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내 남자친구는 취준생
오빠는 대학 4학년 2학기부터 취업하기 위해 취업의 제1차 관문인 입사서류를 넣으며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졌는데 우선 토익 점수가 너무 낮았다. 대학 4학년이 돼서야 토익을 공부했고 공부하는 만큼 토익 점수가 안 나왔다. 처음에는 토익 점수가 600점 대 였는데 공부를 아무리 해도 700점 조금 넘는 정도까지 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기업에서 선호하는 경영학과, 경제학과 등이 아니라 아닌 인문학과로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것과 졸업은 인하대로 최종 졸업장을 받았지만 인하대 졸업 전 군산대에 입학했다가 편입한 것도 불이익이라며 계속 서류 전형에 떨어지는 이유를 분석했다.
오빠는 일단 직종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입사 원서를 냈다.
그 중 서류 전형을 통과해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면 오빠와 나는 들뜬 마음 반, 걱정하는 마음 반이 돼서 기대를 걸고는 했지만 면접에서도 1차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는 등 계속해서 구직 활동을 했지만 취업은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은 흘러갔고 오빠는 대학을 졸업 하고도 구직 활동을 이어 나갔는데 졸업하고 8개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취업이 되지 않았다.
그 때는 내가 종로M스쿨에 다니고 있는 때여서 교무실에 여자 선생님만 20명이 있는 곳으로 서로의 남자 친구 직업 등에 관심이 많았고 말도 많은 곳이었다.
내가 대학생을 만난다고 했을 때 어떤 선생님은
‘아...선생님이 퇴근할 때 남자친구가 몇 번 학원 앞에 와서 기다린 적 있었죠?’
‘네’
‘아니 버스가 왔을 때 둘이 손잡고 뛰어가서 버스를 탄 이유가 있었네. 학생이니까 차가 없겠구나’
라는 얘기도 하시고 결혼한 분들은 내가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처음 만나는 남자친구라는 것을 알고는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냐며 여러 남자를 만나봐야 아는 거라면서 양다리를 걸치면서 다른 사람도 만나 보라고 권유했다.
그럴 때 마다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사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해 지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구직 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이 있었고 하루
종일 하는 일도 없어서 심심하다며 나랑 전화 통화를 새벽 4시까지 했다.
피곤해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면 끊지 말라고 했고 그렇게 통화를 많이 하는 것을 본 엄마는 나 보고 미쳤다고 했다.
정말 사랑의 힘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그래도 중견기업에 해당되는 A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최종 합격을 했다며 인터넷에 들어가면 최종 합격자 명단이 있을 테니 들어가서 보라고 했다.
너무 기뻐서 바로 인터넷 기업 홈페이지로 들어갔는데 오빠의 이름 세 글자가 보이자 자랑스러웠고 합격을 기념하고자 그 화면을 캡쳐 해서 저장해 놨다.
선생님들에게 남자 친구가 드디어 직장인이 되었다고 말했고 잘 됐다면서 축하해주셨다.
나중에 한 얘기지만 오빠는 대학원에 가서 국어 교육을 전공하고 임용고시를 봐서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했고 직종 중에 영업사원을 택한 이유는 자신이 하는 만큼 인센티브가 나오고 실적에 따른 연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해줬다.
난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1년 8개월 만에 취업한 오빠를 응원했다.
#7 슬기로운 직장생활
A회사에 입사한 오빠는 한 달 동안 지방 연수원 생활을 했다.
매일 길게 통화하다가 짜여진 연수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 전 짧게 통화하고 만나지도 못 해서 외로웠다.
한 달도 길게 느껴졌다.
오빠가 말하기를 매일 시험을 보는데 성적에 따라 맡는 병원이 다르다고 했다.
우선 성적 순으로 대학병원 및 종합병원, 세미병원, 개인의원, 약국 등의 순서로 맡게 되는데 5등 안까지만 대학병원과 세미병원을 맡을 수 있기 때문에 꼭 5등 안에 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 턱걸이로 5등을 해서 여러 세미병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세미병원은 대학병원까지는 아니지만 바로 그 밑의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병원을 말한다고 했다.
