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우울감의 역사는 20대 초중반, 대학교 여름방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어느 시점부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무기력감이 심해져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씻거나 먹는 행위조차도 하지 못하고 말그대로 그냥 누워만 있었다.
- 웃음을 잃었다. 침대에 나자빠져 스마트폰으로 재미있는 영상을 봐도 그냥 시큰둥했다. 그렇게 무표정이 내 디폴트 표정이 되어버렸다.
- 아무 이유도 없이 가끔씩 가슴이 답답해졌다. 크게 심호흡을 하지 않으면 숨 쉬는 것이 버거웠다.
- 심장도 너무 아팠다. 누군가 내 심장을 손으로 꽉 잡아 세게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마지막으로,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위와 같은 증상들로 인해 정신건강의학과에 가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 간호사 선생님이 내 관자놀이에 어떠한 장치를 붙였다. 나는 그것을 얼굴에 부착한 채 병원에서 준 설문지에 현재 내 상태에 관한 체크를 헤야했다.
장고의 시간 끝에, 나는 드디어 의사선생님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선생님을 대면하자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티슈를 건네시며 내가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울증 약을 복용해야 한다며 처방전을 써 주시겠다고 했다. 이게 전부였다. 상담은 허무할 정도로 짧게 끝이 났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근처에 바로 약국이 보였다. 하지만 난 그곳을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나는 받은 처방전을 그대로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고, 곧장 내 방 침대에 누워 현실도피를 위해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계속 눈이 떠지지 않길 바랐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우울증으로 출석이 좋지 않아 1번의 제적을 당하고, 2번의 휴학을 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일상생활조차 영위하지 못한 채 계속 누워만 있다보니, 차라리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고통 없이 죽는 법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 혼자 죽는 건 또 무서워서 인터넷을 들락날락거리며 나와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결국 나는 죽을 용기도, 살 용기도 갖지 못한 채 삶과 죽음의 경계인 나의 방 안에 갇혀버리게 되었다.
내 인생이 도대체 왜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내 사주팔자에 집착하게 되었다. 설마 내 팔자에 자살 할 운명이 내재돼 있는 걸까? 점을 한 번 보러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당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저는 도대체 어떻게 죽게 되나요?'
나는 내 죽음의 이유가 제발 자살이 아니길 바랐다. 나는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살고 싶었다. 이렇게 나는 너무나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예전에 제목에 혹해 집으로 데려왔던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우을증을 앓은 이후로 오랫동안 글을 읽지 않았는데도 이 책만은 단숨에 읽혔다.
이 책의 주인공 아마리는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는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다가 스물아홉의 생일, 아무에게도 생일을 축하받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있는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워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서른 살 자신의 생일을 삶의 데드라인으로 정하고 1년 동안 후회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보자고 마음먹는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느새 나도 아마리처럼 내 서른 살의 생일을 그날로 정해 그전까지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사람은 유한한 존재다. 어쩌면 나는 내일 당장 교통사고를 당해 사고사 하거나,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죽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하루하루,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글이다. 우울증 타파를 위한 나만의 소소한 프로젝트다. 일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잃어버린 삶을 살아왔던 내가 정신적 재활을 해나가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