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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25. 2024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


 가끔 부모님과 남동생이 적적할까봐 재롱이를 친정에 한 달에 한번쯤

 4~5일을 보내고는 했는데 그 때 재롱이는 친정 집에 있었다.

 호빵과 붕어빵에 들어 있는 팥을 좋아했기 때문에 팥이 들어간 부분을 

주면 먹고 안 들어간 부분을 주면 코로 밀어내며 거부하는 재롱이 모습에

 우리 가족은 그럴 때 마다 웃음이 터지고는 했다.

 재롱이가 마스코트처럼 그나마 우리를 웃게 만드는 귀엽고 매우 소중한 강아지였다.

 친정에 보낸 그날도 남동생은 재롱이가 좋아하는 붕어빵을 일부러 사와서 

재롱이와 나눠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붕어빵을 맛있게 먹는 사진을 찍어서 내게 보내줬다.

 그리고 엄마가 그 때도 가게를 하셨는데 재롱이는 안주 중에 대구포를 특히 

좋아해서 대구포를 잘게 썰어서 주면 맛있게 먹고는 했다

.

 우리 식구 중에 엄마가 최하위 서열이었는데 유일하게 재롱이에게 대접받을 

때가 엄마가 퇴근하고 왔을 때 였는데 그 이유는 엄마 가방에 대구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동생은 친정에 재롱이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공기가 다르다고 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났는데 재롱이가 밥을 먹지 않는다는 전화가 왔다.

 재롱이가 워낙 나를 많이 따랐기 때문에 친정집에 보내면 한 이틀 동안은 밥을

 먹다가 언니인 내가 계속 안보이면 그 이후부터는 밥을 거부하고는 했다.


 좋아하는 커피, 박하사탕, 간식 등을 줘도 안 먹는다고 해서 걱정이 되는 마음에

 친정으로부터 재롱이를 다시 데려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어느 날 밤에 재롱이가 갑자기 숨을 잘 못 쉬고 목에서 

거친 파열음이 들려 얼른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니까 부천에 24시간 운영하는 병원으로 수술을 잘하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남편과 함께 재롱이를 데리고 병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재롱이를 산소가 나오는 곳에 넣어났다.

 그러자 파랬던 입술이 다시 분홍색으로 바뀌면서 편안해 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이 때 의사 선생님이 재롱이 나이를 묻길래 13살이라고 하니까 너무 예쁘게 생겨서

 아직 아기 강아지인 줄 알았다며 피부도 좋고 관리가 잘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재롱이의 병명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시는데 노견들에게 찾아오는 병인데 

수술을 해도 계속해서 기침 같은 소리를 내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병이라면서 동영상을

 보여줬는데 수술을 했는데도 계속 파열음을 내는 강아지를 보니까 너무 안쓰러웠다.

 일단 약을 3일 치 처방을 해 줄 테니 약으로 증상이 좀 많이 사라지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면서 일단 지켜보자고 하셨다.

 집에 데려 갔고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 다음날 약을 먹였는데 증상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재롱이가 걱정되어서 집을 비우는 것이 많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이 날이 대학원 

기말고사 기간이라 시험을 봐야 하는 날이어서 어쩔 수 없이 가야 했고 대학원에서

 시험을 치르고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면서 혹시 우리 재롱이가 잘못되어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겁이 났다

. 그런데 언니가 오자 아픈데도 불구하고 내가 와서 좋다며 안아 달라는 모습에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면서 괜찮아진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 다음날 점심에 다시 심한 증상을 보이며 숨을 헐떡거려서 아파트 

근처에 있는 동네 병원으로 재롱이를 안고 뛰어 갔다.

 선생님은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재롱이에게 산소 마스크를 끼었고 응급 처치를

 하셨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하셨다.


 난 우리 재롱이에게 매일 

 ‘우리 재롱이는 건강하니까 20살 까지 살 거야. 언니 옆에 오래 있어줘. 사랑해 

재롱아’ 라고 말하고는 했었다.

 근데 아직 13살인데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15살에서 16살 까지 사는 강아지들이 많고 심지어 20살 까지 사는 강아지들도 가끔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낼 수는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남편에게 재롱이의 상태를 알렸다.

 처음에는 절대로 침대 위에 올라가게 해서는 안 된다며 말했던 사람이 자기가 먼저 잘 때는

 재롱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같이 자고 재롱이가 친정에 있을 때에는 우울해 하던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인데 재롱이를 잃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갑자기 숨을 또 못 쉬게 되니까 재롱이가 살려고 물을 마시며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것 같았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계속 주저 앉고 있었다.

 다시 부천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산소 방에 넣어났더니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당분간 재롱이를 입원 시켜서 정확한 상태를 알아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유리로 되어 있는 산소 방 앞에 보호자가 오래 서 있으면 자기도 나가고 싶어 

흥분해서 다시 상태가 나빠질 수 있으니 재롱이를 보지 말고 나가라고 하셨다.


 그 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롱이가 입원을 했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보러 가야겠다고 하시면서 아빠는

 아픈 모습을 보면 평생 그게 생각날 것 같다며 못 보겠다고 안 오시고 엄마와

 남동생만 왔는데 재롱이를 보려고 산소 방에 갔다.

 엄마는 산소방 밖에서 손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픈 와중에도 재롱이는 손을

 줬다.

 너무 귀여워서 우리 넷은 재롱이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유리벽에 막혀 

터치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남동생은 재롱이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마지막 사진이 될지는 전혀 몰랐다.


 의사 선생님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우리에게 일단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이렇게 산소 방 앞에 보호자가 서 있으면 나가고 싶은

 마음에 흥분 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집으로 왔다.