서울, 경기권을 맡았는데 여러 병원을 다녀야 하는 직업이어서 취업 이후에 할부로 자동차를 사는 영업사원이 많았지만 오빠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금은 김포가 많이 발전이 됐지만 그 때만 해도 논, 밭이 많았는데 김포에 있는 세미병원을 가기 위해서 버스를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배차간격이 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버스를 놓치거나 하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도 자동차를 사지 않았다.
오빠는 살 생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직장 들어간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차 뽑을 생각을 하냐며 반대해서 사지 못 했다.
사실 외국계 제약회사 초봉은 3500만원에서 5000만원 정도였는데 오빠는 국내 제약회사이고 제약회사 중 중견기업에 속하는 회사로 그때 당시에 연봉은 초봉 2400만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봉은 내가 더 높았다.
오빠의 연봉이 조금 약한 편에 속하긴 했었다. 그래도 자신을 받아 준 첫 회사라며 충성심이 강했고 성실한 성격답게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영업을 시작해서 실적 1위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1년에 구두 굽을 몇 번 갈아야 할 정도로 일하러 다녔고 pc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동료들과 당구를 치는 등 요령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 때 내가 생각한 것은 저런 사람이라면 결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 때부터 더 진지하게 오빠를 만났다.
워낙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1년 후 연봉 평가에서 A를 받았고 오빠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나중에 오빠가 말하기를 내가 없었으면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원동력은 바로 ‘나’ 라고 얘기 했다. 그리고 고생을 많이 한 나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정말 발로 열심히 뛰어 다녔다는 말에 나는 너무 고마웠다.
#8 드디어 우리에게 자동차가 생겼다!
오빠를 처음 만난 것이 25살이었으니까 횟수로 4년이 지난 28살에 드디어 우리의 차가 생겼다.
그 동안 뚜벅이 커플로 춘천 등 여행을 갈 때도 편안하게 자가용을 타고 간 것이 아니라 열차를 타고 버스를 타며 이동했었다.
그런데 오빠가 취업해서 모은 돈으로 취업한지 1년여가 지났을 때 준중형차에 속하는 쎄라토 경유차를 뽑았다.
오뻐는 차를 너무 갖고 싶어 했기 때문에 무슨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차를 살 때 까지 거의 2~3개월이 걸렸다.
대리점에 들어가면 영업사원들이 다가와서 잘해주는데 오빠가 영업사원이어서 늘 ‘을’ 이었는데 자동차를 사러 갈 때는 ‘갑’ 이 되는 것도 좋았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갑질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중형차는 무리였기 때문에 준중형 차를 선택하려고 했고 그 중에서도 계속해서 엄청나게 고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다 답답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오빠가 이 차 어때 하며 팜플렛을 보여주면 거의 정독하면서 관심을 보였는데 나중에는 오빠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쎄라토 경유차였다. 물론 일일 영업 활동비가 나오고 한 달 교통비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이동하는 직업이라 휘발류 차 대신 기름값이 싼 경유차를 선택했다.
처음 차를 뽑아서 학원 앞에서 멋있게 기다리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드라마 꽃 보다 남자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인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처럼 이제는 이 차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촌스럽게 마치 레이싱 모델처럼 차 안에서 그리고 차 밖에서 포즈를 다양하게 취하며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근데 한 가지 걱정됐던 것은 운전 실력인데 차를 뽑기 전 까지 운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오빠는 아버지의 오래된 차로 몇 십년 된 씨에로 차를 타고 운전연습을 했는데 오빠가 그동안 장롱면허여서 처음에는 운전 감각이 조금 떨어지는 바람에 뒤에서 빵빵 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여름이었는데 워낙 오래된 차라 에어컨이 안 나와서 모든 문을 열고 다녔는데 열이 많은 나는 여러모로 죽을 지경이었다. 또 창문을 여는 것이 자동이 아니라 수동으로 손잡이를 열심히 돌려야 했다.
