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절정이던 1월의 어느 날, 나의 남동생이 뜬금없이 나에게 찬물 샤워를 해보라며 강력하게 추천했다. 이 추위에 찬물로 샤워를 하라니? 날 골탕 먹이려는 고도의 계산인 건가 싶기도 했지만, 동생은 이미 자신도 찬물 샤워를 하고 있고, 그저 샤워의 마무리만이라도 찬물로 해보라며 거듭 추천했다.
'그래 까짓것, 그게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보라고 난리인 건지, 계속되는 동생의 종용에 그래, 어디 한번 해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려 쪄 죽을 것만 같은 날씨에도 따듯한 물 샤워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나는 특히 샤워를 할 때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물을 등허리에 가만히 맞으며 멍 때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에게는 바로 이 행위가 웬만한 온천욕 부럽지 않은 무릉도원과도 같다.
하지만 이번 샤워는 느낌이 좀 달랐다. 몸에 따뜻한 물을 맞으며 기분이 노곤해지는 순간에도 나는 그것을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찬물샤워를 할 생각에 지레 겁을 먹어버린 것이었다. 이미 이렇게 따뜻함에 익숙해져 버린 나인데... 이런 내가 과연 이 아늑함을 기어코 깨뜨려버릴 차디찬 물을 손수 내 몸에 끼얹을 수 있을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모든 샤워의 과정을 마치고, 최종적으로 찬물 샤워를 하려니 벌써부터 오싹한 두려움이 앞섰다. 아직 찬물을 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찬물샤워에 도전해 보겠노라고 동생과 호기롭게 약속을 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대망의 샤워의 마무리이자, 찬물 샤워의 시작을 위해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따뜻한 물에서 차가운 물 쪽으로 물 손잡이를 돌렸다. 찬물에 살짜꿍 손만 가져다 댔는데도 얼음장 같은 물로 인해 벌써부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차가운 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결정까지는 단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일단, 고통이 가장 덜할 것 같은 발 쪽으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리는 샤워기를 가져다 댔다.
'오?'
춥긴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참을만했다. 이어서 종아리 쪽으로 샤워기를 슬금슬금 올렸다. 여기도 꽤 괜찮았다. 안심하고 기세를 몰아 허벅지 쪽으로 서서히 샤워기를 옮겨가는데,
'웁스!
위기였다. 허벅지를 포함한 온몸에 닭살이 미친 듯 돋기 시작했다. 어찌나 추웠으면, 팔의 털들이 쭈뼛거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비록 지금은 혹독한 겨울이지만, 지속적으로 집에서 따듯한 전기장판과 따뜻한 물 샤워로만 곱게 길들여진 나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순간이었다. 이런 고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내가 이걸 이겨낼 수 있을까?
그래도 찬물에 노출된 채 약간의 시간이 지나니 하체까지는 어찌어찌 버틸 만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상체였다. 나는 허벅지 쪽에서 겨우 머물고 있던 찬물을 손을 이용해 슬슬 상체 쪽으로 끼얹었다. 심장이 놀라지 않도록 가슴 쪽에 물을 뿌려주되, 그럼에도 아직까지찬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배 쪽에는 최대한 물이 닿지 않도록 꼽추처럼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 상체를 피해 조심스럽게 팔 쪽으로 샤워기를 가져다 댔다. 그런데 다행히도 팔 부위는 상당히 참을만했다. 하지만 도저히 가슴과 배가 있는 상체 쪽으로는 샤워기를 가져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매몰차기만 한 차가운 물에게 굽신거리기라도 하듯, 나는 한참 동안 꼽추처럼 허리를 숙여 하체와 팔 쪽으로만 샤워기를 왔다 갔다 해댔다. 그리고 내가 이걸 계속해야 되는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약간의 정신적 흔들림이 있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드디어 샤워기를 상체 쪽으로 옮겼다.
"끄아아아아아!!"
물이 너무도 차가웠다. 정말 어찌나 얼음장 같던지, 그래서 나는 그저 온머리 속에 이 찬물 샤워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급박한 생각만 가득했다. 후다다닥 샤워기를 움직이며 찬물을 상체 곳곳에 흩뿌렸다. 이 와중에도 등 쪽과 목 뒤쪽 역시 잊지 않고 찬물의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샤워를 끝낸 후 상체 뒤쪽에는 차가운 물을 묻히지 못했다는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흐르는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고 눈이 개안을 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쉬이 참을 수 없는 추위였다. 하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상체에 찬물을 급하게 뿌리는 것으로 나의 첫 찬물 샤워를 마쳤다. 찬물로 샤워를 했다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고통의 순간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새해를 맞이하며 나름 호기롭게 세웠던 나의 계획들은 1월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이미 공허한 빈말이 되어버렸고, 나는 주로 침대 위 전기장판에 서식하며 그곳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와식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 방학 중이라 이러한 행태는 더욱 견고해져만 갔다. 이렇게 부질없이 시간을 허무하게 흘려보내는 삶을 살고 있던 와중에, 찬물 샤워가 나의 흐리멍덩함과 게으름의 흐름을 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단단히 굳어져 바꾸기 힘들 것처럼 느껴지던 그 정신 상태에 약간의 실금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의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던 찬물이 마치 나에게 앞으로는 정신 좀 차리고 살자!! 는 깨달음을 준 것만 같았다. 우울함이 내 삶에 그늘을 드리워 어둡게만 반복되던 일상 속, 신선한 충격과 함께 다가온 나의 첫 번째 도전이었다.
첫 찬물 샤워를 마치고 동생에게 약속을 지켰다는 얘기를 하니 동생은 자신이 왜 찬물 샤워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그 이유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 애도 나처럼 겨울방학 이후에 점차 생활이 늘어져만 갔고, 정신을 차리고 새해를 맞이하자는 의미로 1월 1일부터 찬물 샤워를 계속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지속적으로 찬물 샤워를 추천해 주었던 내 동생이 바로 나를 전기장판의 끈적한 늪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은인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찬물 샤워를 마치고 전기장판이 빵빵하게 틀어진 침대에 누워 참을 청하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지만 나에게 활기를 주는 소소한 도전들을 하고, 그걸 기록으로 남기면 어떨까?'
하루하루 소소하지만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무기력감과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에도 왠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드니, 찬물 샤워를 지속적으로 추천해 준 동생에게 고마웠다. 찬물 샤워를 통해 이렇게 영감까지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언가 해볼 만한 일이 생겨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 오늘의 찬물 샤워 경험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자칫 내가 또다시 나태함의 구렁에 빠지려 할 때마다 이 기억을 꺼내보아야겠다.
며칠간 찬물 샤워를 해보니 요령이 좀 생겼다. 그동안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다 물 온도를 극단적으로 곧장 차갑게 바꿔버렸는데, 이제는 따뜻한 물 - 미지근한 물 - 시원한 물 - 차가운 물 순으로 차근차근 물 온도를 낮춰 가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렇게 하니 몸이 조금씩 추워지는 것에 적응이 되어 비교적 수월하게 찬물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찬물 샤워를 아침이나 낮에만 하고 있다. 나는 주로 자기 전에 샤워를 하는 편인데, 이때 샤워의 마무리를 찬물로 하니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잠이 잘 오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겨울이라서 더 그런 듯하다. 나의 질 좋은 숙면을 위해, 그리고 아침에 비몽사몽 한 정신을 번쩍 깨우기 위해 찬물 샤워는 아침에만 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