 집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가족이 다 나가자마자 재롱이가 불안감에 안절부절 했고

 다시 숨을 못 쉬는 상태가 되어서 응급처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만 잘못됐다며 전화가 왔다.

 나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병원으로 갔고 그 사실을 엄마한테 알렸다. 엄마도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나는

 ‘아닐꺼야. 의사 선생님이 우리가 올 때 까지 계속 응급처치를 하며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살아 날 꺼야’ 라고 말하며 갔다.

 절대 이렇게 내 곁에서 갑자기 4일 만에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남편과 나는 재롱이를 보았는데 눈도 못 감고 죽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연결된 장치들을 다 빼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재롱이를 안았는데 힘없이 축 늘어진 채 고개가 떨어졌다.

 그 때 눈물이 터졌다.

 나는 울면서 다시 품 안에 제대로 안았다.

 이미 무지개 다리를 건넌 재롱이를 보며 절규하듯이 울었다.


 숨을 못 쉴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눈을 못 감고 죽을 만큼 우리 재롱이가 얼마나 아팠을까?

 나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얼마나 살려고 발버둥을 쳤을까? 라는 생각에 재롱이를 안고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다. 내 옆에 있는 남편도 울고 있었다.

 그 때 엄마와 남동생도 도착했고 재롱이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남동생이 중1때 재롱이가 우리 집에 왔고 동생은 재롱이와 27살에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난 무뚝뚝하고 말없는 남동생이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우리 가족은 재롱이를 보내 주기 위해 김포로 떠났다.

 김포에 강아지들의 납골당이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재롱이를 깨끗이 닦아 상자에 넣어줬고 그 상자는 내가 들었다. 

남편은 내가 재롱이를 안고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 자기가 운전을 못할 것 같다며

 재롱이와 함께 뒷 자석으로 가라고 했다.

 가는 내내 상자 뚜껑을 열고 재롱이를 계속 쓰다듬어 주며 흐느꼈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다.


 언니 없이 혼자서 얼마나 떨었을까?

 이렇게 갈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내 품에서 보내 줄 걸이라는 후회도 들었고 

바로 수술을 했다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재롱이에게 울타리가 되어 준 가족 없이 외로운 길을 혼자 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재롱이가 불구덩이에 들어갈 때 더 이상 재롱이를 안을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슬픔에 미친 듯이 울었다.

 재롱이를 담은 항아리를 안았는데 마치 체온이 느껴지듯이 따듯했다

 재롱이 납골당 안에 재롱이가 좋아하는 커피 믹스와 사탕 중에도 내가

 깨물어 주는 박하사탕만 먹었기에 박하사탕을 넣어 줬고 재롱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들로 꽉 채워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성당에서 산 천사소녀를 넣어주며 재롱이가 외롭지 않게 

같이 천국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재롱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언니가 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았던 재롱이는 내가 대문을

 열 때면 벌써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렸고 언니가 강의 준비를 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면 내 무릎에 앉아 있었으며 또 내가 밥을 

먹을 때에도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남편이 우리 둘이 집을 비우면 재롱이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며

 카메라로 녹화 영상을 찍었는데 소파 구석에 누워 있다가 대문을 보는 

행동 패턴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가족 그리고 특히 나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던 나의 귀여운 강쥐.


 난 전혀 보내 줄 준비를 하지 못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 버리니까 

그 전에 재롱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 했던 게 가장 후회가 됐다.

 내가 강의를 나가거나 학교를 갈 때 마다 거실의 소파 구석에서 나를 항상

 애타게 기다렸던 재롱이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지금 재롱이를 떠나 보낸지 15년이 흘렀는데도 눈물이 난다.

 아직도 집에는 재롱이의 예전 사진들이 여기 저기 걸려 있다.

 가끔 재롱이의 사진을 가만히 보고는 하는데 왜 재롱이의 눈빛이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다.

 재롱이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이별이 얼마만큼 큰 슬픔과 아픔으로

 기억되는지 가르쳐 주고 떠났다.

 내가 가장 힘이 들 때 나를 많이 위로 해 주고 그나마 많이 웃게 해 준 것은 

어떤 이도 아니고 강아지 재롱이였다.

 어떤 이는 강아지의 죽음에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며 욕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재롱이는 사랑이자 위로였다.


 엄마는 재롱이가 긴 시간 동안 아파하다가 세상을 뜨면 언니가 속상할 까봐 

그렇게 빨리 하늘나라로 간 것 같다며 위로해주셨지만 뼈 속 까지 스며드는

 슬픔과 상실감에 일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의 외도를 알고 난 이후 얼마 안되어 재롱이가 바로 떠났기 때문에 나의

 충격은 2배로 더 커졌다.

 그래서 나는 2개월 동안 잡혀 있던 스케쥴을 모두 취소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정기적으로 교육을 담당하는 곳도 있었고 기업체 특강 등이 있었지만 이런

 마음으로 앞에 나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의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청소를 하다가 냉장고 밑에 재롱이가 씹던 껌을 발견했는데 그 껌을

 붙잡고 한 3시간을 울었던 것 같다.

 그 울음의 의미는 내가 그동안 억눌러 났던 아픔들에서 나오는 눈물도 있었다.

 불우했던 가정사, 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삶, 지하철에서 쓰러질 만큼 힘들었던

 대학생이자 가장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최근에 겪은 남편의 외도까지 내 안의 아픔이 슬픔이 되어 눈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래도 재롱이가 있어서 덜 아팠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부터 무엇으로부터 덜 아파할 수 있을까?

 재롱이마저 떠난 집은 그야말로 삭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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