솔직히 조금이라도 창피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어쨌든 오빠는 차를 뽑고 나서 영업을 위해 여기 저기 이동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카 레이싱 선수처럼 너무 속도를 내고 다녔고 신호도 안 지키고 다니기도 해서 한 달 과태료가 25만원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함부로 운전하는 오빠한테 화가 났고 나 놔두고 죽고 싶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운전 하라고 했더니 거칠게 운전하는 습관을 고치기 시작했다.
아무튼 드디어 붕붕이를 타고 편하게 다닐 수 있었고 차가 생기자 교통 문제로 가기 꺼려했던 곳도 가게 되고 내가 가고 싶어 했던 아침고요수목원을 가는 등 붕붕이는 우리와 추억을 함께 했다.
오빠는 대학 4학년 2학기부터 취업하기 위해 취업의 제1차 관문인 입사서류를 넣으며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졌는데 우선 토익 점수가 너무 낮았다. 대학 4학년이 돼서야 토익을 공부했고 공부하는 만큼 토익 점수가 안 나왔다. 처음에는 토익 점수가 600점 대 였는데 공부를 아무리 해도 700점 조금 넘는 정도까지 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기업에서 선호하는 경영학과, 경제학과 등이 아니라 아닌 인문학과로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것과 졸업은 인하대로 최종 졸업장을 받았지만 인하대 졸업 전 군산대에 입학했다가 편입한 것도 불이익이라며 계속 서류 전형에 떨어지는 이유를 분석했다.
오빠는 일단 직종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입사 원서를 냈다.
그 중 서류 전형을 통과해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면 오빠와 나는 들뜬 마음 반, 걱정하는 마음 반이 돼서 기대를 걸고는 했지만 면접에서도 1차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는 등 계속해서 구직 활동을 했지만 취업은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은 흘러갔고 오빠는 대학을 졸업 하고도 구직 활동을 이어 나갔는데 졸업하고 8개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취업이 되지 않았다.
그 때는 내가 종로M스쿨에 다니고 있는 때여서 교무실에 여자 선생님만 20명이 있는 곳으로 서로의 남자 친구 직업 등에 관심이 많았고 말도 많은 곳이었다.
내가 대학생을 만난다고 했을 때 어떤 선생님은
‘아...선생님이 퇴근할 때 남자친구가 몇 번 학원 앞에 와서 기다린 적 있었죠?’
‘네’
‘아니 버스가 왔을 때 둘이 손잡고 뛰어가서 버스를 탄 이유가 있었네. 학생이니까 차가 없겠구나’ 라는 얘기도 하시고 결혼한 분들은 내가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처음 만나는 남자친구라는 것을 알고는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냐며 여러 남자를 만나봐야 아는 거라면서 양다리를 걸치면서 다른 사람도 만나 보라고 권유했다.
그럴 때 마다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사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해 지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구직 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이 있었고 하루 종일 하는 일도 없어서 심심하다며 나랑 전화 통화를 새벽 4시까지 했다.
피곤해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면 끊지 말라고 했고 그렇게 통화를 많이 하는 것을 본 엄마는 나 보고 미쳤다고 했다.
정말 사랑의 힘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그래도 중견기업에 해당되는 A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최종 합격을 했다며 인터넷에 들어가면 최종 합격자 명단이 있을 테니 들어가서 보라고 했다.
너무 기뻐서 바로 인터넷 기업 홈페이지로 들어갔는데 오빠의 이름 세 글자가 보이자 자랑스러웠고 합격을 기념하고자 그 화면을 캡쳐 해서 저장해 놨다.
선생님들에게 남자 친구가 드디어 직장인이 되었다고 말했고 잘 됐다면서 축하해주셨다.
나중에 한 얘기지만 오빠는 대학원에 가서 국어 교육을 전공하고 임용고시를 봐서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했고 직종 중에 영업사원을 택한 이유는 자신이 하는 만큼 인센티브가 나오고 실적에 따른 연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해줬다.
난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1년 8개월 만에 취업한 오빠를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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