, 자유의 날이다.

온이와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낮에는 각자 자유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온이도 이 시간을 엄청 기다렸을 거다. 걸음이 빠른 데다 많이 걷는 걸 좋아하는 나랑 다니느라 힘들어, 혼자 느릿느릿 걸으며 여유 부리는 시간이 필요했을 거다.

  나는 오늘 아르헨티노 호수를 따라 오래오래 걸으며, 여행에 대해,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아르헨티노 호수 옆 풍경




  이곳 여행자들은, 잘 차려입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바람이 언제 심하게 불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머리를 질끈 묶을 끈과 모자, 방풍재킷과 패딩이 필수이다.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은 대부분 자연을 가까이하고자 찾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낡은 신발과 낡은 등산가방에 먼지 묻은 재킷 차림인 사람이 수두룩하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일종의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하다.

저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성격 유별나고 이상한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 하지만 어쨌든 저들은 파타고니아, 이 척박한 환경의 지역을 일부러 고생하며 찾았고, 이곳의 경관을 즐기는 중이다. 나처럼.


산책 중 만난 풍경들




  그가 선물로 주었던 명품백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혼 후, 그 가방을 중고시장에 내놓고 아주 후련했던 내가 생각났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는 명품백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이라는 일생의 행사를 앞두고 이런 것도 선물 받다니, 정말 남들 하는 거 다 해보는구나 싶었었다.

그런데 난 그 가방이 있어서 행복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가방을 보면 그가 생각났고, 그가 생각나면 가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가방을 메고 나가면 몇몇 사람들은 쫌 부러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시선이 싫진 않았지만, 고민 끝에 중고 시장에 그 가방을 내놓고 나와 후련히 걷는 내 모습이 난 더 좋았다.


  파타고니아에 여행을 하면서 C사 명품백을 들고 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버스 화물칸에 나뒹굴고 흙바닥 위에 던져져도 찢어지지 않는 배낭이면 족하다.

그리고 C사 명품백을 든 나의 모습과, 배낭을 멘 나의 모습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배낭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둘 다 선택하면 제일 좋다 ㅋㅋㅋ)


짐칸에 실린 불쌍한 배낭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클리쉐에 가까운 이 말. 사실이다. (물론 C사 명품백 말고 배낭이라도 살 돈은 있어야겠지만 ;;;) 

  명품백은 처음 살 때는 너무나 즐겁고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지만(?), 10년 20년 뒤까지 행복감이 유지될 수 없다.

  여행의 기억은 다르다. 10년 20년이 흘러도 좋았던 기억이 오히려 더 미화되어 남을지언정, 사라지거나 퇴색되지 않는다. 난 그 힘을 믿는다.

(마치 인별그램 쇼츠가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는 단발성 도파민을 선사한다면, 세계명작문학작품은 한번 읽으면 평생 묵직한 감동이 남는다는 것과 유사하달까?)


  호화찬란한 요트 투어를 억대의 돈을 들여서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TDP에서 흙먼지와 바람과 싸우며 걷던 나는, 그들보다 조금도 덜 행복했을 것 같지가 않다.

  명품백을 들지 않아도, 억대의 호화 여행을 하지 않아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나는 여행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란 걸 느낀다.

피부는 예민해서 땀이 나면 땀띠가 나기 일쑤고, 알러지 때문에 모기만 물려도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붓기도 하고, 여행 중엔 어김없이 변비가 도지고, 기름진걸 조금만 많이 먹어도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 아마 여행에 부적합한 초예민 체질인 주제에, 여행을 이렇게 좋아하게 되다니... 아이러니하도다.


벌에 쏘인거 아님 모기에 물렸을 뿐...

  

  그래도 어쩌랴! 강풍이 불고, 춥거나 덥고, 피곤해서 쓰러져 잠드는 날이 이어져도, 차려입기는커녕, 땀 묻은 옷을 3일 연속 다시 입어야 하더라도, 이런 하루하루가 너무 좋은걸! 고생이 고생 같지 않은걸!

  앞으로 이어질 여행, 그리고 여행이 끝나고 찾아올 나의 일상, 모두가 기대된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조금씩 보이는 기분이다. 어렴풋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또렷해진다.


길을 잃지 않기를.
나를 오롯이 세우기를.
자신을 알고, 존중하기를.
자신 있게 살아가기를.



  + 저녁에 온이를 만나서 인생 최고의 양고기를 먹었다. 물론 처음 5분간만 천상의 맛이었고, 그다음부터 텐션은 빠르게 내려갔다. ㅋㅋㅋ

이곳 사람들은 고기를 진짜 육식동물처럼(?) 먹는다. T-bone steak의 두께가, 평소 보던 스테이크 두께의 2배는 넘을 것 같다. 이걸 어떻게 다 먹지?

결국 우리는 거의 반에 가까운 고기를 남기고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수십 년간 나는 내가 육식 동물인 줄 알았다.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육식 애송이었구나... 지구 반대편에 이런 찐 육식동물들이 있는 줄 몰랐지이~~(깨갱)


아사도 고기 굽는 방식
짐승크기 티본스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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